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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Oct 05. 2019

1. 뭐든 한 번이 어렵지 해보면 별거 아니야

첫 번째 데이트  - 첫 번째 남자  



'미쳤어.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얼마 만에 입은 건지 남의 옷처럼 느껴지는 짧은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10cm 신발 높이 탓에 무릎이 곧게 펴지지 않는 걸음을 아슬하게 떼며 생각했다. 전남편과 헤어진 지 일 년이 훨씬 넘었지만 '외간 남자'와 단둘이 만난다는 일이 마치 불륜 상대를 만나러 가는 것 마냥 느껴졌다. 불편하고 불안하고 짜릿한 느낌에 찡그려지는, 아무도 보고 있지 않은 내 표정을 관리하려고 애썼다. 사실 나는 상대의 불륜으로 인한 배신감은 알지만 불륜을 하는 느낌은 알지 못했다.


키가 6.4 feet (195cm) 이라니. 그렇게 키가 큰 사람을 실물로 만나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감도 오지 않는 큰 키를 의식해 신발장 안에서 가장 높은 힐을 꺼내 놓고 한참을 망설였다. 모르는 남자를 만나 저녁을 먹기로 한 것보다 그 힐을 신어야 할지, 내가 그 높이를 감당하고 제대로 걸을 수나 있을지를 더 많이 고민한 것 같다. 이제 와 미친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너무 늦었다. 약속시간까지는 10분밖에 남지 않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친구가 한 말을 되새겼다.


‘뭐든 한 번이 어렵지 해보면 별거 아니야.’


O는 키가 정말 컸다. 내 키를 10cm 높였지만 허그를 하는 첫인사가 높은 찬장에 손을 뻗는 일처럼 버겁게 느껴졌다. 키는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것은 O의 목소리와 억양이었다. 훤칠하면서도 부드러운 눈빛에 하얀 피부. 사진을 보면서 당연하게 상상했던 부드러운 목소리에 단정하고 정확한 톤의 영어 발음이 백인 남자를 향한 내 편견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끄러워졌다. O는 루마니아 출신으로 한국 사람인 나의 영어 발음을 칭찬해 주었다. 그가 가진 동유럽인 특유의 딱딱한 억양과 내 취향보다는 조금 가벼운 목소리가 싫은 것은 아니었지만, 휴대폰 속 사진과 문자 대화로만 상상해 왔던 느낌과는 너무 다르다는 것이 어색했다. 예상보다 컸던 키도, 실제로는 조금 날카로워 보이는 눈빛도 나의 낯가림을 부추겼다.


하지만 이것은 전남편과 헤어진 후 처음으로 다른 남자와의 연애의 가능성을 걸고 나온 첫 데이트였다. 마치 새로 지원한 직장의 인터뷰에 임하듯, 나는 낯가림을 숨기고 상대의 눈을 피하지 않고 밝고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그와의 대화에 집중했다.


그가 선택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은 깔끔하고 캐주얼하면서도 너무 시끄럽지 않아 첫 데이트 장소로는 훌륭했다. 우리는 그가 제안한 애피타이저를 나누어 먹고, 나는 메인으로 뇨끼를 시켰다. 첫 데이트에서 기다랗고 거추장스러운 파스타를 먹기란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닐 것이기에 미리 보고 골라둔 메뉴였다. 반면 O는 나와 이야기를 하며 기다랗고 거추장스러운 파스타를 다루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내가 마음에 드나?’


O가 우리의 대화가 끊기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했다. 딱히 관련이 없는 주제들을 쉼 없이 꺼내 놓는 모습이 조금 긴장한 듯도 보였다. 우리는 호감이 있는 사람과의 대화가 끊어지고 공백이 생기는 것을 두려워한다. 특히 처음 만남에서, 나는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어야 하는데 대화에 공백이 생기고 서로 어색한 눈빛이라도 오간다면 곤란하다.

 

Scaddabush Italian Kitchen & Bar, Toronto, ON


O는 자신이 캐나다로 오게 된 계기와 직업, 가족 관계 등 첫 데이트에서 빠지지 않는 것들에 대해 얘기하였고 나에게도 같은 것들을 물었다. 그는 나보다 네 살 연하고, 미혼이고, 금융계에 괜찮은 직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그보다 네 살이 많고, 아이가 있는 이혼녀이고, 365일 24시간 3교대로 돌아가는 호텔에서 일한다. 그는 내가 왜 마음에 드는 것일까 생각했다. 22살에 전남편을 만났고 그 전 연애 경력이라고는 대학교 때 3개월짜리 한 번이 전부였다. 39살, 17년 만에 하는 첫 데이트에서 상대방의 마음은커녕 나 자신의 selling point를 파악하기에도 나의 연애 공력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그는 데이트가 한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나를 다시 만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지만, 사실 나는 많이 혼란스러웠다. 나는 그를 다시 만나고 싶은지, 다시 만나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아직 내가 누군가를 만날 준비가 되어 있는지, 얼떨결에 나온 이 만남이 이제야 겨우 조금 안정을 찾은 것 같은 내 일상에 어떤 파장이라도 가져올지 겁이 났다. 애프터를 받아 준다고 그 사람을 사귀게 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는 두세 번에 걸쳐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했고 나는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헤어지는 지하철역에서도 그는 '꼭' 다시 만나고 싶다며 그 기다란 몸을 구부려 내 키에 맞춰 허그를 했다.


