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격리
자가 격리가 무사히 끝났다.
밴쿠버 도착 후 2주간의 자가 격리는 그동안 미뤄둔 엄마 노릇과 아내 노릇을 몰아서 하는 기간이었다. 엄마와 아내의 역할이 돌봄 노동으로 한정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경력단절 여성이 되고 싶지 않아 육아와 살림을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출산 이후에도 사회활동이 가능했던 것은 남편의 협력과 친정 부모님의 희생 덕분이었다. 뛰어난 능력과 열정에도 불구하고 자녀양육과 커리어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여성들을 볼 때는 염치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직장생활과 가정생활 둘 다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같아 항상 불안했지만, 주어진 조건에 감사하며 기운을 냈다.
‘살림이스트’란 용어를 알게 되었다. 여성학자 현경 교수가 정의 내린 ‘살림이스트’는 ‘모든 것을 살려내는 사람’이다. 살림은 자기 안의 신성, 가족, 이웃, 공동체, 더 나아가 지구 전체의 모든 생명을 사랑으로 돌보는 포용적 행위. ‘가족 살리기를 통해 나를 살리는 살림꾼이야말로 진정한 혁명가’라는 메시지가 깊은 울림을 주었다. ‘살림’은 삶에 온기를 채우는 신성한 의식임에도 불구하고 당연하게만 여겨 왔다. 마치 미세먼지가 한반도를 위협하기 전까지는 파란 하늘과 맑은 공기의 소중함을 몰랐던 것처럼. 별 일없이 반복되는 하루는 누군가의 덕분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해 왔다. 자가 격리 2주일 동안, 지난 세월 우리 가족을 살려 준 친정엄마가 떠올라 울컥했다.
서툰 집안일로 발을 동동 구르다 보면 하루가 갔다. 언젠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시청했던 태국 푸끄라등의 짐꾼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그는 작은 어깨에 올려진 80kg 짐을 견디며 5시간 동안 산 정산까지 9km를 등반한다. 50년간 쉼 없이 그 일을 해온 72세 짐꾼 할아버지를 생각하니 이 정도에 지쳐버린 게 부끄러워졌다.
돌이켜보면, 지루하고 하기 싫은 일을 견디지 못했다. 새로운 것을 접하면 일단 덤비고 본다. 도전과는 다르다. 호기심에 대한 반응 같은 거다. 최초의 들뜸이 가라앉고 반복 모드가 되면, 목표에 결코 도달하지 못 것이라며 겁을 먹는다. 해야 할 것들로부터 도망치고, 해도 안 되는 것도 있으니 무리하지 말자며 합리화 해왔다. ‘신포도’일 거라고 정신승리했던 이솝우화의 여우처럼. 끝까지 가본 적도 없는데 ‘해도 안 되는 것’을 어떻게 안단 말인가? 지속적으로 향상하려면 ‘무리하는 게 맞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이다. 얼렁뚱땅 회피했던 ‘해야 할 것’들이 부메랑으로 돌아와서 뒤통수를 치는 경험이 늘었기 때문이다.
경력단절 여성이 되고 싶지 않아서 사회생활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던 지난 십여 년을 돌이켜보니, 남편과 아이들에게 마음을 다하지 못한 아쉬움이 든다. 늘 그러했듯, 반성의 계기는 딸들이었다.
자가 격리 동안 아이들은 방콕을 즐겼다. 종일 침대에 누워 유튜브를 보다가, 미리 저장해 둔 온갖 간식을 먹으며 뒹굴 거렸다. 시차 적응도 문제없어 보였다. ‘역시, 젊은것들이라 시차도 없네.’라고 남편과 농담을 나누며 안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둘째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울음을 터뜨렸다.
