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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단편]삼일절
무렵에
by
유이지유
Nov 18. 2020
시
<고개 너미>
구비구비 12굽이의 한과
구비구비 13굽이의 희망.
달빛 아름답게 번지고 파도 은은하게 부서져
내 맘을 적시는 이 밤을, 그대와 걸어가네.
그런 환영이 창가에 자꾸만 번지네. 눈물 어리어 점점 흐려져만 가네.
꿈에 그린 듯, 언젠가 본 듯한 모습이 서러워 자꾸만 흐려져만 가네.
굽이굽이 12굽이 너머에서 만날 모습마저 흐려지는 것 같아서...
달빛 서늘하게 번지고
파도 부서져 내 맘을 적시네.
그리운 내 님은 이 생의 어디에 계시려나.
이 생이 아니라면 어느 생에 님 계시려나.
알려다오.
먼저 12굽이를 넘어가셨는지.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시는지.
전해다오.
걔 계시다면 조금만 기다려 주시라고.
나도 곧 너머 갈 터이니.
2019은 삼일절 운동의 100주년이었다.
작년 독립선언문에 서명했던 민족 대표 33인 특별전이 열렸다.
특별전은 삼일 만세 운동 후,
이들이 어떤 길을 가게 됐는지를 조명했다.
같은 꿈과 목표를 가지고 함께 태극기를 들었던 33인.
서명 당시에는 같은 가슴과 눈빛이었을 이들은,
매국과 독립, 혹은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됐다.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살아낼 수 없던 엄혹한 시절이었음에...
특별전 관람 후, 썼던 시와 소설의 한 장면이다.
#
새로운 세상을 바라며 맞서던 시절이 막을 내리려 한다.
내 앞에 놓인 길은 이제 이곳에서 끝났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바라던 세상은 환상처럼 부서져 내렸다.
바닥에 나뒹구는 꿈의 조각에 베어 피가 철철하다.
젊은 생들이 뿜어낸 선홍빛이 검붉게 비틀어져 가고 말았다.
돌이킬 수 없는 생이 흔적으로도 남지 못하고 먼지로 사라지고 마는.
우리네의 삶은 덧없을 새도 없이 스러진다.
순간의 번뜩임은 너무도 찰나여서 그 눈부심을 세상에 떨치지도 못하였다.
억눌린 시대에 항거하는 정신은 순도 100퍼센트의 고결함이었다.
불어오는 바람은 거세기만 하였다.
정신은 깨지고 뒤섞여 고결함을 지켜내지 못했다.
더럽혀지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이었으나 벼려진 정신은 타협의 길을 찾지 못했다.
찾으려는 모색조차 하지 않았다.
지는 해에 눈물짓고 떠오르는 해를 소망하는 것,
너무도 자연스러운 이치를 따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치를 무시하고 도의가 무너지는 것을 견디기에 우리네 정신은 너무도 예민하고 날카로웠다.
‘인간이라면 능히... 인간이라면 마땅히... 인간이라면, 인간이라면...’
수십 수백 번을 되뇌었다.
사람으로 낳아 사람으로 살기를 소망하는 것이 부당한 요구라면 그것은 살기를 소망하지 말라는 것이다.
적어도 우리네 기준에서는 말이다.
새봄이 온 세상에서 세계는 깨어나려고 하건만, 우리네는 눈을 감으라 강요당한다.
새로운 문명이 샘솟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 자격을 박탈당한 민족이다. 너희에게는 그런 자격이 없다 무릎 꿇렸다. 꽁꽁 언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당연하다 받아들이는 동족들에 피눈물을 쏟아냈다.
한 때는 동지였던 자들도 찬바람 눈보라 속에 내몬 자들에게 조아리는 것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이 던져주는 짚단을 깔고 앉는 것만으로 감지덕지 고개를 조아린다.
원래부터 조아림이 습성이었던 것 마냥, 자연스럽기만 하다.
한 때의 따스함에 몸을 맡긴 자의 매국의 바람이 거세기만 하다.
제 부모형제의 피와 살과 뼈를 짓이기는 것에 박수를 쳐댄다.
자신들도 한 때 인간이었음을 잊어간다.
봄 향기 가득해야 할 시절을 피 냄새로 뒤덮는다.
광풍에 휩쓸린 몽우리들이 하얀 속살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낡고 어두운 옛집에서 뛰쳐나와,
봄기운이 샘솟는 시절을 위해 싸웠건만,
나의 여정은 이곳에서 막을 내려야 하는구나.
나는 꽁꽁 언 얼음과 차디찬 눈보라에 숨 막히는 시대를 떨치지 못했다.
더는 부드러운 바람과 따뜻한 볕의 기운을 향해 걸어갈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옛집 터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의 발은,
붙들려 꽁꽁 얼어붙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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