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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쎄인트의 책 이야기 Feb 25. 2021

한여름의 폭설



『레닌의 키스』  

   _옌롄커 / 문학동네


‘날이 더워졌는데 눈이 내렸다. 세월이 병들었다.’ 이상기온의 극치다. 펄펄 끓는 지독한 여름날에 눈이 내렸다. 엄청난 규모의 열설(熱雪, 여름에 내리는 눈을 의미하는 방언)이었다. 밀이 완전히 익어 온 세상이 뜨거운 향기로 넘치다가 갑자기 큰 눈에 모두 덮여버리고 말았다. 


이 소설의 원제는 수활(受活, 서우훠)이다. 중국 북방 방언으로, 허난성 서부 바러우산맥 사람들이 사용하는 단어라고 설명된다. 즐거움, 향락 등의 의미로 쓰이지만 바러우 산맥에서는 특히 ‘고통 속의 즐거움’, 혹은 ‘고통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이 수활(受活, 서우훠)이란 단어는 소설의 무대가 되는 마을이름으로 쓰인다. 수활장(受活莊, 서우훠마을)은 명 황조의 홍무(洪武)에서 영락(永樂)연간에 백성들에게 대규모 이주를 강제하면서 생긴 마을이다. 대규모 이주가 강행되면서 백성들의 저항 역시 완강해졌다. 이에 명조정에서는 포고령을 내렸다. 떠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은 한 곳에 모이고, 떠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집에서 기다리라는 전갈이었다. 떠나기를 원치 않는 사람들의 무리는 대부분 맹인, 반신불수, 귀머거리 등 장애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조정에선 한 장소에 모인 이주를 원치 않는 사람들을 전부 강제로 이주시키고 오히려 집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짓게 했다. 




서우훠 마을이 형성 된지 오래되었지만, 본격적인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기는 국공내전이 한창이고, 일본군이 쳐들어온 시기부터 시작된다. 이 마을은 천하 장애인들의 집결지가 되었다. 이 마을의 중심인물은 홍군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마오즈이다. 현 전체의 인민들은 마오즈를 홍군의 전사이자 혁명의 선배로 대접한다.


“이레 동안의 대규모 열설이 여름을 겨울로 바꿔놓았다.” 이 무렵 할머니가 된 마오즈는 류잉췌라는 이름의 현장과 비서의 방문을 받게 된다. 때 아닌 여름 폭설이 휩쓸고 간 마을에 무언가 도움을 주겠다고 온 것이다. 현장의 관할인 솽하이현은 가난한 현이었다. 그것도 가장 가난한 현이었다. 공장도 없고 광산도 없고 오로지 산과 계곡뿐이었다. 더군다나 서우훠마을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류잉췌는 솽하이현의 경제를 살리기 위해 러시아에 가서 레닌의 유해를 사 오는 아이디어를 낸다. 산림공원이나 마찬가지인 훈포산이라는 곳에 레닌의 유해를 안치한 후 관광 사업으로 전환한다는 것이다. 




러시아에서 레닌의 유해를 구매해온다는 기상천외한 생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작가는 어떻게 이런 아이디어를 소설에 적용시켰을까? 중국 공산당이 러시아를 통해 공산당 교육을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마오쩌둥은 마오쩌둥식 중국공산당을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레닌의 흔적을 지울 수 없는 것이 중국 공산당의 입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레닌의 유해를 매입해서 관광자원화 한다는 것은 현재 중국공산당의 모호한 정책노선에 대한 비판이 깔려있는 것이 아닐까? 레닌을 부정할 수 없으면서 공산당의 길을 가야만 하는 절름발이 공산당의 현주소를 고발하는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또 하나 이 소설의 주축이 되는 것은 서우훠마을 사람들의 축제이다. 해마다 밀을 수확하고 나면 마오즈 할머니가 주동해서 온 마을 사람들이 참여하는 사흘 동안의 축제이다. 한 여름 폭설로 흉년이 든 올해는 현장이 직접 준비했다. 특징적인 것은 이 마을의 주민 대부분이 장애인인지라 그들만의 독특한 장기들이 한두 가지씩 있다는 점이다. 현장은 그 축제를 보면서 또 한 가지 아이디어를 뽑아낸다. 이들 장애인들로 구성된 묘기공연단을 통해 레닌 유해 구입자금을 조달한다는 생각이었다. 묘기공연단의 활동은 대성공이었다. 공연이 거듭될수록 입장권 금액도 고공행진을 하게 된다. 공연에 참가한 장애인들의 주머니도 두둑해지고, 레닌 유해 구입자금도 차곡차곡 쌓이게 된다. 




