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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공사 Apr 29. 2022

친하지 않은 사람한테 받은 장문의 문자

모르면 자꾸 상상한다.

사이공에 있을 때 L을 알게 되었다. L과는 친하지는 않았지만 몇 번 만났다. 만날 때마다 여러 명이서 만나서 단 둘이 이야기하거나 친해진 적은 없었다. 알긴 알고 몇 번 봤지만 따로 만나면 어색할 것 같은 사이가 L과 나의 관계였다.


어느 날, 여느 때처럼 L이 포함된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그날 내가 모임을 이끄는 차례여서 이것저것 준비할 때였다. 그러던 중 L의 메시지를 받았다. 결론은 오늘 일이 생겨 참석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런데 L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신이 왜 이 상황이 올 걸 예상하지 못했는지 정말 구구 절절하게 써서 보냈다.


장문의 메시지를 받고 바로 든 생각은 '이렇게 까지 보낼 필요는 없는데'였다. 우리 모임이 강제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L이 주선자도 아니라서 큰 문제가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일이 있어서 못 가요'면 충분하다지 않나 싶었다.


이러고도 몇 번 더 L은 비슷한 상황에서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두세 번 L의 메시지를 받았을 때 L이 왜 그렇게 길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지 이해했다. 상대방의 오해와 상상력의 여지 줄이기 위해서다.


'일이 있어서 못 가요'라는 문자만 받으면 무슨 일 때문에 못 오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러면 이 사람이 모임을 일부러 빠진다고 오해하거나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다. L처럼 빽빽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한 문자에는 상상력이 끼어들거나 오해할 여지가 줄어든다. 듣는 사람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만 알면 된다.


이때 이후로 나도 L의 방식을 배우려 한다. 나를 주절주절 말한다. 상대방은 말을 하지 않으면 상황을 모른다. 모르면 자꾸 상상을 하니까 오해도 생긴다.


가끔 L의 문자를 생각한다. 그러고는 L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다. 어떻게 지내는지 물어본다면 또 장문의 문자를 받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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