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데이트 - 롱 브랜치
‘Are you open to having children again?’
뭐지? 이런 노골적인 질문이라니. 그것도 첫인사 한 줄 나눈 사이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지만 태연하게 대답했다.
‘Anything is possible with a right person.’
당장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게 인생인데, 그래서 나는 어떤 일의 가능성이 0% 일 가능성은 0%라고 믿는다. 따라서 I에게 그렇게 답한 것이 솔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물론 속으로는 내가 다시 아이가 가지고 싶어 질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는 여자는 만날 생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아예 처음부터 그 질문을 던지고 시작한다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상대와 시간 낭비하지 않겠다는 거지. 사람 관계를, 그것도 연애 관계를 그렇게 이해타산적으로 계획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지만, 대단히 솔직한 사람이다. 어떤 사람인지 호기심이 생겼다. 대화를 해본다고 사귀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주겠다는 다짐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뭐.
다소 전투적이었던(?) 처음과는 달리 I와의 대화는 편하고 자연스러웠다. 성의도 관심도 없이 상대를 간 보거나, 딱히 부적절하다기엔 애매하지만 외모나 몸매에 대한 불편한 칭찬을 곁들이거나, 앞뒤 없이 무작정 만나자고 하거나, 서로를 알기도 전에 이미 사귀는 것처럼 오버하거나, 몇 마디 하다 말고 사라져 버리는 등등, 많은 경우의 온라인상 대화들과 비교해 그와의 대화는 확실히 깔끔하고 유쾌했다.
게다가 우리는 대부분 사람들이 제목도 들어본 적 없는 Firefly라는 오래된 사이언스 픽션 드라마의 덕후라는 강력한 공통점이 있었다. (Firefly 덕후들은 잘 알 것이다. Browncoat 동지를 일상에서 만나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지.) 실제로 우리 대화의 많은 부분은 Firefly에 대한 혹은 그와 관련된 내용이었고, 드라마 속 대사를 인용한 농담도 서로 너무 잘 통했다.
I와 나는 문자상이기는 하지만 빠르게 친해졌다. 그나 나나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일하다 보니 일하는 사이사이 채팅을 하는 것이 가능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내가 먼저 아침 인사를 건넸고, 그는 내가 관심 있어할 주제나 사진을 틈틈이 보내주어 매일 반복되던 따분한 회사생활에 지쳐가던 나에게 새로운 것을 향한 호기심과 즐거움을 주었다. 그와의 대화가 오래 알고 지낸 남사친과의 대화처럼 편안하면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나에 대한 그의 관심과 호감도가 높아지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는 점점 더 나를 만나는 일에 대해 아이처럼 신나 했다. 나도 그런 I가 점점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
우리가 완벽하게 잘 맞은 것은 아니다. 그가 담배를 피운다는 점, 대학교육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점, 정치적으로 꽤 보수적이라는 점 등, 친구라면 그 사람을 대하는 내 의견이나 감정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것들이 연인이 되었다고 했을 때에는 부딪힐 수 있겠다고 생각되는 부분들이 여러 가지 있었다. 하지만 결정적인 딜 브레이커가 아닌 이상 일단 직접 만나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고 싶었다.
첫 데이트는 서로 채팅을 시작한 지 일주일 정도 뒤로 잡혔다. 그 일주일 간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럴수록 직접 만나는 것에 대한 그의 기대감은 커져가고 있었다. 그는 ‘우리가 잘 된다면...’이라는 전제를 달고 나와 함께 할 많은 계획을 세웠다. 처음에는 어쩌다 나온 그 전제가 점점 더 자주 등장하였고 그럴 때마다 나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관계에 대한 그의 기대감은 더 커져가는 것 같았다. 물론 나도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과의 실제 만남이 기대되었고 긴장도 되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 어떤 장담도 이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우리가 잘 된다면’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상상을 한다고 꼭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닌데 뭐.
우리가 만나기로 한 전날, 그는 내가 그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주기 바란다는 말을 했다. 좀 의아했다.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있는 그대로의 본인에 대해 자신이 없어서인가? 평상시 대화 속에서는 자신감이 충분한 사람 같은데. 어딘가 개운치 않았던 나의 감(感)은 그를 직접 만나자마자 실체를 드러냈다.
O를 만났을 때도 사진상과 실물의 느낌이 달랐지만, 이건 부드러워 보였던 눈빛이 실제로는 좀 날카로운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사진과 채팅에서 느꼈던 밝고 건강한 느낌의 I의 실물 첫인상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느낌으로... 'stale'이었다. 단지 겉모습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어떤 점들에 그렇게 느꼈는지 나열하여 설명하려면 다분히 사적인 부분들을 언급해야 하니 안되겠다. 다만 그와 내가 아주 많이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은 확실했다. 같은 취향이나 관심사, 그런 차원을 넘어서 상대방에게서 나오는 에너지가 내 것과는 너무 이질적인 느낌. 그래서일까? 나는 그에게서 그 어떤 매력도 느낄 수 없었다. 그와의 키스는 절대 상상할 수 없었다. 아니,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늦은 점심을 먹고 산책을 하는 와중에도 그는 계속 들떠 있었다. 헤어지면서도 그는 다음날 만날 약속을 잡고 있었다. 그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도 확실하게 거절할 수 있는 핑계가 필요했다. 나는 헤어진 뒤 문자를 보내 그가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우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담배는 선택, 기호에 관한 문제이지 그 사람 자체에 관한 것이 아니니 상처를 주진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일반 담배뿐 아니라 전자담배를 끊임없이 피워댔다. 만나기 전 나에게는 담배를 많이 피우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그는 전자담배는 담배라고 여기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와 걸으면서도 나를 데려다주는 운전 중에도 그는 전자담배를 손에서 놓지 않았고, 시나몬 애플파이 향이라며 그가 즐겁게 설명하던 그 냄새는 내 온몸에 스며들어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나는 그에게 친구로 지내자고 했고, 그는 거절했다. 일방적인 사랑에 빠지게 될 것 같아서 나와 아예 연락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는 많이 실망했고, 나는 많이 미안했다. 그의 마음을 받아 주지 않아서가 아니라, 만나기도 전에 쉽게 친해진 것이 미안했다. 좀 더 조심해야 했는데. 만나기 전 많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그 사람을 알아가는 데에 도움을 줄 것이라 생각했는데, 상대도 나도 의도하지 않은 서로에 대한 허상과 섣부른 기대감을 만들어 낼 위험성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
I가 그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 줄 누군가를 만나길 바란다. 결국 나도 그 누군가를 찾기 위해 아직도 선명한 상처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 치열한 전쟁터에 뛰어든 것이니까.
- 사진: White Lily Diner, Toronto,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