이쯤에서 중국공산당의 장애인복지를 위한 정책은 어느 정도일까 생각을 해보게 된다. 참고할 만한 마땅한 자료가 없기에 감이 안 잡힌다. 시간을 거슬러서 작가는 1958년에 시작된 대약진운동을 언급한다. 마오쩌둥의 주도하에 추진된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경제성장운동이었다. 노동력 집중산업을 위해 인민공사를 창설하고 공업 생산의 지표를 높였다. 강철재앙이 이어진다. 강철 제련운동으로 인해 산맥 전체의 큰 나무들이 전부 베여졌고 풀밭 언덕도 깡그리 불태워졌다. 수천만 명의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한다. 


이 시기에 서우훠마을도 예외 없이 큰 곤경에 빠진다. 그나마 비축해놨던 양식들을 외지에서 온 멀쩡한 이들에게 모두 빼앗기게 된다. 방안 항아리에 숨겨놓은 마지막 잡곡 한 됫박까지 전부 자루에 퍼 담아 짊어지고 가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생각을 좀 해봐요. 이 세상 어디에 장애인들이 멀쩡한 사람들보다 더 잘사는 경우가 있는지 말이요” 참 염치도 없다. 장애인들이 멀쩡한 사람들보다 사정이 나은 것이 뭐가 잘못된 건가?




레닌 유해를 매입하는 일은 어찌 되었나? 돈 자루를 짊어지고 러시아로 사람이 떠나긴 했다. 그 후 사정은 혹시나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을 위해 말을 아끼기로 한다. 서우훠마을 사람들은 마치 한 여름날 폭설처럼 그렇게 다른 세상맛을 좀 보다가 눈이 녹듯이 모든 것이 사라져갔다. 몸 고생해가며 벌은 돈을 멀쩡한 사람들에게 도둑맞고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만 남기고 마을로 돌아왔다. 원점이다. 


이 소설 『레닌의 키스』는 옌롄커가 2003년에 발표했다. 원제는 앞서 언급한대로 수활(受活, 서우훠)로 ‘즐거움’이란 뜻이나. 프랑스어판 번역자에 의해 ‘레닌의 키스’로 붙여져 유럽과 영미에 유통되었다. 중국에선 한 해 뒤 2004년에 출간되면서 대단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아울러 이 소설은 작가가 27년 동안 입었던 군복을 벗는 계기가 되었다. 소설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봉황위성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옌롄커는 “작가는 꽃병이라 때로는 간부들이 식사할 때 자리에 배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술자리에서는 작가가 쉴 새 없이 술을 따라주어도 그 간부가 반드시 작가를 기억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술을 따라주지 않는다면 간부는 그때부터 이 작가를 확실하게 기억할 것이다.” 라는 대목이 부대 상급자의 비위를 거스른 듯하다. 이후 작가는 군대생활에서 완전히 (강제)퇴역하여 베이징작가협회 소속 전업 작가가 된다. 작가인생의 전환점이 된 셈이다. 중국의 유명한 작가 리얼은 이 작품을 중국 사회와 문화 전체에 대한 비판이자 반론이라고 평했다. 정상급 문학 평론가들에게선 “리얼리즘의 새로운 경지”라는 높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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