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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이지유 Nov 06. 2023

[오늘의 삶그림] 군고구마

2023.11.06

[오늘의 삶그림] 군고구마



1학기 과정이 끝났다.

아직 시험기간이긴 하지만, 공부할 건 끝났으니 실질적으로 끝났다고 할 수 있지.

대충 하자 싶었지만, 습성은 어쩌지 못해 쓸데없이 충실히 임했다.


'어려운 공부도 아닌데 좋은 결과는 당연한 거 아냐!' 잘난 척을 떨어댄다.


잘난 척을 해대는 옆 자리에서


'잘해서 뭐? 그거 해서 뭐 한다고?'


'인생 모르잖아. 만의 하나 만약에, 만약에, 만약에... 쓸데 있을지 알어?'



뻥이다.

어따 써먹을 의도로 의지충만 시작한 것도 아니고, 정신줄 놓으려고 시작한 거니까.


이런 말을 들으면 정말 할 말이 없다. 뭘 위해서 달렸던가.

 시간들이 허무해진다.

한 시기를 방금 끝냈는데, 다음 시기는 뭘 위해 버텨야 하나 무력해진다.

무릎 틈만큼만 한 세상으로 쪼그라든다.

 

답을 찾을 수 없는데... 왜 자꾸 거기만 뒤적거리는데?  




한 켠에 감자, 고구마 박스가 놓여 있다.

아직 찬바람이 남아 있던 시절에 밭으로 내보냈던 녀석들이 몇 배나 몸을 불려 돌아왔다.

몇 개로 잘린 작은 감자조각, 고구마 줄기 하나에서 뿌리를 내리고 알알이 몸을 불렸다.

폭염에도 말라비틀어지지 않고, 폭우에도 썩어 문드러지지 않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농사꾼의 노고에 보답하겠다는 듯, 끝까지 버텼나?

풍성함을 자랑하듯, 찬바람 스산한 시절을 꽤 오래 함께할 것이다.  



감자 고구마 심던 그 봄에, 내 밭에는 뭘 심었지?


그걸 모르겠다.

열매 맺는 시절이 다 지나가도록 싹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예전 같으면 아예 갈아엎고 끝내고 싶다 생각했겠지만…


고구마가 너무 실하다!!!

게다가 성능 좋은 에어프라이어도 생겼다.


30분 만에 완성되는 군고구마는 어나더클래스다.

찐고구마랑은 비교 불가 당도다.


호호~불며 하나둘 먹다가 배 부르니 일어나 꼼지락거릴 수밖에 없다.

수북한 고구마껍질 잔해도 버리러 나가야 하고, 나간 김에 콧바람도 쐬고…



어젯밤부터 요란했던 비도 거의 그쳤다.

나무였던 것들이 하루 만에 나목이 되었다.

시절을 끝낸 나목은 드러난 하늘 아래 당당하기만 했다.

나뭇잎들도 일렁이는 물결을 따라 흘러간다.




나의 시기는 아직인가 보다.


뭔가 심은 듯하니, 기다려보려 한다.

한 철 함께할 군고구마도 넉넉하니.


예부터 대표적인 구황작물 아니던가,

헛헛한 마음도 규휼해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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