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국심사
불청객.
오라고 청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찾아온 손님.
밴쿠버에 도착한 나는 불청객이 된 것 같았다.
남편이 취업비자를 받자마자, 한국에 있던 나와 아이들의 비자서류 준비가 시작됐다. 나는 배우자 동반 워크퍼밋, 아이들은 학생비자였다. 비자 승인 방법은 온라인 신청과 밴쿠버 공항 중 택 1. 영어 울렁증도 있는데, 아이 둘 데리고 공항에서 직원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온라인 비자 신청은 6주간 진행되고, 좀 지체된다 해도 2월 말쯤에는 마무리될 것이라고 했다. 이 프로세스에 따라 회사 퇴직과, 한국 생활 청산을 준비하는 동안 코로나 19 사태가 터졌다. 코로나 19 로 인하여 비자 업무 진행은 예측불허가 되었다.
새벽마다 잠이 깼다. 자는 사이 캐나다에서 비자 승인을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와있지 않을까 기대해 봤지만, 그런 극적 전개는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공항에서 쫄릴까봐 온라인 신청을 선택한 나를 자책하며 발만 동동 굴렀다.
코로나 19로 인한 상황은 계속 변했다. 대한항공은 운항편수를 줄였고, 외국인 입국 금지를 선언한 국가가 점점 늘었다. 이민자의 나라 캐나다에서 설마 입국 금지 조치를 내릴까 싶었지만, 불안감은 커졌다.
우선 비지터 비자를 신청하여 비행기 표를 끊고, 밴쿠버 공항에서 워크퍼밋을 받기로 결정했다.(비자가 없으면 비행기 체크인이 안 된다.) 공항에서 불발되면 온라인 승인을 받은 후, 캐나다 국경 사무실에서 비자를 받는 플래그폴(flagpoling)을 해야 했다. 이주공사 담당자는 비지터 비자를 신청하면 목적이 달라 입국 거부를 당할 수도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안내했다. 그 말을 전하는 남편에게 화가 났다. 남편에게까지 민원인 취급받은 것 같아 섭섭했던 것이다. 남편도 아차 싶었는지 멋쩍어하며 사과했지만 서운함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별일 아닌 말 한마디로 쉽게 상처 받을 만큼 예민한 시기였다.
일찍부터 자가 격리 중이었던 딸들은 방구석에서 유튜브 삼매에 빠져있었다. 영어 공부 좀 하라는 잔소리는 안중에도 없었다. 물론 아이들도 마냥 신나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6학년이 된 첫째는 절친들과 헤어지기 싫었고, 4학년인 둘째는 밴쿠버 학교에서 영어 못한다고 무시당할까 걱정했다.
두 딸은 생김새도 성격도 크게 다르다. 본인만 만족하면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의 첫째와 달리, 둘째는 어떻게 행동해야 칭찬받는지 분명히 아는 모범생이다. 우유부단한 남편과, 매사 흐릿한 나 사이에서 성취욕 강하고 목표지향 뚜렷한 아이가 태어난 것이 신기할 때가 있다.
두 아이의 다른 성향은 출국 준비에서도 드러났다. 첫째는 마지막 날까지 친구들과 폭풍 카톡으로 즐거웠지만, 둘째는 가끔씩 캐나다 생활에 대한 우려를 털어놓았다.
둘째의 긴장은 비자 건강검진 때 절정을 이뤘다. 비자 건강검진을 위해 방문한 연말의 건강검진센터는 분주했다. 소변검사를 앞두고 아이들 화장실 출입을 금지한 덕에 첫째의 건강검진은 빨리 끝날 수 있었다. 문제는 둘째였다. 꽤 오랫동안 화장실에 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소변이 나오지 않았다. 물을 가득 마셔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는 울먹이며 여러 차례 화장실을 들락 거렸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천천히 볼일을 봐도 괜찮다는 격려뿐이었다. 요구된 용량의 반쯤 되는 소변이 확보되자, 병원 측도 급했는지 적은 분량을 허락했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진 아이는 화장실로 달려가서 소변을 폭포수처럼 쏟아냈다.
