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을 뒤로하고 페달을 밟았다. 차량은 아침 햇살이 향하는 곳으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쉬움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시선은 백미러를 향했다. 마지막 인사라도 하듯 명길이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의 입에는 담배 한 대가 물려 있었다. 명길이의 입에서는 연신 하얀 연기가 꾸물꾸물 피어올라 안개처럼 명길이의 얼굴에 깊게 스며들었다. 명길이의 얼굴에 깊게 스며든 담배 연기는 한줄기 햇살과 어우러져 몽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래서일까 내뿜어진 담배 연기와 함께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명길이의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였다.
'명길이를 다시 볼 수 있을까?'
확신이 들지 않았다.
어느 누군가가 인연의 끈을 놓지 않으면, 언젠가는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인연은 한 사람만의 노력으로 계속 이어지지는 않는다. 꽃과 벌은, 이 둘을 연결하는 매개체인 꽃가루를 통해 서로에게 도움을 준다. 벌은 꽃의 꿀을 먹고, 꽃은 수분이 이루어져 씨앗을 생성한다. 사람 간의 관계도 이와 다르지 않다. 꽃과 벌은 '꽃가루'라는 연결 고리를 통해 지속적으로 상호 작용하듯이, 우리 인간도 '관심'이라는 연결 고리가 필요하다. '관심'은 '호기심'이나 '그리움'으로 승화되어 서로를 갈망하고, 그 속에서 지속적인 상호 작용을 불러온다. 그리고 그 상호 작용 속에서 비로소 인연의 끈은 지속될 수 있다. 과연 명길이와 나와의 사이에 '관심'이라는 매개체가 여전히 남아 있을까? 남아 있다면 그 매개체는 아마도 어린 시절의 기억이거나 추억일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나 추억은 세월에 밀려서 희미해질 것이다.
코너를 끼고돌자 어느 순간 백미러에서 명길이의 모습이 사라졌다. 15분 정도 더 달리자, '상신(霜晨)리' 초입에 이르렀다. '천명면'에는 하부 구역으로 7개의 리(里)가 있으며, '상신리'는 그중 하나였다. '천명면' 소재지는 아버지가 장사를 하기 위해 잠깐 머물렀을 뿐, 태어나고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상신리'였다. '상신'은 '서리가 내린 추운 아침'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지명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겨울이 유난히 춥고 눈이 많이 내렸다.
어렸을 적, 300 가구가 넘게 생활했던 비교적 큰 마을 중 하나였다. 듣기론, 지금은 기껏해야 15 가구 정도 거주하고 있다고 했다. 마을의 대부분은 빈집인 셈이다. 일부는 도시에서 귀농한 가구도 있을 것이다. 세월의 흐름에 무너져 유명(幽明)을 달리하셨거나, 엄마처럼 혼자 사시기 적적하셔서 자식 곁으로 떠난 분들도 계셨을 것이다. 또 젊은 친구들은 지긋한 농사일이 싫거나 일거리를 찾기 위해 대도시나 다른 지역으로 떠났을 것이다.
마을 어귀에 다다르니 오래된 조각상이 나를 반겼다. 우리는 이 조각상을 ‘연인상’이라 불렀다. 마을 어귀에 하나가 있고, 마주 보는 반대편 제방(堤防)에도 조각상이 하나 더 있다.
