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연재 중 하루 05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위에 글 Nov 10. 2024

(4화) 낯선 인연을 마주하다

첫 만남은 나를 설레게 한다

"기억의 책장을 넘기다 보면

뜻하지 않게 기억 밖에서

낯선 인연을 만난다"

 



차에서 내려, 잠시 정자에 서서 '아랫보'를 바라보았다. 며칠 전, 전국적으로 내린 비 때문인지 물이 제법 채워져 있었고, 여수로(, 보에 저장된 물을 흘러 보내는 통로)를 따라 냇물로 흐르는 물줄기는 꽤 활기차 보였다.


물고기들은 여수로의 강한 물살을 뚫고 거슬러 올라가기 위해 빠르게 지느러미를 연속적으로 휘저었고, 어떤 물고기는 성질을 억누르지 못한 듯 물 위로 튀어 오르기도 했다. 삐끗하여 물살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여수로는 연어나 다른 물고기들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거나, 생존이나 번식을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큰 산과 같았다. 그곳은 마치 목숨을 걸고 힘겨운 사투를 벌이는 전쟁터와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의 삶 또한 물고기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고기가 여수로에서 처절하게 몸부림치며 힘겨운 싸움을 하듯, 우리 또한 각자의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끝없이 경쟁을 부추기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힘겹게 싸워 나가고 있다. 

  

생존과 번식을 위해 물고기가 떠나는 긴 여정의 종착지는 공간적인 개념이 강하며,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연적인 곳이다. 반면, 우리 삶의 종착지는 여러 요소가 결합된 복합적인 것으로 추상적인 개념에 더 가깝다. 개인의 가치관, 경험, 선택에 따라 성공(돈), 명예, 행복 혹은 건강과 같은 목표들로 다양하게 정의될 수 있다. 이러한 삶의 종착지는 개인의 가치관과 경험, 그리고 욕망에 따라 달라지므로 그만큼 선택의 폭도 넓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목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여정은 어렵고 힘들 수도 있고, 평범하거나 쉬울 수도 있다. 이 모든 선택은 결국 본인의 몫이 된다.  


비가 내리는 날이면,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명길이와 함께 족대(물고기를 잡는 기구의 하나)를 들고 여수로에 나와 물고기를 잡았다. 그러고 보면, 명길이하고는 어린 시절, 이곳에서 함께 했던 일들이 정말 많았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그 시절에는 하루라도 명길이를 보지 못하면 좀이 쑤실 정도였다. 하지만 긴 세월의 터널은 오래전에 우리 사이를 가로막았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라는 속담처럼 순탄하지 않았던 우리의 삶이, 지나온 세월의 무정함이 우리를 눈에서 멀게 하였고, 그래서 마음도 희미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냇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전히 찬 기운을 머금고 내 얼굴에 부딪쳤다. 바람이 얼굴에 부딪칠 때마다 시원함이 감돌았다. 이곳에서 부는 바람은 내가 사는 도시에 비해 차가웠지만, 한편으로는 도시와 다르게 은은하고 포근했다.


계절의 흐름을 망각이라도 하듯 고목에 눈치 없이 매달려 있던 마른 나뭇잎들은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맥없이 땅에 떨어졌다. 어떤 나뭇잎은 마지막 여정을 늦추고 싶은 듯 허공에서 요리조리 몸을 비틀며 저항했고, 또 어떤 나뭇잎은 운명에 순종하듯 곤두박질치며 허공을 가르듯 떨어졌다. 나뭇잎이나 인간이나 삶의 여정을 마감하는 순간에는 매 한 가지인 것 같다.  



"슥슥"


"사박사박"


노면에 맞닿으면서 발생하는 타이어의 마찰음 소리와 낙엽을 밟는 소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번갈아가며 들렸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차량 한 대가 서서히 마을 회관 앞 주차장으로 진입하는 것이 보였다. 주차할 자리를 찾는 듯 잠시 멈추어 섰다. 차는 국내 'H'사의 준중형 흰색 SUV로, 세차한 것처럼 매우 깨끗한 상태였다. 구입한 지 얼마 되지 않았거나 평소에 잘 관리된 것처럼 보였다.


