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에 의해 나는 대나무처럼 쑥쑥 길이를 늘여왔다.
막 태어났을 때는 불과, 몇 킬로,십몇 센티에 불과했던 내가 점점 나라는 형상을 갖춰 왔다.
나를 나라고 인식할 수 있게 되고 나서부터 쭉쭉 잘도 길이를 늘여왔다.
발목까지 닿던 교복 치마가 무릎을 훌쩍 넘기며.
그러는 사이 내가 나라고 인식했던 선명한 순간들이 있다.
그순간 속의 나는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과연 나였을까 싶기도 하다.
마치 다른 이의 기록을 훑어보는것처럼 낯설기까지 하다.
그 애는 분명 나였다.
그애가 자라 내가 되어 왔다.
그렇지만 그 애는 내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 걸까?
그 애 그대로 나로 변화한 것일까?
흘러내리는 교복 치마를 부여잡고 비탈길을 달리던 그 소녀는 분명 나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나와는 다르다.
그 애는 지금도 그 비탈길을 달리고있다.
그 애는 그 애의 삶을 살고 있다.
나와 같지만 나와 다른 앳된 모습 그대로 그 순간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반복하고 있다.
그 순간까지 전부 나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그 애는지금의 나와는 다르다.
우리는 다른 삶으로 갈라져 버렸다.
내 삶에서 반짝였던 아름다운 순간들.
수없이도 많았다.
나는 유복한 자였다.
그 시절 내 세상은 아름다운 것들이 넘쳐났다.
그 아름다운 것 중에 가장 아름다웠던 것은 그대,
나의 모든 순간을 반짝이게 했던!
그 모든 순간에 그대가 있었다.
*
보름달이 걸린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그 시절에 품었던 감정들이 중첩됐다.
서글픈 노래에 전염이라도 된 것인지, 한동안 잊고 있던 질문들이 쏟아져나왔다.
마음의 어디에 둑이 터진 것처럼,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것까지 몰려들었다.
서늘한 바람에 서글픈 마음이 발길을종잡을 데 없는 곳으로 이끌었다.
‘스러지지도않고 그대로였어.’
내버린 지 오래였던, 버렸다고 생각했던 마음에서 자꾸만 바람 소리가 났다.
그 바람이 몰아온, 어둑한 간이역에 홀로 남아 버스를기다리는 초하의 기억.
세상 끝에 홀로 남았다는 고독감과 공포에 자꾸만 마음이 부서져 내렸다.
그날은 달도 들지 않는 밤이었다.
인공의 불빛을 향해 제 생명을던지는 나방만이 타닥타닥거렸다.
마지막 생의 몸짓이 흩날리는 속에 홀로 앉은 밤이었다.
잡아야 할 것을 붙잡지 못해서 세상의 끝으로 내몰려 있었다.
*
그때의 나는 아이였을까? 어른이었을까?
순수한 채로 그대를 사랑했나, 더럽혀진 채로 그대를 사랑했나.
핑계겠지만 아이였으나 아이인 채로 있을 수 없었고, 어른이었으나 어른인 채로 살 수없었다.
그래서 나는 아이였어도 아이일 수 없었고, 어른이어도 어른이 되지 못했다.
어린이를 상실해 어른이 되지도 못한 경계인이다.
어린애와 어른의 어디쯤에서 우물쭈물 댄다.
나아가지도 물러나지도 못하고 서성인다.
살아온 시간만큼 삶의 솔기가 터져버렸다.
더럽혀진 솔기에는 때와 상처자국들로 가득하다.
시간이 멈춘 그대는 그 시간 속에서 영원히 깨끗하다.
그대와 함께 많은 것을 살아내고 싶었다.
손 꼭 잡고 들과 산으로 뛰어다니며놀고 싶었다.
그 시절, 시절의 끝을 상상이나 했겠는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토록 짧은지 알았다면 나무라거나 화를 내지도 않았을 거야.
토라져서 말없이 며칠씩 떨어져 있거나 하지도 않았을 거야. 너무도갑자기 떠밀렸다.
놀이의 원 밖으로 떠밀려서 함께 하려 했던 것들을 이루지 못했다.
누군가가 그대의 등을 떠밀고는 잽싸게 손목을 채었다.
구슬같은 웃음소리가 귓가에 생생한데 그대는 어디에고 없다.
술래를 잃어서 ‘얼음 땡’을 하지 못한다.
그 시절 그대로 놀이의 시간이멈췄다.
나는 계속해서 더럽혀져 갈 것이다.
생의 뒤집어쓴 자의 숙명이다.
그대와 같은 시간 속에 멈춰버리고 싶었던 나는 지금껏 그랬듯 계속해서 때를 탈 것이다.
미친 듯이 증오하고 미친 듯이사랑하는 듯, 삶을 충실히 연기할 것이다.
진창을뒹굴고 자빠지는 삶 따위 아무것도 아니다.
그대의 시간을 지켜낼 수 있다면나는 아무렇지도 않다.
모든 것을 잃었다 한들 박제한 그 시간이 나를 일으킨다.
진창을 뒹구는 현실에도 그대로 인해 견딜 만하다.
그대의 세상은 여전히 눈부시다.
나의 세상은 아직 눈부시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