마을에 내려오는 오래된 설화에 따르면, ‘마을에는 아름다운 한 여자가 살고 있었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은 그 여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여자에게는 이미 사랑하는 연인이 있었다. 그 여자는 수호신 몰래 연인을 만났고, 이를 눈치챈 수호신은 질투에 눈이 멀어 이들이 더 이상 만날 수 없도록 이들 사이에 큰 냇물을 만들었다. 그 냇물로 인해 연인들은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되었고, 그리울 때면 냇물을 사이에 두고 언덕에 올라가 멀리서나마 서로를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래곤 하였다. 어느 날 여자는 병에 걸려 앓아눕게 되어 오랫동안 언덕에 나올 수 없게 되었다. 남자는 여자가 한 동안 보이지 않자, 무슨 일이 생긴 것을 직감하고, 물이 가득 찬 성난 냇물을 무리하게 건너다가 냇물에 빠져 죽게 되었다. 남자가 죽은 그 해 여름에 마을에 큰 홍수가 발생하여 정성 들여 지은 농산물에 해를 끼쳤다. 마을 사람들은 남자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여자를 바라볼 수 있도록 그 남자를 닮은 '남자 조각상'을 만들어 세웠다. 여자는 병이 낫자마자 언덕에 올랐다. 그러나 그곳에는 더 이상 사랑하는 연인은 없었고, 그 빈자리를 '남자 조각상'이 채웠다. 여자는 그 남자가 그리울 때면 언덕에 올라 '남자 조각상'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랬다. 세월이 흘러 여자도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를 불쌍히 여긴 마을 사람들은 죽어서도 서로 바라볼 수 있도록 '남자 조각상'이 마주 보이는 언덕에 여자를 닮은 '여자 조각상'을 세웠다.'라는 이야기였다. 이때 세워진 조각상들이 지금의 ‘연인상’이 되었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겠지만, 시골 마을마다 이런 이야기들은 하나씩 전해져 내려오는 것 같다. 어린 마음에도 이야기를 듣고 나서 마음이 아팠던 기억이 났다.
'연인상'은 세월의 풍파 때문인지 아니면 사람들의 무관심 때문인지 한눈에 봐도 풍화가 심하게 진행되었다. 똑바로 서있지 못하고 한쪽으로 기울어져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어찌 보면 흉물에 가까웠다. 그도 그럴 것이 대부분 고령이신 어르신들만 사시는데, 관리가 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난센스인지도 모르겠다. 산업기술의 발달과 맞물려 세월의 흐름에 자연스럽게 관심 밖의 존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도 마을 어귀에 세워져 마을을 지키는 장승, 혹은 마을의 첫인상을 결정짓는 얼굴인데, 이렇게 흉물스럽게 방치되는 모습을 보니 안타까웠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옛 속담이 있듯이 쇠퇴해 가는 마을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을 어귀의 제방과 반대편 제방 사이에는 얼추 40~50m 정도의 폭을 갖는 냇물이 흐른다. 냇물 가장자리에는 모래와 자갈들이 퇴적되어 둔치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었다. 둔치로 인해 실제 물이 흐르는 폭은 매우 작아 냇물이라고 부르기에는 사실 민망할 정도였고, 개울에 더 가까웠다. 둔치에는 어디에서 언제 날아왔을지 모를 잡풀들과 나무들이 깊게 뿌리를 내려, 마치 자신들이 원래 주인인 양 의기양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예전에는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면 물이 제방을 넘어갈 정도로 많은 물이 흘렀었는데, 그런 광경은 더 이상 보기 어려울 것 같았다. 더운 여름에는 여기서, 아이들은 목욕이나 수영을 즐겼고, 아저씨들은 투망(投網, 그물의 일종으로 일본식 한자)이나 낚싯대를 이용하여 물고기를 잡기도 했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은 냇가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수다를 떨면서 모아둔 빨래를 하곤 했다.
'연인상'을 지나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과거에는 흙바닥이었던 마을 안 도로가 모두 포장도로로 말끔하게 바뀌어 있었다. 냇물에서 뻗어져 나와 집들 사이를 굽이굽이 흐르던 도랑은 포장도로에 덮혀져 보이지 않았다.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아마도 지하수처럼 포장도로 아래에서 이웃 소식을 태우고 마을 구석구석을 여전히 흐르고 있을 것이다. 도랑에서는 물고기를 잡거나 친구들과 발을 담그며 놀았다. 마을에 포장도로가 깔려 생활의 편리함은 나아졌을지는 모르겠지만, 옛날 정취가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것 같아 진한 아쉬움이 남았다.
