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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위에 글 Dec 01. 2024

(6화) 인연이 시작되다

인연은 우연히 시작된다



"서로 다른 우리지만

인연은 길 위에서 우연히 시작된다."





제방 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은 달콤한 향기를 실어 나르는 듯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랫보'를 바라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어딘지 모를 쓸쓸함이 스며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와 내 시선이 마주쳤고,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어색한 침묵이 우리 사이를 가로질렀고, 그 틈을 바람 소리가 조용히 채워갔다.


"저를 따라온 건 아니죠?"


침묵 속 적막감이 어색해서였을까, 아니면 그녀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나는 자연스레 말을 걸었다.


"따, 따라온 거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가는 길이 같았던 것뿐이에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그녀는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약간 더듬거리며 퉁명스럽게 대답했지만, 그조차 어쩐지 귀여워 보였다.


"푸~흐"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그녀의 당황스러운 모습이 어쩐지 귀여워 보였던 걸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차 싶어서 나는 급히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굳이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짧게 대답한 뒤, 내 옆을 스치듯 지나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바람에 흩날린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은은하고 매혹적인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가을 햇살을 온몸에 받으며 그녀는 제방을 따라 걸어갔고, 그 모습을 보니 마음 한구석에 묘한 설렘이 스며들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그녀는 나를 의식한 듯 걸음을 재촉하며 점점 멀어져 갔다.


제방에는 가을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 바람에 흔들리며 물결처럼 일렁였다. 그 꽃들이 제방을 알록달록 물들이는 모습은 경이로웠다. 어느새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들더니 연신 셔터를 눌렀다. 그녀의 눈빛에는 꽃에 대한 깊은 애정과 호기심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잠시 뒤, 그녀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눈을 살며시 감은 채 활짝 핀 꽃들 사이로 고개를 숙여 향기를 맡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자연과 하나가 되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햇살을 머금은 그녀의 얼굴은 투명하게 빛났고, 맑고 고운 피부 사이로 은은한 핏줄이 비칠 만큼 섬세하고 깨끗했다. 그 순간, 그녀는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풍경 자체가 된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 꽃은 쑥부쟁이입니다."


"앗, 깜짝이야!"


 "......"


"누가 물어봤나요!!"


갑작스러운 내 말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숨을 고른 뒤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아마도 꽃에 깊이 몰두해 있던 탓에 내가 가까이 다가온 줄 전혀 몰랐던 것 같았다.


그 순간, 자연과 하나 되어 작은 행복을 만끽하고 있었을 그녀의 소중한 시간을 내가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어쩔 줄 몰라 머쓱한 표정으로 눈치를 살피며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그녀도 굳은 표정으로 응시했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사이, 바람이 살짝 불어와 우리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푸~흐흐"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네요. 그런데, 어떻게 꽃만 보고, 이름을 아세요?"


어느 순간, 내 머쓱한 표정이 우스웠던 걸까, 아니면 조금 전 내 행동에 대한 복수를 하려는 걸까. 그녀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입가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띤 채 가볍게 사과했다.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아내가 작은 꽃가게를 운영했었거든요. 그때 관심이 생겨서 공부를 조금 했어요."


나는 그녀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대답했다.


"아~"


"쑥부쟁이는 원래 향이 강하지 않고 특별한 향이 없어서 가까이서 맡아도 쉽게 느낄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저기 옆에 있는 건 구절초, 그 앞은 해국이고요. 이 셋은 코스모스와 함께 가을을 대표하는 꽃들이죠."


그녀는 귀를 쫑긋 세우며 나와 꽃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혹시, 이 꽃들의 꽃말도 아세요?"


"물론이죠. 쑥부쟁이와 해국의 꽃말은 '변치 않은 사랑'이고, 구절초는 '사랑의 고백'이고요. 저기 보이는 흰까실쑥부쟁이는, '순수한 사랑'과 '진실된 사랑'이라는 꽃말을 가지고 있죠."


"와~, 꽃말까지 다 아시다니 대단하시네요."


그녀의 칭찬에 마치 어린아이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칭찬은 나이에 상관없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음을 새삼 느꼈다.


"가을 야생화라 그런지 꽃말이 사랑과 관련된 게 많네요."


"네, 그래서 가을을 사랑의 계절이라 부르는지도 모르겠네요."


나는 입가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바람이 그녀의 얼굴을 스쳐 지나가자 머리카락이 날려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그녀는 손으로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그 순간, 그녀의 가녀린 손목에 끼워진 머리끈이 눈에 띄었다. 머리끈에는 하얀 꽃잎 모양의 장식이 달려 있었다.


"어떤 꽃을 좋아하세요?"


"저요? 데이지요. 가만 보니 저 꽃과 비슷하게 생겼네요."