출국일 당일까지 기다림은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한낮의 인천공항은 한산했다. 마치 일과가 끝난 늦은 저녁 같았다. 비행기 탑승게이트에 당도할 때까지 총 세 번의 발열 체크가 있었다. 사람이 적어서인지 신속하게 출국심사가 진행됐다.
비행기가 떠오르자 미뤄뒀던 입국심사에 대한 두려움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형편을 알 리 없는 아이들은 오랜만에 아빠를 만날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밴쿠버 도착 후 상황을 머릿속으로 연신 시뮬레이션하며 떨리는 심장을 달랬다.
2020년 3월 어느 날. 캐나다 땅을 밟았다.
핸드폰을 켜고 남편이 알려준 대로 키오스크에서 입국 신고를 했다. 짐 속에 남편이 좋아하는 쥐포가 있었고, 세관 신고 항목에 솔직하게 체크했다. 출국을 준비하며 가입했던 밴쿠버 온라인 한인 카페에서 간혹 랜덤으로 짐 검사를 하다가 신고하지 않은 건어물이 걸리면 엄청난 벌금을 내야 한다고 조언했기 때문이다. 건어물은 육가공품이 아니어서 사전에 보고만 하면 괜찮다고 했다. 문제는 건어물이란 영어 단어가 생각이 나지 않으면서 발생했다. 입국 심사 시 건어물 소지에 관한 답변을 하기 위해, 영어 단어를 급하게 검색하였다. 아뿔싸. 휴대폰 로밍이 켜지지 않았다. 무섭게 생긴 공항직원과 휴대폰을 든 채 어쩔 줄 몰라하는 나의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휴대폰 고객센터로 전화를 걸었다. 로밍이 안됐던 까닭은 예전에 해외 로밍을 막았기 때문이었다.
그때, 첫째의 코피가 터졌다. 로밍 요금제에 관한 고객센터 직원의 고지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섭게 생긴 공항직원이 심각한 표정으로 나에게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당장 전화를 끊으라고 하는 줄 알고, "because, roaming"만 반복했다. 공항직원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고, 나는 급하게 일주일 로밍을 부탁하고 전화를 끊었다.
공항직원의 질문은, "의사가 필요하냐?"였다. 아이 코피를 보고 놀라서 다가왔던 것이다. 비로소 나는 연신 “That's OK.”를 외치며, 출력된 입국신고서를 내밀었다. 공항직원은 또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공항직원 손가락 끝에는 수기로 신고서를 작성하고 있는 동양인들이 있었다. 입국신고서를 다시 작성하라는 소리인가 싶었다. 어디부터 어디까지 적어야 할지 몰라 눈앞이 깜깜했다.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입국신고서 칸에 하나씩 체크하였다. 그때까지도 첫째의 코피는 멈추질 않았다.
자포자기 심정으로 입국심사장을 갔다. 아까 그 심각한 표정의 공항직원이 다시 손가락을 가리켰다. 그분이 했던 말은 외국인 용 입국심사장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입국신고서를 다시 쓸 필요는 전혀 없었던 것.) 그 공항직원은 단지 도움을 줬을 뿐인데, 주눅이 들어 호들갑을 떤 것은 나였다.
떠듬거리는 영어로 ‘dry fish’ 소지를 밝힌 후, 겨우 입국심사대를 빠져나왔다. 수하물을 찾고 나니 다리에 힘이 풀렸다.
마음을 가다듬고 최후의 관문, 비자 업무 사무실로 갔다. 사람이 제법 많았다. 아이들이 떠들면 무섭게 주의를 주기도 하고, 영혼이 탈곡될 만큼 질문을 퍼붓기도 한다고 들었기 때문에, 딸들에게 얌전히 앉아 있을 것을 주문했다.
