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단편]더없고 덧없는 것 중에.

첫사랑

by 유이지유

입속에서 읊조리는 ‘더없음과 덧없음’

살아온 인생길에서 더 없던 게 뭐가 있을까,

그리고 덧없었던 일은.


잘 몇 번을 되뇌어도 퍼뜩 떠오르지 않는다.

더 없을 만한 일이 그다지 없었던 거겠지.

그렇다면 덧없었던 건?


이것도 마찬가지다.


더 없는 것보다는 체감 빈도가 높았을 것이다.

손에 쥐고 싶었던 게 많았던 만큼 놓치고 만 것들과 욕망한 것에 못 미쳐 결국에 체념하고 만 것이 많았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이곳저곳을 뒤져야 하는 건 덧없기 때문이다.

덧없었기에 놓치고 만 것들을 되살려내고 싶지 않은 거겠지.


더없음과 덧없음은 끝단의 감정에 닿아 있다.

어느 한쪽으로도 이젠 잘 치우치지 않게 되었다.

노련해졌다기보다 체념하는 법을 배워 왔기에 욕망하지 않게 된 것이다.

임계점에 다다를 만큼 감정을 담지 않는다.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지만, 감정의 추는 중심에서 이쪽저쪽으로 왔다 갔다 곡예를 잘도 탄다.

더 없는 것도 덧없음도 결국엔 선택의 문제였고, 내가 선택한 후에도 각자의 선택들이 부딪히며 만들어 낸 파동에 원형을 서로서로 원형을 잃고 덧없어진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더 없는 것도 바라지 않고,

덧없음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제 이것이 나의 선택이고,

파동에 부서지더라도 기꺼이 덧없어질 나이다.


더없음과 덧없음을 떠올릴 수 없는 내 인생에,

이 두 개의 끝단의 감정까지 갔던 일이 있었음 떠올린다.


더없음으로 시작하기에, 더없이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푸르름이 폭발하던 시절.

넘치는 열정만큼 감정이 폭발했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서 울고 웃고 미친 사람처럼 어딘가가 어딘지 분간도 못 하고 내달리던 시절이다.


그 한 가운데, 관통하는 감정이 ‘사랑’이다.


내가 아닌 다른 나였다고 해도, 누군가를 그토록 갈망할 수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이야기이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꺼내서 보여주고 싶었다.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 방을 뒹굴어야 했다.

그러고 날이 새면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온화한 얼굴로 사랑받기 위한 몸짓을 했더랬지.


하나부터 열까지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어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 같고, 그 모든 것을 함께하고 싶었다.


더없이 아름다운 시절의 이야기이지만, 덧없는 이야기로 끝이 났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현실 앞에서 어쩌면 그토록 힘이 없는지….


스러지는 감정을 두 손, 가슴, 온몸으로 움켜쥐고 싶었다.

아무리 꽉 움켜쥐어도 손을 맞잡고 있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더없이 찬란한 시절이기에 쥐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미지의 시절에 대한 기대와 초조함이 자꾸 등을 떠밀었다. 좀 더 멀리 가보라고.

두 손만 붙잡고 머물러 있기에는 모든 게 너무나 빨랐다.

손보다 빠른 발을 이미 저만치 가려고 발을 동동 굴러댔다.


한때는 죽을 것 같았던 마음들,

잃어버리면 결코 숨을 쉴 수 없었던 마음들,

그런 마음들이 그토록 또 빨리 스러질 수 있다는 것이 믿을 수 없었다.


아주 오래오래 첫사랑을 잊지 못했는데 그 마음들이 어느새 스러져 있었다.

떠올리려고 해도 분절된 마음은 내게로 돌아오지 않는다.

기억은 하지만 어떤 마음이었는지 되돌릴 수 없다.

다만 조합해낼 수 있을 뿐이다.

한 때는 분명히 이 가슴을 폭발하듯 뛰게 만들었던 감정.

박동에 터질 듯 달리던 가슴이 식은 지금은 얼마나 덧없는 감정인지. . .


덧없는 시절로 저만치 물러나 버린 것,

신기루의 그림자같이 남겨진 기억들.


인제 와서 되묻는다.

너의 첫사랑은 무엇이었냐고.

더없고 덧없는 시절을 회의한 나는 대답한다.


또 다른 내 그림자를 사랑했노라고.


자신이 되고 싶었던 자신을 그토록 열렬히 갈망한 것이 사랑이었노라고.


‘첫사랑’ 두 번 다시 없는!


나는 두 번 다시 나를 사랑할 자신이 없다.

첫사랑에서 멀어지는 선택의 대가로 내가 얻은 것은 나 자신을 알게 된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조금씩 천천히 깨지면서 자신과 마주할 수밖에 없었다.

감싸고 있던 껍질들이 조금씩 부서져 내리면서 드러난 실체는 사랑할 수 없는 자신이었다.

자신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지치는데 마주하는 바람은 사납기만 했다.

결코 넘어갈 수 없는 바람과 강이 발목을 잡고 나아가지 못하게 했다.

이리저리 구르고 날리고 어둠에 가라앉으며 죽음과 삶의 경계를 서성인 영혼이었다.

천재라 믿으며 세상을 바꿀 영웅을 꿈꾸던 망상은 장사 지낸 지 오래다.

하이에나처럼 기억을 끝단에 남아 있는 첫사랑의 그림자에게 손짓하는 것이 고작이다.


더없이 아름답고 더없이 희미한 시절의 냄새를 그러모아 팬터마임을 한다.

입은 벙긋거리지만 참으로 재주가 없다.

귀가 멀어 뜻도 겨우 몇 자를 따라 웅얼거리는 게 고작이다.


붙잡고 싶은 이미지들이 줄줄 새나가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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