냇가 쪽 포장도로 옆으로는 가을꽃의 대통령으로 불리는 코스모스가 군집을 이루어 형형색색의 꽃들을 뽐내고 있었고, 그 주변에는 개쑥부쟁이, 흰까실쑥부쟁이, 구절초, 해국 등의 가을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가을 정취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들 꽃들은 고향을 방문하는 나에게 환영식이라도 치러줄 요량으로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면서 각양각색의 춤을 보여주고 있었다. 꽃잎 위에 내려앉은 아침이슬은 햇살을 반사시켜 한층 꽃을 영롱하게 만들었고, 꽃잎 위로는 활공 비행을 하듯 여러 마리의 나비들이 바람을 의지한 채 날고 있었다. 벌들은 꽃이 다 지기 전에 꿀과 꽃가루를 조금이라도 더 얻기 위해 꽃잎 사이를 분주하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마을의 앞과 뒤를 지키는 앞산과 뒷산에는 어린 소나무와 장송들 사이로 알록달록한 나뭇잎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마을에는 2개의 보(洑, 가뭄 등으로 인해 물이 부족할 때 농경지에 물을 대기 위해 둑을 쌓아 흐르는 냇물을 막고 그 물을 담아두는 곳)가 있었다. 상류에 있는 보를 '윗보'라고 불렀고, 하류에 있는 보를 '아랫보'라 불렀다. '윗보'는 마을의 위쪽에 위치해 있었고, '아랫보'는 마을의 중간 즈음에 위치해 있었다. '아랫보' 아래로 냇물의 상류가 연결되었다. 우리 집과 명길이네 집은 '윗보'와 '아랫보' 사이의 마을 안쪽에 위치해 있었고, 그곳에는 다른 마을과 연결되는 다리가 놓여 있었다. '아랫보'와 연결되는 냇물의 상류에는 냇물을 가로질러 마을과 건너편 제방을 연결하는 또 하나의 다리가 있었다. 건너편 제방으로 넘어가려면 이 다리를 건너야 했다. 아버지와 엄마는 동이 트기도 전에 이 다리를 건너 건너편 들녘으로 농사일을 나섰던 기억이 난다.
잠시 차를 멈추고 운전석 창문을 내렸다. 창문으로 보이는 건너편 제방의 사면(斜面)은 요번 여름에 거친 장마를 피해 가지 못했는지 듬성듬성 패인 곳이 보였다. 그리고 잡초와 야생화, 콩 넝쿨이 낚싯줄 엉키듯 뒤엉켜져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그 너머에는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었다. 들녘에는 아직 수확을 기다리는 벼 이삭들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인사를 하는 듯했다. 가끔은 참새무리를 쫒기 위해 무거워진 머리를 실려오는 바람에 맡긴 채 흔드는 것처럼 보였고, 또 참새무리를 먼발치에서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허수아비를 나무라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선을 돌리니, '아랫보'의 아래로, 냇물과 가까운 위치에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고목(古木)이 보였다. 높이는 얼추 20m 정도이고, 둘레는 5m가 넘은 느티나무였다. 수백 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내가 이 땅에 태어나기 아주 오래전에도 그 자리를 지켰을 거고,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동네 어르신들은 이 고목이 마을을 지켜주는 '수호목'으로 굳건히 믿고 계셨다. 해마다 4월이 되면 풍년과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제사를 지냈다. 고목의 껍질에는 수많은 자국들이 새겨져 있었다. 세월의 풍파를 한 몸으로 막고 마을을 지켜주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일 것이다.
고목 옆으로는 작고 고즈넉한 정자(亭子)가 있었다. 정자는 농사일을 마친 농부들의 쉼터였고,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또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를 막아주는 우산이었고, 한낮의 뜨거운 태양을 가려주는 양산이었다. 이렇게 정자는 그 자리를 지키면서 늘 마을 사람들의 삶과 함께 했다.
정자 옆으로 신축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마을 회관이었다. 마을 회관은 1층 구조의 콘크리트 건물로 지어졌으며 냇물을 향해 입구가 나있었다. 그리고 마을 회관 앞에는 몇 대의 차를 댈 수 있도록 조그마한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차량을 이동시켜 마을 회관 앞 주차장에 차를 댔다. 갈아입었던 조문 복장을 다시 사복으로 갈아입었다. 입 안이 텁텁했다. 그러고 보니 장례식장에서 아침을 먹은 후 양치를 하지 않은 것 같다. 여기까지 와서 깔끔을 떠는 모습이 우스웠던지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문득 명길이가 헤어질 때, 가면서 마시라고 챙겨준 생수 한 통이 생각났다. 차량의 뒷자리에 놓인 가방에 여분으로 챙기고 다닌 칫솔과 치약을 꺼내 생수통의 생수를 이용해 양치질을 했다. 입 안이 한결 개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