순서가 되었다. 담당 직원은 젊은 여성이었다.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자 방긋방긋 웃으며 준비된 서류를 제출했다. 온라인 비자 신청 제출 서류 사본과 왜 비지터 비자로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cover letter를 담당 직원이 확인하는 동안 최대한 다소곳하게 기다렸다. 만약 그녀가 온라인 비자 승인 전에 미리 입국한 이유를 묻는다면, 아이들이 아빠를 몹시 만나고 싶어 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사정을 한껏 어필해야 했다. 다소곳이 아니라, 불쌍해 보여야 하는 건가 싶었다. 하긴. 애쓰지 않아도, 불쌍 진행형이었다.
서류 검토를 끝낸 담당 직원은, 빠르게 말을 했다. 온라인으로 신청 진행 중이니 이곳에서는 취업비자를 내줄 수 없다는 내용 같았다. 멘붕이 왔다. 그렇다면 나와 아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Can I have a call with husband?"
미리 외워둔 문장을 말했다. 담당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편에게 보이스톡을 했다. 담당 직원에게 혹시 내 남편과 직접 통화하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놉!”
단호한 그녀의 한마디에 또다시 심장이 오그라들었다. 풀이 죽은 나는 담당 직원에게 다시 한번 설명을 반복해 달라고 부탁했다. 담당 직원 말을 남편에게 그대로 전하는 수 밖에 없었다. 담당 직원은 한숨을 한번 쉬더니, 너 남편 영어 잘하냐 물었다. 나는 고장 난 인형처럼 고개가 끊어질 듯 끄덕거렸다. 담당 직원은 내 휴대폰을 건네받은 후 스피커폰을 켰다. 남편과 담당 직원 대화는 술술 풀렸다. 담당 직원은 ‘six month'를 여러 번 강조했다. 비지터 비자로 들어왔으니, 6개월 동안은 있을 수 있다는 뜻이었는데, 내 귀에는 ‘3개월 밖에 안 된다.’고 들렸다. six를 3으로 오해한 나는 걱정을 한가득 안고 이대로 나가면 되냐 되물었다. 담당 직원은 다시 한번, 나는 아무것도 해줄 게 없으니, 너는 그냥 가면 된다고 반복했다. 어깨 힘이 빠졌지만 애들 앞에서 티 내지 않기 위해 표정관리를 하며 밖으로 나왔다. 이 모든 의문의 해답을 풀려면 남편을 만나야 했다.
입국장 문이 열리자마자, 딸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남편이 눈물을 글썽이며 앞에 서있었던 것이다. 첫째는 기쁜 나머지 서두르다 카트에 실린 짐을 쏟았다. 뒤에서 오고 있던 청년들이 귀엽다며 깔깔 웃었다. 오랜만의 감동적인 가족상봉과 첫째의 몸 개그에도 불구하고,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우린 어떻게 되는 거야? 3개월 안에 해결 안 되면 나가야 하는 거야?”
남편은 온라인 승인이 거의 마무리 단계고, 6개월까지는 여유가 있으니까 괜찮다며 안심시켰다.
밴쿠버 공항 도착부터 아빠와 만남까지 전 과정을 잠자코 지켜보던 둘째가 입을 열었다.
“엄마, 나는 여러 나라 언어를 쏼라쏼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런 사람 되면 엄마 같은 사람 도울 수 있잖아.”
허둥거리는 엄마의 모습은, 둘째에게 앞으로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과 더불어, 저런 불우한 이웃을 돕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의 계기가 되었나 보다.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적어도 둘째에게 강력한 동기부여를 제공하였으니 이만하면 나쁘지 않은 엔딩인 건가.
“welcome to vancouver!"
남편이 두 팔을 펼치며 환하게 웃었다.
드디어 밴쿠버에 랜딩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