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단편] 그림 감상

고흐의 [붉은 포도밭]

by 유이지유




[붉은 포도밭]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네. 드디어 겨울이 찾아온 것이네. 나는 자네를 조금도 속일 생각이 없네. 겨우 눈이 내리는 것뿐이니까. 가난한 사람들이 얼마나 궁핍한지 부자들은 알 길이 없지.


혹독한 12월의 추위 속에서도 아름다운 파리의 뤼 르픽 거리에는 총총걸음으로 오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네. 그들은 천천히 걷는 법이 없다네. 행인들 사이로 남루한 옷을 입고 덜덜 떠는 남자 하나가 급히 외곽의 큰길을 향하고 있네. 그 남자는 낡은 양피 외투로 온몸을 감싸고 토끼 가죽 모자를 쓰고 있으며, 거칠게 난 붉은 수염을 기르는 중이군. 차림새는 얼핏 보면 소장수 같기도 하네.


아무리 추위를 견디기가 어렵다고 해도 그를 힐끗 보고는 그냥 지나치지 말아 주게. 자네는 그의 희고 부드러운 손과 아이처럼 천진하고 맑은 푸른 눈을 못 본 체해서는 안 된다네. 그는 가엾은 걸인임이 분명하네.


그의 이름은 빈센트 반 고흐라고 하지.

그는 총총걸음으로 어는 상점에 들어가는군. 그곳에서는 고철과 원시인의 화살, 싸구려 유화를 팔고 있네.


가엾은 예술가여! 당신은 그 화폭에 영혼을 담아 팔아버리려고 작정했구려!


이것은 한 점의 정물화 소품이라네. 붉은색 종이에 붉은 포도가 그려져 있다네.


"주인장, 이 그림을 사주겠소? 방세가 밀려서 그런다오."


"여보게, 요즘 장사가 통 안 된다네. 사람들은 그림을 터무니없이 싸게 사려고만 하자. 게다가 자네도 알다시피……"


상점 주인이 말을 이었지.


"자네 그림은 별로 인기가 없지 않은가. 요즘은 르네상스 풍이 유행하고 있으니 말이네. 하긴, 다들 자네를 천재라고 부르니 나도 자네를 돕는 의미에서 5프랑 주겠네."


카운터 위로 동전이 짤랑 소리를 내며 떨어졌네. 고흐는 아무 말 없이 그 돈을 받아 들고는 주인장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상점을 나섰다네.


그가 거의 집에 다 왔을 때였지. 생 라자르 성당에서 한 여인이 나오더니 그에게 적선을 구했네. 고흐는 외투 주머니에 넣고 있던 하얀 손을 꺼내 전 재산 5프랑을 주저 없이 여인에게 건넸다네. 적선한 돈이 너무 적어 부끄럽기라도 하다는 듯 고흐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재빨리 그 자리를 떠나갔다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것이었지.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말일세.

나는 그날을 보았지.

나는 경매인들이 있는 제9호 화랑으로 들어갔다네.

내가 들어가자 때마침 경매가 진행 중이었지.


"<붉은 포도밭> 400프랑! 450프랑! 500! 더 높은 금액에 살 분 있습니까?"


사람들의 반응이 없자 경매인이 외쳤다네.


"<붉은 포도밭> 낙찰되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 작품입니다."


<내 그림을 위한 변명(화가의 노트)> 중.





20세기 최고의 화가로 손꼽히는 피카소와 달리,

고흐는 사람들 사이에서 항상 꺼려지는 사람이었다.

테오를 뺀 가족에게도 꺼려졌다.


27세의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했다.

살아생전에 판매된 그림이 고작 한 점이었다.

1990년 그의 그림이 1조 31억 원인 세계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심각한 아이러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실제로 고흐의 작품을 마주했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해바라기]에 눈과 마음이 묶여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고흐가 마지막까지 머물렀고, 잠들어 있는 곳.


'고흐 박물관'




그를 향해 가는 길은, 그림과 흡사할 정도 까마귀가 나는 밀 밭같았다.

한참을 두리번거리고 나서야 겨우 발견한 무덤.


'살아서나 죽어서나 참 가진 것이 없구나...'


다만, 지금도 영혼의 동반자였던 동생 테오와 나란히 누워 있을 뿐이었다.




“좋아하는 작가/화가/작품이 있는가?”


나는 고흐를 사랑한다.

고흐의 [붉은 포도밭]를 들여다보고 있다.


*

그림 속 포도나무밭 가운데에는 수확물을 실어갈 마차가 보인다.

아낙들은 바구니에 포도를 따 모으느라 여념이 없다.

강을 따라 아득히 펼쳐진 들판 너머로 작렬했을 태양이 가라앉고 있다.

포도나무의 붉은빛과 저무는 해가 쏟아내는 노란빛이 어우러져 있다.

인상주의의 대표 그림답게 붉음과 노랑의 강렬한 대비처럼 보였다.

그러나 좀 더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포도밭 속에 머무는 이들에 자꾸 마음이 쓰였다.


그림 한 점에도 많은 사연이 숨어 있다고 한다.

‘사연팔이’ 대회를 개최하면 최소 준결승전에는 당당히 오를 게 고흐라고 생각한다.

단상에서 의기양양하게 서 있을 모습이 선해서, 피식 웃음이 났다.

나는 그가 이 그림에는 어떤 마음을 숨겨 놓았을까?

궁금증이 일어서 더 들여다보기로 했다.


10월의 유럽은 포도 수확이 한창인 계절이다. 고흐가 머물렀던 아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수확기의 포도나무가 이렇게 붉은가?

푸른 잎 사이에서 주렁주렁 매달린 포도를 수확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방송에서나 실제로 내가 본 포도나무는 그렇지 않았다. 녹색이라야 정상이었다.


고흐는 자신의 눈에 담기는 인상을 거친 붓질에 담아 세상에 내놓는 인상주의 대표 화가였다.

살아생전에는 화가로서 대접받지도 못했더라도 말이다.

그의 눈에는 이토록 붉게 보였기에 실제와 상관없는 과장과 왜곡으로 그림을 표현한 것일까?


19세기 말 유럽은 근 20년 가까이 병충해에 시달렸다고 한다.

포도 수확량이 심각하게 감소해서 주류 시장의 지형을 변화시켰을 정도로 극심했다고 한다.

포도 농사에 온 식구의 삶을 내맡기고 있던 이들에게는 극심한 고통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잔인할 정도로 아름다운 붉은빛과 노랑으로 물든 자연과 달리, 포도밭 속에 몸을 굽힌 이들은 무채색이다.

굽은 허리로 바닥을 마주한 이들은 색을 입지 못했다.

삶이 급급하여 색을 뒤집어쓸 여유가 없는 것이리라.


강렬한 원색의 자연과 대비되게 색을 뒤집어쓰지 못한 무채색의 인간!

사람들은 삶을 뒤집어쓰고 있다.

나는 그가 표현하고 싶었던 대비가 무엇이었을지 내 나름대로 사연을 맞추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나는 그가 남기고 간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은 알 듯도 싶어 졌다.


삶, 자연, 예술...

모든 것을 맹렬히 사랑했으나 사랑받지 못한 화가의 마음이 무엇이었을지….


서글퍼져서 꽤 오래 그림 감상을 했다.

화가의 마음에 기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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