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거리두기
휴지가 똑 떨어졌다.
자가 격리 기간 내내 화창한 날씨가 이어졌다. 북위 49도에 위치한 밴쿠버는 서울보다 위도가 10도 이상 높지만 서안 해양성 기후라 연중 날씨가 온화하다. 겨울 평균기온은 5도가량이고, 눈도 거의 내리지 않는다. 대신, 겨울의 밴쿠버는 ‘레인쿠버’라고 불릴 만큼 지루한 우기가 이어진다. 3월부터 10월까지 밴쿠버는 청명한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 감탄을 자아낸다. 겨우내 삭막한 풍경에 지쳤던 터라 밴쿠버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봄꽃들이 반가웠다. 자가 격리 동안 창문 밖으로 노랗게 핀 이웃집 개나리를 바라보며, 무탈하게 격리 해제될 날만 고대했다.
그 사이, 캐나다에도 코로나 환자들이 급증했고, 하루가 다르게 상황은 급변했다. 4월 초, 밴쿠버가 속해있는 BC주 총확진자는 1,100명이 넘었다. 입국 금지는 일단 6월 30일까지로 예고되었고, 밴쿠버와 인천을 오가는 하늘 길은 막혔다.
관공서, 공공기관, 국립공원이 문을 닫았고, 봄방학 개학은 무기한 연기되었으며, 대부분의 회사에 재택근무가 권고되었다. 남편 직장도 재택근무 실시 중 이어서 자가 격리 가 끝난 후에도 남편은 계속 집에 머물러 있었다. 다운타운 상점가도 약국과 일부 마트를 제외하고는 거의 휴업 중. 장기화에 대비하여 가게 앞에 합판을 친 모습이 코로나 사태의 심각성을 절감하게 했다. 밴쿠버 시의회는 투고나 배달을 제외한 레스토랑 영업 금지, 공원 및 놀이터 폐쇄 등 비상사태와 관련된 긴급 명령 법안에 합의했다. 이 긴급 명령은 위반 시 개인은 최대 1,000달러, 기업에는 최대 5만 달러의 벌금이 부과되는 강력한 제재 조치다.
마스크는 환자들이 쓴다는 인식 때문인지 예방 차원의 마스크 쓰기 문화는 정착되지 않았지만, 캐나다 보건부 최고책임자 테레사 탐이 4월 6일 자로 마스크 쓰기를 권고하면서 분위기가 서서히 바뀌고 있다. 캐나다 정부는 사회적 거리두기를 적극 장려하고 있는데, 거리를 걸을 때도 행인과 마주치게 될 때면 몸을 비키고, 상점에 들어갈 때도 2m 간격마다 한 명씩 줄 서기가 시행되고 있다.
밴쿠버 지역뉴스에서는 연일 우리 모두가 확진자라는 인식을 갖고, 철저하게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킬 때 코로나 종식이 가능하다는 전문가의 권고가 방송되고 있었다. 도미노를 떠올려 보니 사회적 거리두기의 효과가 이해되었다. 올해 봄은 눈으로만 즐기기로 하고, 자가 격리 해제 이후에도 집 안에만 있었다.
계란, 우유, 밀가루가 차례로 떨어지더니 급기야 휴지도 마지막 한 알 남았다. 남편은 인근 상점을 돌아다녀봤지만 화장실 휴지는 물론 미용 티슈도 구할 수 없었다. 휴지 공수를 위해 밴쿠버 온라인 카페를 검색하니, 일부 대형마트에서는 휴지를 1인 한 팩씩 판매하고 있다고 했다.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대형마트는 버스로 일곱 정거장 떨어진 곳에 위치한 월마트. 빠듯한 살림규모에 맞게 당분간은 차 없이 살기로 했기 때문에, 월마트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했다. 하지만 공용버스는 사회적 거리두기 차원에서 좌석의 절반가량 ‘seat closed' 사인을 설치하여 운행 중. 모든 승객들은 자리에 앉아야 하며, 좌석이 차면 더 이상 승객을 받지 않고 있다. 차도 없고 버스 이용도 어려우니 월마트에 가려면 왕복 한 시간을 걸어야 했지만 휴지를 구할 수만 있다면 못할 것도 없었다.
