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아픈 상처를 마주할 때
누군가 그 길을 함께 걷고 있다면
어느새 그 길은 따뜻해진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은 그녀의 발소리에 맞춰 점점 커져가, '그녀에게 들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저기요!"
"저요?"
그녀가 나에게 말을 걸 줄은 생각지 못했기 때문일까? 나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놀랐던 마음을 진정시키려는 듯 깊은숨을 들이마신 후, 뒤돌아보며 말했다. 그녀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햇살을 머금은 얼굴은 참으로 아름답고 매력적이었다. 성숙함 속에 귀여움이 묻어났고, 눈은 빨려 들어갈 듯 깊고 맑았다.
"여기가 '상신리' 맞나요?"
나는 검지 손가락을 펼치고 손을 들어 마을 회관의 입구에 걸려 있는 명패를 가리켰다. 명패에는 '상신리'라고 마을 이름이 한글로 또렷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는 손가락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 명패를 바라보았다.
"아~, 그러네요"
그녀가 멋쩍은 웃음을 보이며 고개를 돌려 나를 다시 바라보았다. 웃는 그녀의 모습은 순수하고 귀여웠다.
"이곳에 사세요?"
"저요? 아니요."
"오래전에 떠나 지금은 살지 않아요.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렀어요"
"그럼 여기가 고향이신 거예요? 이 마을에 대해서도 잘 아시겠네요?"
"네, 그런 셈이죠."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순간 그녀의 눈이 커지면서 반짝였다.
"아... 그럼 초면에 죄송스러운 부탁일 수 있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시간은 괜찮은데..., 왜요?"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궁금했다.
"제가 이곳이 처음이거든요. 이곳이 고향이시라 하셔서..., 괜찮으시다면 마을 길 안내 좀 부탁드려도 될까 해서요?"
"시간 내주시면 따뜻한 커피 한잔 사드릴게요. 네~"
그녀는 나를 설득이나 하려는 듯 살짝 애교 섞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부탁이 조금 황당하고 당황스럽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당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낯선 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그것도 낯선 남자에게, 요즘 같은 험한 세상에..., '내가 무섭지도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길 안내..., 해주실 수 있으세요?"
그녀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재촉하듯 조심스럽게 다시 한번 물었다. 그녀의 눈은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조르듯이 천진난만해 보였고, 자신의 부탁을 수락할 것이라는 확신이라도 든 듯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길 안내요?......"
"어... 어려우세요?"
"......"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녀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묘한 이끌림 때문인지, 아니면 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더 커서인지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내 딴에는 오랜만에 고향에 돌아와 가을 추수가 거의 끝나가는 한적한 들녘을 조용히 걸으며 추억에 잠기고 싶었고, 나만의 작별 인사를 준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또한 낯선 여성과의 동행은 어쩐지 부담스럽기도 했다. 아마 오랜 시간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가 무리한 부탁을 드린 것 같네요. 죄송합니다."
대답을 망설이자, 그녀가 씁쓸한 사과를 건넸다. 얼굴에는 큰 실망감이 묻어나 있었다.
그녀는 뒤돌아, 주차된 자신의 차를 향해 걸어갔다. 실망감 때문인지 발걸음이 조금 무거워 보였고, 심술 난 아이가 툴툴거리듯, 바닥에 나뒹구는 애꿎은 낙엽들을 발로 툭툭 차며 걸어갔다. 그녀의 쳐진 뒷모습을 보니 그녀의 부탁을 선뜻 들어주지 못한 것이 조금은 미안했고, 한편으로는 깊은 아쉬움이 가슴속에서 피어올랐다.
그녀를 뒤로 한채 '아랫보'를 따라 길게 나있는 제방(둑) 쪽으로 걸어갔다. 제방에 난 길은 왕래가 드물었는지 이름 모를 풀들이 길 위로 자라나 희미해져 있었다.