차는 내 차 주변으로 이동한 후 직진과 후진을 여러 번 반복하더니 내 차 옆에 나란하게 멈추어 섰다. 운전이 능숙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앞 유리창에는 햇빛이 정면으로 드리웠고, 앞 유리창에 드리워진 햇빛은 내쪽으로 반사되어 돌아왔다. 반사된 빛으로 인해 운전자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언뜻 보기에는 젊은 여성처럼 보였다.


이른 아침의 마을은 고요했다. 가을 추수가 아직 끝나진 않았지만 거의 막바지에 접어드는 시기인 데다가 가구 수도 적어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아니면 낯선 여성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아무래도 후자에 가깝겠지만 무언가에 홀리듯 자꾸 눈이 갔다.


차 문이 열리더니 한 여성이 내렸다. 정확한 나이대를 예측하기는 쉽지 않았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처럼 보였다. 아니면 더 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 젊은 세대, 소위 MZ 세대는 비교적 풍요로운 시대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런지 건강과 외모 관리에 진심이고, 화장 또한 과하지 않아 자연스럽게 어려 보이는 것 같다. 대체적으로 실제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기 때문에 얼굴만 보고 나이를 예측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긴 머리카락은 밝은 초코 브라운 색을 띠었고, 롱 웨이브 스타일로 자연스럽게 어깨 아래까지 흘러내렸다. 밝은 초코 브라운 색은 햇살이 비칠 때마다 연한 가을 색으로 물들어 자연스럽게 가을 속으로 스며들어 동화되었고, 굵은 웨이브는 곡선의 부드러움을 주어 여성스러움이 물씬 풍겨 나오면서 가을의 여유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얼굴은 우유 빛깔처럼 하얗고 작았다. 콧등과 눈 언저리 부위에는 누가 파스텔로 그려 넣은 듯 붉은 기가 돌았다. 펑퍼짐한 바람막이 점퍼는 아랫단을 묶어 스포티하고 캐주얼한 느낌을 주었고, 연한 황토색과 짙은 갈색 무늬가 조화된 롱 스커트는 연한 베이지색을 띤 바람막이 점퍼와 함께 롱 웨이브의 머리카락과 어우러져 스타일리시한 느낌을 주었다.


전체적으로 느껴지는 분위기는 누가 봐도, 어느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시크한 '도시녀' 느낌이 강했다.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후 도시로 떠났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그녀와의 특별한 사연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이 계시거나,  친척, 친구 또는 지인들이 살아서 잠시 놀러 왔을 수도 있다. 적어도 여행을 목적으로 이곳으로 온 여행객은 아닐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여기에는 여행객에게 흥미를 끌만한 유적지나 시설들이 없었다.


그녀는 두 손을 깍지 낀 채, 천천히 두 팔을 위로 쭉 뻗으며 몸을 늘려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자동차의 와이퍼가 움직이듯 두 팔을 쭉 뻗은 채, 몸을 좌우로 번갈아가며 기울였다. 늘을 향해 쭉 뻗은 긴 팔은 우아함을 자아냈고, 바람막이 점퍼의 소매 끝으로 드러난 가느다란 손목과 하얀 손은 그녀의 전체적인 아름다움을 한층 더해주었다.


그녀가 기지개를 켤 때, 바람막이 점퍼의 아랫단이 끌려 올라가면서 그녀의 복부와 허리 라인이 살짝 드러났다. 그녀의 몸은 햇살에 반사되어 더욱 하얗게 반짝이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본능에 이끌려 시선이 그쪽을 향했다. 균형 잡힌 몸매가 한눈에 들어왔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는 미묘한 감정이 오랫동안 봉인된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수줍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 감정에 도망치듯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보았다. 시야에서는 그녀의 모습이 사라졌지만, 그녀의 모습은 여전히 허공에 잔상으로 남아 있었고, 그 잔상은 내 마음속에 또렷하게 새겨졌다. '내가 미쳤나?' 여성의 드러난 몸매를 처음 본 것도 아닌데, 낯선 여성이어서 그랬을까? 아니면 오랫동안 혼자 지내서 그랬던 걸까?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텅!"


차 문이 닫히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잠시 후 발소리가 들려왔고, 그 발소리는 서서히 점점 가까워졌다.



이전 04화 (3화) 책장을 넘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