O는 그날 밤 내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문자를 보내 다음 약속을 잡았다. 그가 당장 다음 날 만나자는 걸 약속이 있다 했더니 그럼 그다음 날 만나기로 약속을 정해버렸다. 그는 내가 망설이는 것이 'No'는 아니라고 판단하고 밀어붙이기로 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망설이니 도망가기 전에 잡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의 전략이 뭐였든 나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다는 것은 이제 와 생각해도 조금 괘씸하다. 아무튼 우리는 다시 만났고 그 자리에서 O는 다음 영화 약속까지 잡아 버리는 추진력을 보였다. 나는 그가 그토록 밀어붙이는 것이 나에 대한 호감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심지어 두 번째 데이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I think you're special, that's why I want to keep on seeing you."


나는 그런 돌직구 작업 멘트를 누군가에게서 들어본 적이 없었다. 39살 연애초보인 나는 그 말에 얼굴이 화끈해져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눈을 피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눈을 피한 순간부터 나는 그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씩 풀기 시작한 것 같다.  


HOTHOUSE, Toronto, ON


'영화를 보러 가면 키스를 하게 되는 걸까?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랑?'


O와 키스하는 상상을 해 보았지만 별 느낌이 오지 않았다. 그건 그에게 끌리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나는 키스를 잊어버린 걸까. 전남편과도 키스를 한지는 너무 오래되어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언제부터였을까...? 결혼생활의 마지막 몇 년간 우리는, 아니 내가 먼저 그의 손을 잡고 키스를 하고 몸을 만지는 것을 그만두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던 나는 그것이 여느 오래된 커플에게 오는 권태기라고 전남편과 나 자신을 설득했다. 내가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은 것이 그를 향한 내 자석의 극을 바꾸었다는 것을 그때는 깨닫지 못했다.


사실 나는 스킨십 중에서도 키스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지금도 남편과 종종 키스를 한다며 별거 아닌 듯 말하는 친구가 부러워 다시 연애가 하고 싶어 졌을 정도니까. 만약 다음 데이트에서 O가 키스를 해 온다면 나는 받아 주기로 결심했다. 키스를 하고 나면 그에 대한 내 마음이 무엇인지 감이 잡힐지도 모른다.


토요일에 만난 우리는 화요일에 다시 만나기로 했고, 그는 우리가 처음 만난 이후 줄곧 그랬듯 아침, 오후, 저녁 하루에 세 번 모범적으로 문자를 보냈다. 그 주 회식 스케줄을 확인하고 다음 데이트를 컨펌해 주겠다고 한 월요일 아침에도 그는 나에게 좋은 하루를 보내라며 출근하자마자 스케줄을 확인하고 연락하겠다고 했다. 나는 그런 그에게 기회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전남친과 전남편에게도 그렇게 기회를 주었듯이. 지금까지 존재했는지도 몰랐던 남자를 겨우 두 번 만나 내가 그에게 끌릴지 아닐지를 판단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O에게서 다시 문자가 왔다.


'I've been thinking since we met, and I don't think I feel a connection that would allow us to build something meaningful in the long run. It was very nice meeting you, and I wish you all the best finding the right person.'


화가 났다. 이럴 거였으면서 나에게 그렇게 적극적으로 들이 댄 의도가 뭐지? 그리고 그에게 고백을 받은 것도 아닌데 그에게 기회를 주겠다고, 키스를 하겠다고 결심했던 나는 또 뭐지? 그리고 그 순간, 한 장면이 내 머릿속을 내리쳤다. 마지막 헤어질 때 그가 탄식 섞인 작은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꼭 껴안던 순간. 그때 그는 이미 마음을 정했던 것이 분명하다. 적극적이지 않은 내 태도에 내가 자기에게 호감이 없다고 느낀 걸까, 아니면 다른 데이트가 있었던 걸까, 혹은 내가 아이가 있다는 것이 역시 걸렸던 걸까.... 나는 그 이후로도 한참을 생각했다.


O가 그때 나와 끝내기로 결심하지 않고 그를 계속 만났더라면 나는 그에게 끌렸을까, 아니면 끌리지 않은 채 끌려갔을까? 나는 후일에 만난 B와 attraction, '끌림'에 대해 논쟁을 한 적이 있다. 그는 attraction은 만나자마자 느낄 수 있는 것이고 그것이 좋은 관계를 만드는 바탕이 된다고 했다. 나는 상대방을 알아 가는 과정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 attraction이고 나는 지금까지 그러했다고 했다. 그러자 B는 그것이 지금까지 나의 문제점이었다고 지적했었다. 첫 만남에서의 끌림이 '다시 만나고 싶다'라는 확신을 심어주는 것. 내가 준비가 되었는지, 만나도 되는 것인지 하는 핑계들이 벽을 쌓을 새도 없이 그 사람을 다시, 꼭 다시 만나고 싶다는 바람이 마음속에 강하게 꽂히는 경험을 나중에 하고 나서야 나는 B가 옳았음을 깨달았다. 끌림에 대해서도, 나에 대해서도.


17년 만의 나의 첫 데이트는 그렇게 연애로 이어지지 못하고 끝이 났고, 대리만족에 나보다 더 들떠 있던 주위 기혼 친구들을 실망시켰다. O는 그가 말한 의미 있는 무언가를 같이 만들어 나갈 커넥션을 가진 사람을 만났을까?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될까...?




- 사진: Scaddabush Italian Kitchen & Bar, Toront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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