제방에 올라서니, '아랫보'와 앞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슴이 뻥 뚫린 느낌이 들었다. 제방에 부는 바람은 '왜 이제야 왔어'라고, 나를 나무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그리웠고, 안쓰러운 듯 포근하게 나를 감싸 안았다. 제방은 나의 또 다른 친구였다. 그 시절 명길이와는 대체로 행복을 공유했다면, 제방은 슬픔과 아픔을 공유했다. 제방은,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내게 묻지도 않았으며, 있는 그대로 묵묵히 들어주고 공감해 주는 친구이자 안식처였다. 연어가 태어난 곳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듯이, 마음이 아프고 슬플 때는 제방에 올라가 그곳을 따라 걸었다. 그 시절 '아랫보'를 지나 제방을 타고 부는 바람은 포근하게 나를 안아주곤 했다. 오늘도 그때처럼, 제방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자신의 정수리를 내어주며 나를 감싸 안고 '편히 쉬었다 가라'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동이 튼 지 좀 시간이 지났지만, '아랫보'에는 하얗게 피어오른 물안개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물안개는 '아랫보'를 더욱 신비로운 공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앞산의 장송에서 한 쌍의 백로가 물안개 사이를 뚫고 물 위로 내려앉았고, 한 쌍의 백로가 내려앉은 '아랫보'의 가장자리에는, 갈대가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연주하듯 부드러운 소리를 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갈대가 내는 아름다운 멜로디는 한 쌍의 백로가 물안개를 헤치며 물 위를 유영하는 모습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마치 갈대가 내는 연주에 맞추어 한 쌍의 발레리나가 춤을 추는 듯 보였다.
한 쌍의 백로가 유유히 지나가는 갈대숲 사이로 희미하게 무언가가 보였다. 자세히 보니, 낡은 공이었다. 이번 여름 장마에 떠내려 온 듯 보였고, 여기서는 어떤 공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그 공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는 마치 나에게 최면을 거는 듯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이 살며시 감겼다.
'어느 날이었을까?' 아마, 그날은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선물을 받은 날이었을 것이다.
"연우야! 우리 연우!! 아부지 왔데~"
아버지의 부름에 한걸음에 달려갔다. 아버지는 막내인 나를 많이 예뻐하셨고, 집에 들어오실 때면 제일 먼저 나를 찾으셨다.
"네!, 아부지, 저 여기 있어요."
아버지는 마당을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 듯 보였다. 몸에서는 술 냄새가 확 뿜어져 나왔고, 제대로 몸을 가누시지도 못했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면 거의 고주망태가 될 때까지 마시는 일이 흔했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내 앞에서 오른손을 들어 올려 손에 든 망을 흔들어 보이셨다. 그 망에는 축구공이 담겨 있었다.
"이쁜 우리 새끼! 아부지 선물, 어서 나가서 친구들이랑 놀어~"
나는 아버지가 들고 계신 축구공을 보고 내 눈을 의심했다. 연신 한 손으로 눈을 비벼가며 아버지가 들고 계신 망을 쳐다보았다. 진짜 축구공이었다. 나도 모르게 울컥했다. 축구 선수가 꿈인 나에게 축구공은 그렇게 바라던 선물이었다.
"고맙습니더!! 아부지 고맙습니더!!"
연신 허리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아버지한테 넘겨받은 축구공을 들고 명길이를 불러 마을 놀이터로 나갔다. 동네 친구 녀석들한테 자랑질도 하고 싶었고, 어서 축구공을 가지고 친구들과 뛰어놀고도 싶었다. 마을 놀이터에는 많은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축구공의 힘은 대단했다. 친구들은 내 주변에 모여서 떠날 줄을 몰랐다. 그날 나는 주인공이었고 왕이었다.
저녁 해가 뉘엿뉘엿 하늘을 물들일 때쯤 명길이와 함께 집으로 향했다. 한 손에는 축구공이 담긴 망이 들려져 있었고,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장군처럼 의기양양했고, 발걸음도 가벼웠으며,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 집이 가까워오자 냉랭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 순간, 불길한 예감이 밀려왔다. 익숙하고 기분 나쁜 그런 느낌이었다. 심장은 튕겨져 나올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명길이는 불길한 예감을 직감하듯, 아무 인사도 없이 자기 집으로 급히 뛰어 들어갔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당은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밥상과 그릇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반찬들은 서로 뒤섞여 질척거렸다. 바닥에 흩어진 밥알들은 이미 참새떼의 저녁이 된 지 오래였다.
엄마는 마루 한쪽 구석에 걸터앉아 소리를 내며 서글프게 울고 계셨다. 머리카락은 무질서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상의의 목 부위는 쭈욱 늘어져 목이 드러나 있었다. 그 목에는 손톱에 긁힌 듯한 상처가 선명하게 보였다. 아무래도 아버지와 크게 싸우신 듯하다. 아버지는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오시는 날이면 평소에도 괜히 엄마에게 시비를 걸곤 하셨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악마가 되는 것 같았고, 그런 아버지를 볼 때마다 무섭기도 하고 증오스럽기도 했다.
