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지금 살기도 바쁜데 왜 지난 역사까지 공부해야 되지?"
역사 교과서를 앞에 두고 나는 투덜거리고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 역사과목은 내게 늘 골칫거리였다. 다른 과목도 많은데 시대별로 외워야 할 내용이 끝이 없었다.
"야, 우리 역사 쌤이 S대 나오셨데!"
친구가 호들갑을 떨었다.
선생님이 S대를 나왔든 K대를 나왔든 내가 역사가 싫은데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세계사 첫 수업시간이었다. 과목에는 별 흥미가 없고 S대 출신 선생님에 대한 호기심으로 첫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 호기심 거품이 사라지는 데는 단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이가 드신 할아버지 쌤이 떡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도수 높은 안경이 높은 콧대에 걸려 있었고, 마르고 훤칠하신 분이셨다. 하지만 젊고 멋진 이성을 동경하던 여고생들에게 할아버지 선생님은 이미 관심밖이었다.
"야, S대 쌤한테 마이 배워라 크크크..."
짝꿍 경화가 김샜다는 듯이 나한테 속삭이고는 책상 서랍에서 거울을 꺼냈다. 그리고는 코끝을 찡그리면서 여드름을 짜기 시작했다.
내 뒤에 앉은 정희는 연애편지를 쓰다가 내 등을 쿡쿡 찔렀다.
"더 끝내주는 문장 없것냐? 좀 봐주라."
정말 총체적 난국이었다.
교실은 금세 웅성웅성 소란스러워졌다.
"에.. 오늘부터 선생님과 역사 공부를 재미나게 해 봅시다." 선생님은 아이들이 떠들어도 아랑곳없이 말씀하셨다. 마치 너희들은 떠들어라 나는 내 갈길을 간다. 는 듯 담담했다.
' 재밌는 역사 공부? 아, 물 건너갔구나!'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 당시 유능한 선생님이라면 첫 시간부터 분위기를 확 휘어잡는 카리스마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눈이 있어도 안 보인다는 듯이 그 어수선함 속에서도 소나무처럼 묵묵히 수업을 이어가고 계셨다.
"모든 전쟁의 배경에는 여자들이 있었다. 클레오파트라도 마찬가지다."
마치 교실 천장을 바라보며 누구네 집 이야기를 들려 주시 듯 말씀하셨다. 반 분위기는 점점 어수선해졌다. 누군가는 뒤를 돌아보고 잡담까지 하고 있었다.
'칫, 무슨 역사 공부를 옛 이야기하듯 하시네' S대 나온 샤프한 지식인을 기대하던 나도 할아버지는 어쩔 수 없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수업인지 이야기인지 모를 내용에 점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교과서에 몇 줄 외우던 딱딱한 역사 수업이 아니었다. 안토니우스 내전이 일어난 배경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눈앞에 그려졌다.
"안토니우스가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마치 연극배우처럼 성대모사까지 하셨다. 신기하게 조금 전까지 툴툴거리던 나는 점점 선생님 수업에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배경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역사 공부를 마치 할머니가 옛이야기 들려주시듯이 즐겁고 흥미롭게 가르치려고 하셨던 것이다. 거의 첫 수업이 끝날 무렵 난 속으로 "역시 S대 클래스는 저력이 남다르시구나!" 감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반 분위기는 여전히 어수선했다. 그 순간 교탁만 지키시던 선생님이 갑자기 교탁 사이로 걸어오셨다.
"너. 너. 너 나와라!!"
그동안 떠들고 해찰 부리던 아이들을 정확히 짚어내셨다. 선생님이 애들은 안중에 없는 줄 알던 우리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다
여드름을 짜던 경화는 얼굴이 벌겋게 멍게가 되어 뻘쭘하게 서 있었다.
내 뒤에서 연애편지에 골똘하던 정희가 화들짝 놀라 교과서를 세웠지만 이미 늦었다.
"너는 재주가 참 좋구나 책을 거꾸로 읽고... 일어섯!"
정희의 교과서는 민망하게 물구나무 선채로 벌을 서고 있었다.
선생님은 잡담하고 떠들던 아이들을 줄을 세우고 말씀하셨다.
"매는 잘 맞아야 된다. 자 얼굴을 똑바로 들어라"
안경을 고쳐 쓰신 선생님은 아이들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서 뺨을 한 대씩 때리셨다.
말이 때린 거지 거의 토닥이는 수준이었다.
"뺨을 잘못 맞으면 귀 고막이 다칠 수 있다. 매도 공부도 제대로 해야 된다 알았냐!."
순간 교실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우리는 처음과 다르게 자세를 바로 잡았다.
어설퍼 보이던 할아버지 선생님은 그렇게 아이들의 역사 수업의 흥미와 카리스마, 두 마리 토끼를 단번에 잡아버리셨다.
시험 문제도 참 특이했다.
인물 이름의 일부만 적어 놓고 나머지를 빈칸으로 남겨두신 주관식 문제였다.
"옥타비아ㅁㅁ" 너무 황당한 문제에 시험 도중 웃음을 참느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을 지경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 또한 철없는 제자들의 성적을 걱정하신 선생님의 깊은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 덕분에 국사와 세계사는 더 이상 골치 아픈 과목이 아니었다. 배경지식이 많으신 선생님 덕분에 즐겁게 공부하게 되었고 성적은 자연스럽게 따라왔다.
공부를 잘한다는 건 어려운 내용을 지신만의 방식으로 쉽게 이해하는 것이라는 걸 선생님을 통해 알게 되었다.
역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강한 카리스마가 아니라 물처럼 부드럽게 스며드는 부드러운 내공인지도 모른다.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역사를 알면 세상이 보인다."
"역사는 또 다른 우리의 현재다."
"역사를 알면 미래를 현명하게 잘 살 수 있는 안목이 생긴다."
그때는 선생님의 깊은 뜻을 몰랐지만 지금은 안다.
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지금 우리가 쓰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