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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일러킴 Sep 30. 2020

캐나다 간호사에게 묻는다.

캐나다 의료시스템

캐나다 의료시스템의 대전제는 인간에 대한 리스펙트 즉,
모든 생명을 귀하게 대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기본 이념이기도 합니다.    



제15회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인 '로야'는 한국계 캐나다인 다이앤 리의 장편소설이다. 캐나다 시민권자인 다이앤 리는 교통사고를 겪고 후유증을 앓으면서 오랫동안 덮어 둔 고통의 근원을 들여다보게 된다. 사고 이후 몸과 마음의 아픔을 회복하는 과정을 다룬 이 소설은 작가 스스로 ‘99%가 실화’라고 밝힐 만큼 밴쿠버에 살고 있는 교포들의 일상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 책을 접하게 된 것은 밴쿠버 이주가 결정된 직후였다. 언어도 통하지 않은 낯선 나라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고민하던 중이었는데, 소설 속에서 그려진 ‘교통사고 환자가 한없이 기다려야 하는’ 밴쿠버 병원 탐방기를 읽고 걱정이 가중됐다. 

캐나다에서는 아프면 큰일 나겠네.’

‘로야’를 읽고 난 소감이었다.       


밴쿠버 도착 직후, ‘코로나 19 셧다운’ 조치가 취해졌다. 뉴스는 매일 확진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온라인 한인 커뮤니티에서는 캐나다에서 코로나에 걸리면 뾰족한 수가 없다고 했다. K방역에 대한 찬사와 함께 캐나다 의료체계에 대한 아쉬움을 토로하는 글도 올라왔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만 듣고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캐나다의 의료인에게 직접 궁금한 것을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이민 선배님의 도움으로 캐나다에서 RN(registered nurse, 공인 면허가 있는 간호사)으로 근무 중인 그레이스(가명)와 엠버(가명)를 인터뷰할 수 있었다.      


“환자들에게 캐나다 의료체계에 대한 점수를 물어봤어요. 표본 수가 적고 어디까지나 개인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의견이니 참고만 하세요. 미국과 캐나다 양쪽에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환자는 B+, 캐나다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C와 B, 이민자분들은 C, C+, B 등 점수를 매기더라고요. 평균적으로 C+에서 B+ 사이를 오가는 것 같아요. 저도 동의해요. MSP(Medical Service Plan, 캐나다 건강보험) 가입자는 치과, 단순 시력검사, 미용 목적 성형수술, 건강검진 등 일부 항목을 제외하고 무상으로 치료를 받습니다. 누구나 무료로 병원에 갈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장점이죠. 캐나다의 헬스케어 시스템은 인간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홀리스틱 케어(holistic care, 환자의 심신과 생활 방식 등 총체적 회복에 초점을 맞춤)입니다. 전인교육을 지향하는 캐나다의 교육과 일맥상통하죠. 캐나다는 사회민주주주의 복지국가입니다. 이 나라에서 돈이 없어서 방치된 환자는 볼 수 없어요. 가난해서 자살하는 사람도 없죠. 이런 사회 안전망이 강점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돈이 없어도 죽지 않지만, 돈이 있어도 죽을 수 있는 게 캐나다의 의료체계입니다.”     


아버지는 5년간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셨다. 설마 하며 보험 하나 들어둔 것이 없었기에 긴 투병생활 동안 가계 부채는 쌓여갔다. 한국에서 큰 병에 걸리면 가정 경제에 위기가 온다는 것을 몸소 체험했기에 무상의료의 감사함을 안다. 무상의료에도 한계는 있다. 호주에서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2006년부터 캐나다에서 RN으로 근무 중인 그레이스는 현직 의료인으로서 캐나다 의료체계의 장·단점이 뚜렷하게 보인다고 했다.     


“캐나다의 병원은 거의 공공영역입니다. 개인이 운영하는 클리닉도 존재 하지만 대형병원은 권역별로 주 정부가 관장하죠. 캐나다에서 병이 나면 우선 패닥(family doctor)에게 갑니다. 패닥은 평생 가족의 건강을 보살피는 친구입니다. 캐나다 사람들은 패닥을 패밀리의 일원으로 생각할 만큼 의지하지요. 패닥에게 증상을 알리면 패닥은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전문의)에게 진료를 의뢰합니다. 그렇게 배정된 스페셜리스트가 관련 질병의 담당의사가 되는 거죠. 문제는 스페셜리스트 방문이 신속하게 이뤄지지 않아요."


그레이스는 실제 사례로 예를 들었다.