"아이고~, 내 팔자여~"
"아이고~, 내 팔자여~"
"내가 죽어야 혀~, 저 인간 때문에..., 내가 죽어야 혀~, 몬 살어~, 몬 살어~"
엄마의 울음은 절규에 가까웠다. 엄마의 오른쪽 눈두덩이는 이미 부풀어 올라 시커멓게 멍이 들어 있었고, 입술은 터져서 피가 굳어 있었다. 말을 내뱉을 실 때마다 입술 사이로는 피가 섞인 붉은 침의 파편들이 밖으로 튀어나왔다.
"엄니! 엄니!"
"엉엉, 엉엉"
엄마에게 달려갔다. 나를 보시자마자 더 서글프게 우셨다. 나도 모르게 굵은 우박 같은 눈물이 거침없이 떨어졌다.
"엄니, 울지 마"
"엄니, 울지 마"
"왜 울어..., 엉엉..., 엄니 울지 마..."
엄마 품에 안겼다. 엄마는 그런 나를 두 팔로 꼭 안아주셨다. 엄마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은 하염없이 내 머리 위로 떨어졌다. 나는 엄마의 몸에서 느껴지는 거친 떨림과 눈물에 동화되어, 엄마의 품에서 그렇게 한 참을 울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엄마는 조금 진정이 되셨는지, 마루에 너저분하게 놓여 있는 걸레를 집어 들고,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닦으셨다.
"우리 애기, 그만 울거레이"
"엄니는 괜찮어, 울지 마레이"
엄마는 거칠지만 따뜻한 손으로 내 얼굴에 묻어있는 눈물과 콧물을 닦으시며 나를 달랬다.
"밥 안 묵었제?"
"배 안 고파, 안 묵어도 돼, 흑~, 흑~"
"그래도 밥은 묵어야제~"
엄마는 마루에서 일어나 마당 바닥에 널브러진 밥상과 그릇들을 주워 들어 마당 구석에 설치된 수돗가로 가져가셨다. 그리고 반찬은 주섬주섬 비닐봉지에 담고, 손으로 집을 수 없는 것들은 작은 빗자루로 구석으로 쓸어 모았다.
"끼익"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소리에 흠칫 놀랐다. 진정됐던 심장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난 뚫어지게 대문 쪽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막내 누나가 벌어진 문 틈 사이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러고는 집안 분위기를 살피듯 두리번거렸다. 아마 아버지가 계신지 확인하는 듯 보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시는 줄 알고 깜짝 놀랐었는데, 다행히도 아버지가 아닌 막내 누나였다. 막내 누나는 아버지가 안 계시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마 막내 누나는 아버지와 엄마가 싸우시자 잠시 피신했던 것 같았다.
"누나는 어디 갔다 온겨?"
"아부지랑 엄마랑 싸우시는 것 말리지도 않고!!"
나는 막내 누나를 원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쏘아 부쳤다.
"야!! 차연우! 저거 갖다 버려!!"
막내 누나는 내 말에는 대꾸도 하지 않고, 마당 한 편에 놓인 축구공을 가리키며, 대뜸 갖다 버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는 대려 나한테 화를 내는 막내 누나의 행동이 어이가 없었다.
"아부지가 노름으로 돈 다 날려 부리시고. 저거 사가지고 오셨다는디"
"너는 알고는 있었다냐? 그런디도 너는 저거 가지고 놀고 싶든?"
나는 막내 누나의 말에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가 나한테만 축구공을 사주신 것 때문에 막내 누나가 시기하는 마음에 그런 말을 하는 줄 알았다. '나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엄마를 바라보았다.
"엄니! 누나 말이 마저? 누나 말이 맞냐구?"
"저 가시네는 무슨 쓸데없는 야기를 한다냐."
"아녀, 그런 거 아니니깬, 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데이, 알았제?"
엄마는 나를 안심시킨 후, 막내 누나의 손을 거칠게 잡아끌고 부엌으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나는 마당 한편에 놓인 축구공을 바라보았다. 이 사단의 원흉이 저 축구공이라고 생각하니 알 수 없는 화가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올랐다.
나는 축구공을 들고 대문을 박차고 나왔다. 대문 밖에는 명길이가 서 있었다. 언제부터 명길이가 거기에 서 있었는지는 알지 못했다. 명길이의 시선을 뿌리치고 내달려 '아랫보'가 보이는 제방에 올라섰다. 심장이 터질 듯 거친 숨을 쏟아냈다. 어느새 내 뒤를 따라온 명길이는, 먼발치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결심이 선 듯, 망에서 축구공을 꺼내 두 손으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아랫보'를 바라보았다. 여름 장마가 끝나지 않아서였을까? '아랫보'에는 흙탕물이 거세게 흐르고 있었고, 여수로를 따라 성난 들소처럼 무섭게 내달리고 있었다.
"연우야!! 그러지 마레이!!"
