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없던 캐나다 이민이 정해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중년의 나이에, 말도 안통하는 낯선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 있을까?
단군 이래 최초 보릿고개를 겪지 않은 세대다. 평범한 서민 가정에서 나고 자라 나이키 운동화와 리복 가방은 가져보지 못했지만, 학비 마련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적은 없었다. 혹독한 신고식을 치른 사회 초년생을 지나 결혼, 출산, 자녀 양육 등 생애 주기별 고비를 헌신적인 친정 부모님 희생 덕에 넘겼다. 그러다 보니 불굴의 의지로 고난에 맞서는 마음의 힘이 부족했다.
끼니마다 김치를 찾고 영어 울렁증인 내가 외국에서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수도가 몬트리올인지 토론토 인지도 모를 만큼 (캐나다 수도는 오타와였다.) 평소에 관심도 없었던 캐나다라니. 나에게 캐나다는 애니메이션 ‘빨간 머리 앤’의 배경에 불과했다.
남편 직장에 사건이 터졌고, 남편은 수습하느라 연신 힘든 일을 겪었다. 마음의 상처를 입은 그에게 밴쿠버에서 일자리 제안이 들어왔다. 남편에게는 전화위복이었지만, 그동안 쌓은 소박한 커리어를 정리해야 하는 내 심경은 복잡했다. 3인칭 시선에서 바라보니, 남편과 초등학생인 두 딸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1인칭 시점에서 벗어나, 가족을 우선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편이 먼저 떠난 후 한국에서의 삶을 하나씩 정리했다. 어릴 적에는 외국생활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있었는데, 막상 닥치니 최악의 경우만 떠올랐다.
도전이 두려웠다. 친구가 멘탈이 흔들린 나에게 한 상담가를 소개했다. 그는 불안을 이겨내는 맞춤 솔루션으로 ‘그릿(grit)’이라는 책과 ‘버티기’를 제시했다.
‘그릿!’의 작가인 미국의 심리학자 안젤라 더크워스는 지속적 성장을 원한다면 열정과 끈기를 가지고 꾸준하게 도전 할 것을 강조한다. 여느 자기 개발서와 달리 저자가 전하려는 메시지가 각별하게 다가왔다. 책 내용도 훌륭했지만, 변화를 미루며 여유 부릴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건축가 유현준 교수가 온라인 강의에서 언급했던 ‘버저비터’가 떠올랐다. 농구선수 마이클 조던은 경기 종료를 알리는 신호인 ‘버저비터’가 울린 후에도 바스켓을 향해 볼을 던진다. 대부분의 선수들은 시합 마지막 10초쯤 되면 이번 경기는 끝났다고 여기지만, 마이클 조던의 위대함은 ‘버저비터’가 울려도 승부를 포기하지 않는 점이라고 했다. 나는 후반전에 우리 팀 점수가 낮으면, 이젠 글렀어..라고 일찌감치 항복하는 타입이다.
가령, 운동장을 10바퀴 달리기로 마음먹다가도 9바퀴 반 지점에서 멈춘다. 힘드니까. 그래 놓고 '겨우 반 바퀴 차이인데 뭘. 10바퀴 다 뛴 거나 다름없어'라고 위안을 한다. 9바퀴 반과 10바퀴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한계에 도달하려면 아직 멀었는데, 미리 기권 하기를 반복 해왔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버티기', ‘버저비터’, ‘그릿!’은 같은 맥락일 것이다.
“버티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도전을 외면해왔던 지난날을 후회하며 상담가에게 물었다.
“누군가에게는 숨쉬기처럼 당연한 감각인데, 천성적으로 의지가 약한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굳이 비유를 해보자면, 앞에 놓여있는 이 생수를 반드시 손에 넣겠다는 의욕 같은 건데요, 어떻게든 이 물을 마셔서 갈증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기운을 모으는 거죠. 역도선수들이 역기를 들어 올릴 때 외치는 기합, ‘으랏차차!’ 같은 거요.”
상담가는 또한, 사자는 토끼 한 마리 잡아먹을 때도 진땀을 뺀다고 했다. 먹이사슬 최상위의 위대한 존재가 되면 바라는 모든 것이 저절로 우아하게 해결될 것 같지만, 정작 생태계는 그렇지 않다. 맹수도 배고픔 앞에서는 구차해지고, 밀림의 왕 사자도 토끼 한 마리 쫓으려고 자존심을 버린다. 이 지구에 고고한 존재는 없다는 상담가의 조언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버티기' 솔루션은 단순했다.
만약 운동장을 10바퀴 달리기로 했다면, 마지막 한 바퀴는 숨이 끊어질 만큼 전력 질주할 것. 혹은 10바퀴 다 뛴 후, 추가로 한 바퀴 더 도전 할 것.
달리기가 아니어도 괜찮다. 플랭크 같은 자세도 버티는 힘를 기르는데 좋다고 했다.
유의할 점은, 운동이나 다이어트용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버티는 감각을 익히는 중이라는 것을 잊지 말 것. 또한 이 처방은 나처럼 도전 의지 레벨이 낮은 입문자들에게만 해당된다고 했다.
맞춤 솔루션을 실행하며, 피할 수 없는 현실을 하나씩 직면하고 이겨내기 위해 도전 해보기로 했다. 눈에 띄는 개선은 없었다. 다만 사전에 계획했던 것들이 뜻대로 이뤄지지 않아 포기하고 싶을때, 통제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무기력감이 들때, 도망치지 말자고 다짐했다.
마흔 다섯.
은행 잔고도 없고, 커리어는 리셋됐으며, 친정부모 찬스도 끝났다.
앞으로 겪게 될 시행착오를 벌써부터 걱정하고 싶진 않다. 머릿속에서 시뮬레이션 한들, 결국 다른 양상이 펼쳐질 테니까. 버티다 보면 언젠가는 끝도 보이겠지.
3월 어느 날, 코로나 19 의 광풍이 불기 직전인 캐나다로 떠났다.
그래, 어디 한 번, 도전 해 봅시다!
으랏차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