"우리 병원 투석 환자 한 명이 심한 피부 가려움증이 있었어요.  Nephrologist (신장 전문의)가 최선을 다했지만 낫지 않았어요. dermatologist (피부과 전문의)에게 진료 의뢰를 했는데, 이 환자가 피부과 전문의를 만나기까지 얼마나 걸렸을까요? 1년이요. (웃음) 그러니 이 나라에서 감기 정도로는 병원에 가지 않아요. 진단에 필요한 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사가 환자의 상태를 정확하게 판단할 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죠. 물론 위급한 상황에는 응급실에 갈 수 있습니다. 다만 응급실 진찰은 접수 시간과 무관하게 위중하고 급박한 순서입니다. 보통 응급실에서 몇 시간씩 대기하게 됩니다. 스페셜리스트 기다리다 화병 난다는 말이 나올 만하죠.”     


무상의료의 단점은 ‘진찰 속도가 느리고 담당의사 선택권이 없는 것’이라는 그레이스의 설명을 듣다 보니 교통사고를 겪었던 ‘로야’ 작가의 답답함이 이해가 됐다. 한국에서는 명의로 알려진 전문의를 찾아갈 수 있지만 캐나다에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환자마다 병원과 의사에 대한 만족도가 천차만별인 이유다.     


“복불복이에요. 각각의 경험에 따라 평가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래서 캐나다 의료에 대한 점수가 C+에서 B+ 사이가 되는 것 같아요. 캐나다 의료는 인간에 대한 리스펙트를 기반으로 합니다.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이기 때문이죠. 미국은 다르죠. 부자에게는 A+, 가난한 사람에게는 F인 나라입니다. 당연히 캐나다 의료도 극복해야 할 부분이 많습니다. A+를 받으려면 캐나다 정부가 의료에 더욱 투자해야 합니다. 병원 더 짓고, 의료 인력도 늘려야 해요. 캐나다가 돈이 없는 나라가 아니잖아요.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레이스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복불복이라고는 했지만, 캐나다 의료는 세계 수준이라고 강조했다.     


“스탠더드가 결코 낮지 않아요. BC Children's Hospital(밴쿠버 어린이 병원)은 세계적입니다. 이 병원 때문에 밴쿠버로 이민 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예요. 투석도 유명합니다. 여러 나라에서 BC 데이터베이스를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전체 투석환자의 데이터베이스가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거든요. 암 치료와 암 환자에 대한 서포트도 정평이 나있고요. 간호사만 해도 캐나다 간호사의 수준이 미국 간호사보다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필기시험으로 선발하는 미국 간호사와 달리, 캐나다에서 간호사가 되려면 커뮤니케이션 스킬까지 갖춰야 합니다. 병원이 국영이기 때문에 캐나다 간호사는 신분을 보장받습니다. 국민의 기본권인 의료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인의 신분을 보장하는 대신, 스탠더드를 높인 거죠.”     


캐나다는 간호 전문지식과 기술은 기본이고 환자를 대하는 태도와 소통 능력까지 중요하게 여긴다. 영어가 모국이 아닌 한국인으로서 캐나다에서 간호사 활동은 어떤지 궁금했다.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했어요. 직장을 다니다가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어 간 호주에서 간호대학으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간호사와 선교사인 두 언니의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전공자라 영어는 큰 걱정을 안 했는데, 웬걸요.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수업시간에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어요. 전문 의학용어여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교수님 강의를 통째로 녹음해서 반복 청취하지 않으면 수업을 따라갈 수 없었던 날들이 이어졌다. 주중에는 예습 복습 시간도 부족했고,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이기에 주말에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다.      


“어마 어마한 공부 분량에 아르바이트까지 해야 하니 잠잘 시간이 없더라고요. 동급생 중에 척추 장애로 휠체어를 탄 친구가 있었어요. 학교에서 그 친구를 위해 강의 내용 정리 자료를 제공했죠. 저것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더군요. 학과장님께 간절하게 부탁드렸어요. 언어로 인한 제약이 장애처럼 느껴지니 수업자료를 받고 싶다고. 당시 학과장님은 말레이시아 출신이셨는데, 단호하게 거절하셨어요. 섭섭하더라고요. 어디에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모르겠는데, 절박했나 봐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따졌어요. ‘교수님도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어서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걸어 보셨잖아요. 제가 겪고 있는 고통을 공감하신 거 맞나요?’ 학과장님께서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씀해 주셨어요. ‘나는 지금도 국제 콘퍼런스에 참가하면 노트와 펜을 갖고 다닌단다. 요즘도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있어. 쉬운 길은 결코 도움되지 않더라. 나는 네가 해 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고통스러워도 정도를 가라’는 은사님의 말씀은 옳았다. 그날 이후 그레이스는 약이 되고 거름이 될 아픔을 선택했다.      


“컴포트 존을 만들지 말자고 다짐했지요. 워낙 호기심도 많고 도전하길 좋아하는 성격이긴 해요. 언어장벽을 극복하는 과정이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한국의 후배들에게 이 길을 추천하고 싶어요. 외국에서 간호사로 근무하고 싶다면 아예 그 나라 간호대학을 다니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훗날 실전에서 겪게 될 에센스를 사전에 체득할 수 있어요. 한국인들은 영특해서 할 수 있어요. 영주권을 따는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하여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으면 해요. 언어는 단순히 대화의 기술이 아니에요. 한 사회의 문화가 자연스레 스며드는 거죠. 언어를 아는 만큼 사유가 깊어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지평이 넓어져요. 'The limits of my language means the limits of my world'. 언어의 한계가 내 세계의 한계라고 비트겐슈타인이 말했죠.”     


