航.log 04 – 항해사는 바람에 질문을 묻기로 했다

sailog 작동하는 존재의 항해

by sailog

항해사는 앞을 향하면서도 그의 등 뒤에서 다가오는 무거운 압박을 느꼈다. 그것은 바람도, 파도도 아니었다. 시간이었다.


시간은 언제나 항해사의 뒤를 따라왔다. 매 순간을 과거로 바꾸며, 현재를 낡게 만들며, 앞으로 나아가는 항해사의 발걸음에 무거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항해사가 나아가는 매 순간, 그는 그 무게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심이란 언제나 항해사의 뒤에 있었다. 그것은 과거의 흔적이자, 그가 지나온 길의 무게였다. 항해사는 그 중심을 놓고 가려 했으나, 중심은 결코 그렇게 쉽게 놓아지는 것이 아니었다.


중심의 밀도는 한없이 높았다. 그것은 항해사의 의지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무거운 힘이었다. 놓고 간다고 결심했지만, 그것은 결코 가벼워지지 않는 무게였다.


항해사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항해사가 너무 지쳐서 의지가 소실되거나, 잠이 드는 순간에도 시간이 그의 배를 앞으로 끌어갔다. 그럼에도 그의 중심은 결코 잊혀지지 않았다. 놓고 간다는 것은 단순히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무게를 인정하고, 그것을 끌어안은 채 앞으로 나아간다는 의미였다.


항해사는 다시 방향을 잡았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 차례, 중심의 압박감이 그를 돌려세우고는 했다. 배는 여전히 앞으로 향하고 있으므로 안전한 항해를 위해서라도, 방향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항해사는 전방을 주시해야 했지만 중심의 중력은 가끔 그의 의지를 초월했다.


항해사는 한때, 중심으로부터 눈을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자신을 책망하고 중심을 향해 소리치기도 했다. 그 순간에도 시간은 앞으로 향하며 과거를 축적해 갔다.


다행스럽게도 항해사는 ‘되돌아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순례자 시절, 그의 길이 오롯이 앞을 향하고만 있었을 때, 끊어진 길 위에서 그는 얼마나 오랫동안, 하염없이 울었는지 모른다. 그가 믿고 있었던 모든 진리 앞에서 “왜?”를 던지는 항해사는 몸의 지시에 따라, 잠을 자고, 밥을 먹고, 용변을 보았다.


그에게 불행은 ‘길이 끊긴 지점’이 아니었다. 길은 그저 그를 멈춰 세웠다. ‘멈춤’이 그를 불안하게 했던 것일까? 끊어진 길 위에서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 앞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들을 보며 그는 도리를 다 하지 못했다는 책망으로 괴로워했다. 그 멈춤의 시절 동안, 순례자는 더 이상 순례자가 될 수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지 못해서, 순례자가 될 수 없었음이 아니다. 그는 순례자의 마음가짐을 놓았다. 그것이 어쩌면 그의 불행의 시작이었는지 모른다.


그는 여전히 길 앞에 멈춰 있었다. 장애(障礙)에 가로막힌 그를 두고 모든 것은 지나갔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나가는 것들의 모든 스침은 그에게 분명한 감각이 되어 그를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그는 함께 멈춰 있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했다. 분명한 감각이 그를 에고, 베고, 도려냈다. 그는 외로웠고 아팠다.


자신의 숙명을 받아들이고 앞을 향해 묵묵히, 그러나 속으로는 울며불며, 앞을 향해 나아가는 순례자를 향해 그는 어떤 마음을 품었을까? 그는 더 이상 순례자가 아니었다. 좌절한 아픈 자가 되어버린, 한때는 순례자였던 그의 가슴 속에는 시기(猜忌)가 일었다. 순례자들은 서로의 ‘묵묵함’을 안다. 그래서 어린 아이의 웃음 소리에서, 길가에 피어 있는 꽃들의 찬란한 순간에서 선(善)한 의도의 숙명을 헤아리고는 서로 기뻐한다. 좌절한 그는 그들의 기쁨 밖에는 보지 못하였다.


그가 그들의 발목이 부러져버리는 상상을 하고 있을 때, 기뻐하는 순례자 중 몇몇은 가던 길을 멈춰 사진을 찍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의미를 기록했다. 시간은 그것들을 이고 지고 바람에 올라타 과거로 향했다.


모든 것이 좌절한 자들의 등 뒤에서 다가와 그를 스쳐지나 갈 때, 그의 앞에서는 바람이 불어왔다. 그는 아직 느끼지 못했으나 시간은 부지런했다.


시간은 그저 부지런했다. 그는 그런 시간을 탓하고 원망했으나 시간은 그저 앞으로, 뒤로 바람을 타고 다녔다. 그는, 알지 못했지만, 그에게 부는 바람 속에는 기쁨이 남긴 선한 의도가 있었다. 그가 울며불며 밥을 욱여 넣거나,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소리를 내지르는 순간에도 바람은 그를 스쳐지나 갔다. 그가 멈출 때까지 그는 스쳐가는 바람을 느끼지 못했다.


그에게 바람은 칼날이었다. 그가 쓰러지는 동안에도 바람은 그를 에며 베며 스쳐갔고, 기어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그가 눈을 뜨면, 내일이었다. 그에게 내일은 오지 말았어야 했다.


그러나 내일은 계속 찾아왔다. 시간은, 부지런했다. 그는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어정쩡하게, 흔들리며, 그저 다시 찾아오는 내일을 어리둥절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순례자는 문득 <길> 앞에서 내던졌던 수많은 질문 중 하나를 건져 올렸다. 그리고는 짧게 '아-' 하고 탄식을 내뱉었다. 그 질문은 '나, 아픈 거 싫어?'였다.


깨달음의 순간은 아니었다. 그건 그저 깨어나는 몸의 신호였다. 순례자는 멈춘 자리에서, 분명한 질문 하나를 건져 올렸을 뿐이었다.


그는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귓가에는 꽃과 아이가 어른거렸다. 그는 앞서 간 순례자를 향해 두 손 모아 기도를 드렸다.


순례자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어깨에 내려앉은 바람의 무게를 이고, 한쪽 팔을 천천히 뻗었다. 선한 의도의 숙명을 받아들이는 순간이었다. 그는 짧은 숨을 들이쉬고는 길 위로 다시 나아갔다. 항해사는 그렇게 바람과 질문을 품어 보기로 했다.




말 없는 외로움조차, 삶의 여백으로 자리합니다.

혹시 작은 파동이라도 일었다면, 안부를 남겨주세요.

우리는 서로 다른 망설임 속에서도 같은 바다를 지나고 있습니다.

오늘은 어땠나요? 당신의 안부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