그녀는 쑥부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맞아요. 데이지와 많이 비슷하죠. 둘 다 흰색이나 연한 색의 꽃잎을 가지고 있어서 종종 헷갈리기도 하지요."


"데이지는 4월에서 6월 사이에 피는 봄꽃이고, 꽃말은 '순수', '희망'입니다."


"아~, 데이지를 좋아하면서도, 봄에 피는 꽃이라는 것 말고는 아는 게 없었네요."


그녀는 조금 자책하듯 말했다.


"우리 때는 꽃을 보면 꼭 꽃말을 찾아보곤 했죠. 마치 꽃 속에 숨겨진 영혼을 발견하는 기분이랄까요? 그래서 그 시절엔 참 낭만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요즘은 그런 여유가 점점 사라지는 것 같아 아쉬워요."


나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말했다.


"꽃말을 꼭 알아야 낭만이 있다고 말하는 건 조금 과장된 것 같아요. 꽃말을 몰라도 꽃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취해 즐거움을 느끼고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적이지 않을까요?"


그녀는 반문하듯 대답했고,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나 때는 말이야' 같은 말을 싫어한다고들 하던데, 혹시 내가 그녀 눈에 꽉 막힌 아저씨, 소위 '꼰대'로 보이진 않았을까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렇죠.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나는 그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어색해질까 봐 화제를 돌리려는 듯 그녀에게 질문을 건넸다.


"이곳에 여행 온 거예요?"


"음... 여행이라기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밀린 숙제? 뭐 그런 거랄까요."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대답했다.


"밀린 숙제요?"


"버킷리스트라고 할까요?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들요."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얼핏 보기에, 아직 버킷리스트를 준비할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나이가 중요한가요?"


"태어날 때 순서는 정해져 있다지만, 죽음 앞에서는 순서가 없다잖아요. 미리 준비하는 게 나쁠 것도 없고요."


그녀의 대답은 담담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긴 하죠."


"그런데 이 마을이 버킷리스트에 들 만큼 유명한 관광지도 아닌데, 어떻게 포함된 거예요?"


나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꼭 유명한 관광지여야 하나요?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중요한 곳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요."


"그럼, 이곳에 특별한 연고나 인연이 있나 봐요?"


"저는 없는데... 엄마가 이곳과 인연이 좀 있어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앞산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녀의 어머니를 떠올리는 듯했다.


"그럼 어머니께서 이곳에 사셨었나봐요?"


"아니요, 그렇진 않아요..."


"아저씨는 이곳이 고향이라고 하셨죠?"


그녀는 대답을 피하려는 듯 갑자기 나에게 질문을 돌렸다.


"저요? 네, 맞아요."


"그럼 가족이나 친척, 친구분들이 이곳에 사시겠네요?"


"가족이나 친척은 없고요, 친구 부모님이 사세요."


"아, 그러시구나. 이곳에는 자주 방문하세요?"


"아니요. 오늘이... 아마 7년 만일 거예요."


"아, 정말 오랜만에 오셨네요. 오늘은 무슨 일로..."


"친구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조문 왔다가, 집에 가기 전에 잠시 들렀어요."


문득 아침에 조문을 다녀온 명길이 어머니가 떠올랐다.


"지금 사시는 곳은 어디신데요?"


"서울요."


"아, 저도 서울 사는데, 어느 동네에 사세요?"


"신도림 근처에 살아요. 어디 사세요?"


"저는 잠실요."


그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는 옛날에 비해 많이 변한 것 같나요?"


그녀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더니 내게 물었다. 


"네, 많이 변했죠.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어디 있겠어요."


나는 고개를 들어 제방 옆에 보이는 카페를 가리켰다.


"저기 카페 보이시죠? 저 자리가 옛날에 제가 살던 집입니다. 집을 허물고 카페를 지었어요. 그리고 저 앞으로 철길이 지나갔었는데, 지금은 철거되고 이쪽으로 새 철길이 생겼어요. 그 과정에서 앞산 일부도 소실돼서 조금 흉물스러워졌지요."


7년 전, 아버지 산골을 위해 이곳에 들렀을 때, 마침 카페 공사가 한창이던 모습이 떠오른다. 엄마가 부천으로 이사하시면서 집을 급히 처분하느라 헐값에 팔았었다. 익숙했던 집터가 허물어지는 광경을 보며 아쉬움이 밀려왔고,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모두 저편으로 사라지는 듯해 가슴 한편이 무척이나 아렸던 기억이 난다.


나는 잠시 말을 멈추고 제방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여기를 올 때마다 하나씩 변화가는 모습을 보면, 마치 기억 속 조각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깊은 한숨과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녀는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들으며 제방 너머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말없이 흐르는 침묵 속에서 우리는 어딘가 서로를 이해하는 묘한 공감을 나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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