“한국에서는 캐나다로 떠나는 게 신났거든. 아무렇지 않게 작별인사한 게 후회돼. 외할머니가 아빠 만나러 가는 거니까 웃으라고 해서 나도 괜찮았어. 외할머니랑 외할아버지에게 여행 다녀오는 것처럼 인사했단 말이야. 그런데 이제 계속 여기에서 살아야 하는 거잖아. 꿈속에서는 한국 우리 집이었거든. 눈 떠보니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없잖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몸도 많이 아픈데, 갑자기 돌아가셔서 두 번 다시 못 보면 어떻게 해…. 친구들이 나 잊을까 봐 그것도 걱정돼….”
섣부른 안심이었다. 울음이 멈추지 않는 둘째를 안고 같이 울었다. 둘째가 멀쩡해 보였던 것은 ‘실감하지 못해서’였다. 어른들도 이별은 어려운데, 태어나서 지금까지 같이 살았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의 부재를 아이가 버거워하는 건 당연했다. 나 역시 소중한 인연들과의 생이별을 자각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BTS 오빠들 동영상을 보며 감격 중인 첫째를 바라봤다. 첫째가 아무렇지 않은 것도 현실 파악이 안 됐기 때문은 아닐까. 성인인 나도 북받치는 감정을 감당하기 어려운데, 이제 막 사춘기로 접어든 딸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둘째가 눈물로 표현을 해줘서 고마웠다. 딸들은 물론 내 본심도 놓칠 뻔했다.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선 환경에서 새로운 친구들과 마주치며 겪게 될 딸들의 감정 변화를 세심하게 관찰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는 그런 엄마가 아니었구나. 오롯이 아이들에게 집중했던 기억이 없다. 머릿속에 가족들보다는 해야 할 일이 가득 차 있었던 것 같다. 딸들이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생각의 키도 자랐는데, 나는 아이들 마음속에 어떤 빛깔의 감정들이 존재하는지 살핀 적이 없었다.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편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가족들에게 상처가 된다는 것을 몰랐다. 아이들의 5살... 8살... 10살은 단 한 번뿐인데, 그 귀한 순간들을 무심히 흘려버렸다. 아이들은 계속 신호를 보내고 있었는데, 그 신호를 읽지 못한 어리석은 엄마였다.
뭣이 중헌디!
2주간의 자가 격리는 쉽지 않았다. 난생처음 겪은 장기간의 격리생활은 갑갑했고, 눈이 부시게 화창한 파란 하늘을 창문 밖으로 바라만 보는 것도 곤욕이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렇게 오랫동안 온전히 가족들과 지내본 것도 처음이었다. 고마운 일이다. 개학 연기로 갈 곳 없는 자녀들을 돌볼 형편이 안 되는 직장 맘들, 갑작스러운 입국 금지로 기약 없이 헤어지게 된 이산가족들, 생계가 어려워진 자영업자 분들, 구직자 분들…. 바이러스로부터 생명을 지켜주고 계신 전 세계의 의료진들, 방역 담당자분들…. 저마다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코로나 19와 싸우고 있는 모든 분들을 떠올려 보면, 가족들과 집 안에서 안전하게 지내는 오늘이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
코로나는 우리에게서 평범한 일상을 앗아갔지만, 평범한 일상의 가치를 깨닫게도 해 주었다. 가족들과 주말에 도시락 싸들고 소풍 가기, 교실에서 친구들과 장난치기, 직장 동료들과 점심메뉴에 관해 열띤 토론하기,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폭풍 수다 떨기, 좋아하는 음악 들으며 동네 한 바퀴 달리기, 운동장에서 축구하며 땀에 흠뻑 젖기, 편의점에 옹기종기 모여 불닭볶음면에 쿨피스 마시기…. 가장 보통의 삶이 주는 행복을 알게 되었다. 몇 년쯤 지나, 캐나다에 막 도착해서 가족들과 함께 했던 2주간을 떠올리면 참 좋은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자가 격리 덕분에 영어 단어 ‘present’ 뜻을 이해하게 됐다.
지금 이 순간이, 최고의 선물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