다음날 아침, 몇 칸 남지 않은 휴지를 보며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휴지를 구하리라 결의를 다졌다. 마스크와 라텍스 장갑으로 중무장을 하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은 후, 바닥난 식재료 및 휴지 보급을 위한 대장정에 올랐다. (feat. 반지 원정대 BGM) 간간이 들려오는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 소문 때문인지, 코로나로부터 서로를 지키는 규칙임에도 불구하고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누군가와 서로 피할 때마다 기가 죽었다.
30분을 걸어 월마트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줄은 길지 않았다. 우선 휴지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매장은 넓었고, 곳곳에 텅 비어있는 진열대를 보니 조급해졌다. 매장 안은 사회적 거리두기 차원에서 동선 방향이 화살표로 표시되어 있었고, 몇몇 코너는 2m마다 거리 유지를 위한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휴지 위치를 찾는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진행 방향을 역주행을 하게 되었고, 직원의 지적을 받게 되자 수치심이 밀려왔다. 휴지는 가장 안쪽 구석에 모여 있었다. 거의 다 팔리고 몇 팩 안 남은 휴지 중 한 팩을 쇼핑 카트에 담고 나니,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온 매장을 헤매며 필수 식재료까지 구매를 마쳤다. 장 한번 보는 게 이렇게 영혼까지 털릴 일인가.
현재 노인, 장애인 등 쇼핑이 어려운 분들을 위한 ‘개점 이후 1시간 사회적 약자 쇼핑 타임 캠페인’이 진행 중인데, 낯선 나라에서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는 신세가 되고 보니 새삼 이런 배려가 캐나다 사회의 저력이구나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마친 후, 지친 심신을 달래고자 둘째 딸과 산책을 나갔다. 내내 집에만 있었던 아이는 이국적인 마을 풍경을 신기해하면서도, 혹시라도 동네 사람들이 동양인들이 돌아다니는 것을 싫어하면 어떻게 하냐고 걱정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특정 민족, 특정 인종만의 문제만은 아닐 텐데,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주눅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따라다다다다다. 이웃 목조주택의 벽을 딱따구리가 쪼아대고 있었다. 만화에서만 보던 딱따구리를 직접 본 둘째는 신이 나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막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컹컹 소리와 함께 송아지만 한 개 두 마리가 달려왔다. 깜짝 놀란 둘째를 안으며 다독였지만 나 역시 큰 개는 무서웠다. 그때 개 짖는 소리를 듣고 집주인이 나왔다. 60대로 보이는 백인 할아버지였다. 나는 변명하듯 딱따구리 사진을 찍고 있었다고 말했다. 백인 할아버지는 빙긋 웃으시더니, 정원에 피어있던 자목련 가지를 꺾어 둘째에게 건넸다. 잔뜩 몸이 굳어 있던 둘째가 주춤거리자, 할아버지는 ‘하나로는 부족해?’ 라며 농담을 하셨다. 나는 괜찮다고,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대답했고, 둘째는 그제야 수줍게 웃으며 꽃을 받았다. 집에 가서 물 컵에 담아두면 꽃이 예쁘게 필 거라고 말씀하시는 할아버지께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드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둘째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엄마, 나는, 한국에 코로나 환자가 많으니까, 여기 분들이 한국에서 온 사람들 안 좋아할 줄 알았거든. 그런데 할아버지가 꽃을 주시니까, 감동적이야. 기분이 행복해졌어.”
백인 할아버지께서 주신 자목련은 화병에 담아 거실 테이블 위에 올려뒀다. 꽃 한 송이 덕분에 온 집안이 환하다.
사회적 거리두기는 코로나를 차단하기 위한 물리적 수단 일 뿐, 마음의 벽 세우기가 아니었다. 나 역시 사회적 거리두기는 지키되, 움츠린 가슴을 활짝 열어야겠다.
세상 어디든 따뜻함을 나누는 훈훈한 정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