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살게 하는 힘
"오빠, 내일 만날까요?"
엄마 2주기 추모원 다녀오는 길이었다.
남동생이 운전하고 옆자리에서 아버지가 전화를 받으셨다.
전화기 너머였지만 분명히 낭랑한 젊은 여자 목소리였다.
'오빠, 오빠라고?'
뒷 좌석에 탄 나와 여동생 올케는 놀란 눈으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니, 구순의 아버지에게 무슨 여자?'
차 안에 순간 긴장감이 감돌았다.
운전하던 남동생 뒤통수마저 굳어 보였다.
우리가 침묵 속에서 복잡한 심정이 된 걸 모르시는 아버지는 다정하게 대화를 이어가셨다.
"응. 그래 내일 집으로 와
지금 차 타고 있으니 자세한 얘기는 내일 하자"
조금 전 엄마 추모원에서 눈물을 훔치던 아버지였다. 추모원을 나선지 몇 분도 채 되지 않아 어떤 여자분과 다정하게 통화를 하시다니, 게다가 내일 집으로 오라니, 여동생이 팔꿈치로 나를 쿡 찌르며 눈짓을 보냈다.
언제나 곤란한 일이 생기면 나에게 미루는 형제들이다.
차 안에는 어색하고 미묘한 침묵이 흘렀다.
"전화하신 분이 누구세요? 목소리가 낭랑하신데요? "
애써 장난기를 담은 내 물음에 아버지가 웃으시며 말씀하셨다.
"응, 옥란이다."
"아!!"
우리는 그제야 놀란 가슴을 내려놓았다.
옥란이 고모!
그녀는 아버지와 혈육이 아니다.
아들만 5형제인 아버지는 여자 형제가 없어서 우리에겐 친고모가 없다.
옥란이 고모는 내가 여섯 살 무렵까지 살았던 시골 뒷집에 살던 처녀였다. 그 무렵은 낮에 부모님이 일하러 나가시면 나는 늘 그 집에 맡겨졌다.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어서 그 댁과 친하게 지내면서 자연스럽게 고모라는 호칭이 생긴 것이다.
옥란이 고모는 부모님과 살고 있는 처녀였지만 흔히 말하는 아리따운 처녀로 불리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옥란이 고모는 선천성 소아마비 장애를 갖고 있었다. 한쪽 발은 뒤틀려 있었고 두 손과 두 발에 양말을 끼고 사철 네 발로 기어 다녔다.
옥란이 고모를 보면 두 번 놀라게 된다. 처음엔 엉덩이를 하늘로 치켜든 채 길을 기어가는 모습에 놀라고, 그 입에서 나오는 거침없이 낭랑하고 밝은 목소리에 또 한 번 놀라게 된다.
고모네 집은 동네 점방이었다.
매일 동네 처녀들이 방 안 가득 모여 맛있는 것도 먹고, 라디오에서는 늘 노래가 흘러나왔다.
여섯 살이던 나는 매일 옥란이 고모네 점방에서 놀았다. 동네 언니들 사이에 끼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요를 들으며 따라 불렀다.
시골의 가을걷이가 끝나고 농한기로 접어들 무렵, 그 지역에서는 콩쿨대회가 열렸다.
그 무렵 나는 옥란이 고모 점방에서 익힌 노래 솜씨로 동네에서 "노래쟁이"라고 소문이 났었다. 그 덕분에 어른들만 참가하는 콩쿨대회에 유일하게 여섯 살 어린 내가 참가했다.
드럼과 트럼펫 색소폰이 연주하는 제법 그럴듯한 무대였다. 긴장한 나머지 얼떨결에 한 곡을 두 번 불렀지만 그래도 2등 상을 받았다.
그 이후로 옥란이 고모네 점방과 동네에서 나는 더 많은 사랑을 독차지했다.
옥란이 고모네 점방에서 가장 인기 품목은 단연 사탕가루가 묻어 있는 오다마 사탕과 왓다껌이었다. 고모는 돈도 받지 않고 나에게 사탕과 껌을 자주 쥐여주곤 했다. 까슬한 사탕이 입천장을 까지게 했지만 늘 맛있었다.
고모네 마당 끝에는 변소가 있었는데 통나무 아래에 돼지가 살고 있었다. 일을 보려고 하면 꿀. 꿀 소리에 어린 나는 기겁해서 달려 나오곤 했지만, 네 발로 걷는 옥란이 고모는 어떻게 그 무서운 변소를 잘만 다니는지 늘 신기할 뿐이었다.
내 기억에는 옥란이 고모가 화를 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고모는 언제나 명랑했고 긍정적이었고 인기가 많았다.
여기까지가 내 기억 속에 어렴풋이 남아 있는 옥란이 고모 모습이다.
그 무렵 우리 가족은 다른 도시로 이사를 했다. 그 후로 거의 50년 세월 가까이 옥란이 고모를 잊고 살았는데 부모님은 그 긴 세월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옥란이 고모와 교류를 이어오고 계셨다니, 그것도 놀랄 일이었다.
때마침 울린 전화 덕분에 아버지께 옥란이 고모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옥란이가 결혼한 거 알고 있냐?"
"네? 그 불편한 몸으로 어떻게 결혼을 하셨다고요?" 우리가 놀라자 아버지께서 픽 웃으시면서 말씀하셨다.
"뭔 소리냐, 아들 넷에 딸 하나까지 낳았는데" 순간 차 안에서 "우와!!" 큰 탄성이 터져 나왔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불편한 몸으로 못 가는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전라도 땅끝에서 서울까지 어디 할 것 없이 친구들도 만나고 자식들 집도 다니신다고 했다.
기동력만큼은 웬만한 사람 못지않다고. 이번에도 엄마 떠나시고 적적하실 아버지를 위로하겠다며 찾아뵌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다시 들어도 놀라울 일이다.
평생 신발 한번 신지 못하고 두 손과 발에 양말을 신은채 씩씩하게 살아낸 옥란이 고모. 그런 모습으로 외출을 하면 따가운 시선과 상처가 될 말들을 수없이 들었을 텐데, 문득 옥란이 고모를 그토록 씩씩하게 세상을 살아내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기차로 갈아타는 천안아산역이 가까워질 무렵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옥란이 부모가 어려서부터 남 부끄럽다는 생각 안 들게, 그렇게 귀하게 키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