"엉? 제발!!, 그러지 마레이!!"
명길이가 큰 소리로 외치듯 말했다.
희미하게 명길이의 오른쪽 눈가가 떨리는 게 보였다. 명길이는 내가 축구공을 '아랫보'에 던져 버릴 것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듯, 얼굴은 잔뜩 구겨져 있었고, 눈가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은 눈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평상시에는 온순하지만 무슨 일이 생기면 쉽게 흥분하고 충동적인 내 성격을 명길이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명길이와 내가 부딪히며 살아온 지도 벌써 10년이 넘었으니, 그가 내 성격을 몰랐을 리가 없었다.
"말리지 마! 니가 뭘 안다고?"
"연우야! 내 다 안다. 그래도, 니 그것 버리면 후회할기다. 그러니껜 버리지 마라!! 엉~"
명길이의 말이 맞다. 이 축구공을 버리면 분명 후회할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나도, 엄마도 그리고 아버지도 이 축구공을 볼 때마다 오늘 일이 떠오를 것이고, 노름으로 날린 피 같은 그 종잣돈 또한 떠오를 것이다.
아버지는 소작농(小作農) 이셨다. 다른 사람의 땅에서 농사를 짓고, 그 대가로 일정 비율의 수확물을 받아 생활했다. 그래서인지 우리 집은 항상 경제적으로 쪼들렸다. 그래서 엄마는 어려운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농한기 때에는 남의 집에 가서 식모일을 하셨고, 아버지는 공사 현장에 나가서 일을 하시곤 하셨다. 이렇게 힘들게 번 돈을 아껴서 장사 밑천으로 쓸 종잣돈을 오랫동안 모아 오셨다. 엄마는 우리가 무엇을 사달라고 조를 때마다 종잣돈을 모아야 한다고 하셨고, 그 종잣돈이 우리 집의 미래이고 희망이라고 틈만 나면 말씀하셨다. 그런 소중한 종잣돈을 하루아침에 노름으로 날리셨으니, 엄마가 느끼신 허망함과 절망감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연우야! 그럼 정 버리고 싶으면 '하루'만 더 있다가 버리면 안 될까?, 엉~"
"연우야! 하루만!!, 하루만!!, 제발!!."
명길이는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절규하듯 내게 말했다. 그는 다가오지도 못하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명길이의 간절한 절규에도 나는 축구공을 '아랫보'에 던져버렸다. 명길이는 '아랫보'에 던져진 축구공을 보고 망연자실했다. 그리고 축구공이 떠내려가는 하류 쪽을 향해 제방을 따라 무섭게 뛰어갔다.
"엉엉엉"
"엉엉엉"
어느 순간, 축구공과 함께 명길이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나는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나를 짓눌렀다. 얼마 동안 울었는지, 그 시간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내 울음소리는 '아랫보'의 거센 물살 속에서 나는 굉음과 섞여, 앞산을 넘어 다시 메아리가 되어 내게 돌아왔다. 그 울음소리와 함께 축구 선수의 꿈도 '아랫보'의 거센 흙탕물을 따라 떠내려가는 축구공처럼, 강한 물살에 휩쓸려 사라져 갔다.
돌이켜보면, 그때 명길이가 그렇게 나에게 울부짖던 '하루'는 단지 시간적 개념인 내일 하루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일이 되면 화가 누그러져 내가 '축구공을 버릴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이지 않았을까?
그 시절 아픈 상처에 대한 기억을 마주하니, 나도 모르게 먹먹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세월 속에서 씻겨 지워지고 다 잊혔다고 생각했던 낡은 기억들, 아니 기억 속의 아픈 상처들은, 이곳에서 다시금 용솟음치듯 떠올랐다. 치유되지 않은 채 묻어 두었던 상처는 같은 장소에서, 시간을 거슬러 불씨처럼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듯했다.
"바사삭"
"......"
"바사삭"
"......"
멀리서 마른풀을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내 마음을 위로하듯 일정한 리듬을 타고 다가왔다.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나에게 마을 길 안내를 부탁했던 그녀였다. 어느새 그녀는 작은 가방을 등에 메고 한 손에는 카메라를 든 채 내가 걸어온 제방 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내 쪽으로 걸어오는 그녀를 보니, 왠지 모르게 마치 길에서 우연히 헤어진 연인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고, 오래전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그리운 사람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녀의 시선은 '아랫보'를 향해 있었고,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은은한 매력을 발산했다. 입가에는 자연스레 미소가 번졌고, 이 길을 혼자가 아닌 '누군가와 함께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일까? 쓸쓸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나도 모르게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