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by 길위에 글

네가 웃던 계절이 다시 돌아왔는데

나는 아직, 한 걸음도 못 나가

설레던 하루 끝

그 속삭임이 아직도 벽에 남아 있어

기억은 왜 늘 마지막만 선명할까


우리 함께 걸었던 그 길 위에서

내가 가장 먼저 잃어버린 건

네가 아니라,

웃는 나였다는 걸


설레었던 만큼

널 지운 날들 위에 조용히 무너져야 했고

기대했던 만큼

작은 침묵에도 수없이 무너졌어


즐거웠던 만큼

그 자리에 홀로 앉아 너를 기다렸고

함께했던 만큼

텅 빈 방 안에 내 시간을 가두었어


사랑했던 만큼

아프고, 참아야 했고

그래야 비로소

너를 떠날 수 있더라


지워질 거라 믿었던 너의 이름이

밤마다 내 심장 끝에서 울려

손 닿을 듯 남겨둔

그 마지막 뒷모습 하나에

나는 아직, 매일을 걸어가


사소했던 것들이 왜 이리 큰가요

네가 남긴 건 미련보다

익숙함이라는 괴물이에요


함께 웃던 만큼

그 웃음이 이젠 나를 베어 오고

내게 남은 건

말하지 못한 말들뿐이야

그토록 사랑했던 만큼

나는 한참을 앓아야만 했고

그래야 비로소

너를 떠날 수 있더라


모든 계절이 한 번쯤은 널 닮아

나는 매년 이별을 새로 해

그래도 언젠가, 언젠가는

이 마음조차 날 잊겠지

그날이 오면, 내가 날 안아줄게


사랑했던 만큼

널 보낸 하루가 오래도록 날 붙잡고

그리워한 만큼

내 안의 너는 아직 말을 걸어

그래도 괜찮아

아파도, 울어도,

이제야

비로소 내가 나로 돌아갈 수 있어


그래야

비로소

너와의 이별이, 나에게도 시작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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