해외에 살다 보면 오히려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그레이스는 한국인의 스마트함과 높은 시민의식, K방역에 대한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Test-Trace-Treatment(검사-동선추적-치료), 전염병으로부터 국민을 지키려면 3T가 가능해야 합니다. 지구 상에서 3T을 갖춘 나라는 몇 안돼요. 그런 면에서 멘 파워, 뛰어난 IT기술, 선진 시민의식을 가진 대한민국의 K방역은 감동입니다. 캐나다는 3T가 준비되어 있지 않아요. 병원, 인력, 보호 장비 등 모두 부족해요. 양국의 인식 차이도 있어요. 개인정보를 민감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확진자 동선 추적이 쉽지 않아요. 펜데믹을 통해 캐나다 방역체계의 문제점이 드러났죠. 캐나다 의료시스템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어려운 숙제입니다.” 

    

그레이스는 한국의 의료체계는 자본주의의 장점과 의료복지가 절묘하게 어우러진 세계적으로 유래 없는 훌륭한 의료시스템이라며, 한국인들이 이를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관하여 한국에서 8년간 간호사로 있다가 캐나다에서 RN으로 15년째 근무 중인 엠버가 의견을 덧붙였다.     


“예전에 비해서 한국의 의료복지가 많이 좋아졌어요. 현재 혈액 투석실에서 근무하고 있는데요, 치료비가 없으니까 필요한 처치를 바로 할 수 있거든요. 한국에 있을 때는 치료에 따른 비용이 발생할 때마다 환자들이 예민하게 받아들였거든요. 한국의 의료비 문제도 점차 나아지길 기대합니다.”     


한국과 캐나다 간호사의 근무환경 차이가 궁금하여 엠버에게 물었다.     


“위니펙 주에서 간호사 시험을 봤어요. 한국 간호사가 캐나다에서 근무하려면, 우선 한국 대학에서 이수한 커리큘럼을 체크해야 해요. 기준에 부합하면 시험 응시 자격이 주어집니다. 영어시험과 자격시험에 통과하면 캐나다 간호사가 되는데요, 한국과 미국의 자격시험은 의학지식을 묻지만, 캐나다는 단순 지식보다는 위기관리 능력에 대한 테스트예요. 캐나다 RN은 한국 병원에 비해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어요. 그만큼 책임도 커지잖아요. 간호사 자격에 대한 기준이 높을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엠버에 따르면 BC주의 병원급 간호사는 모두 BCNU(BC Nurses Union)라는 노동조합에  가입된다. BCNU는 주정부와 간호사의 임금 및 베네핏에 관하여 협상을 하고, 이 테이블에서 결정된 사항은 BC주 전체 간호사들에게 적용된다. 엠버는 경력자를 우대하고 개인 생활이 보장되는 까닭에 캐나다 간호사 생활을 매우 만족한다고 밝혔다.      


“캐나다 간호사를 준비하는 후배들에게 약간의 팁을 드리고 싶어요. 캐나다, 특히 BC 주는 간호사가 많은 편이에요. 그러니 간호사 수요가 있는 주에서 시험을 보는 게 유리해요. 주마다, 해마다 조건이 다르니까 그때그때 확인해야 합니다. 영주권을 따려면 대형 종합병원에서 근무하시는 게 좋아요. 작은 병원은 경험이 없어서 영주권 프로세스를 부담스러워해요. 필요한 정보를 잘 숙지하셔서 진행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그레이스가 캐나다 사회의 성숙함을 보여주는 일화를 소개했다.     


“딸이 이번 학기에 초등학교 2학년이에요. 새 담임선생님께서 그러셨대요. 학교에 애착 인형을 가지고 등교해도 된다고. 코비드 언제 끝나는지 아이가 매일 물어봐요. 어른들도 견디기 힘든데, 아이들은 오죽하겠어요.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놀고 싶은데 전염병 예방 차원에서 허락되지 않잖아요. 갑갑한 상황 때문에 화나고, 우울할 때 애착 인형이 곁에 있다면 불안한 감정이 줄어들겠죠. 담임선생님이 어린 학생들의 정서적 안정을 위하여 배려한거죠. 펜데믹 시대를 살고 있는 아이들의 감정을 읽어주고, 그 안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삶의 지혜를 알려주는 교사들의 모습이 감동이었어요. 캐나다는 인간존중을 최우선으로 하는 사회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환자들이 몸과 마음을 조화롭게 치유할 수 있도록 케어하는 의료인으로서 더욱 정진해야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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