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데이트 - 동네 아저씨
S와 처음 연락이 된 것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나는 언제나처럼 주말 근무 중이었다. 손님들은 고급스러운 침구에 파묻혀 아직 잠들어 있고 주중 내 전화를 해대던 비지니스 업체들은 휴일이어서, 호텔의 일요일 아침은 대체로 조용하다. 호텔 안팎으로 많은 사람들이 밀린 잠을 청산하고 있는 그 시간, 그는 평상시보다 길었던 아침 달리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여유 있게 쉬고 있다고 했다. 일단 게으른 사람은 아니겠군. 주말이면 새벽까지 티브이를 보고 오후까지 늦잠을 자느라 아이를 혼자 내버려 두던 전남편의 게으름이 지긋지긋했던 나로서는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I와의 만남 이후 데이팅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것은 실제 만남이라는 것을 깨달은 나는 S에게 먼저 만나자고 제안했다. 내가 먼저 남자에게 만나자고 한 것은 처음인 것 같다. 그는 마침 나와 한 동네에 살았고 그날 오후 아무 계획이 없었다. 우리는 내가 퇴근한 후 동네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반적인 사전 기본 호구조사도 없이, 그날 당장 그렇게 즉흥적으로 만나기로 했다.
늦깎이 데이팅 한 달여 만에 또 얻은 깨달음이 있다면 첫 만남 자체를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내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어야 하며, 또 상대방을 연구(?) 하기 위해서도 그를 편안한 마음으로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 두 번과는 다르게 카페를 선택했다. 처음 보는 사이에 같이 밥을 먹는 것보다는 좀 더 부담 없이 편하게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첫 만남 자체에 대한 나의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꼭 잠재적 연애 상대를 만난다기 보다 일상생활 반경에서는 만날 수 없는 새로운 누군가를 만나보는 기회로 여기기로 말이다.
S는 O만큼이나 키가 컸다. 그렇게 큰 사람을 실제 만나본 적도 없다가 벌써 두 번째다. 연애를 다시 해보겠다는 결심의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그 결심이 없었으면 절대 만날지 못했을 사람들과 만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이번에는 O를 만날 때 신었던 그 어마 무시한 힐을 신지 않고 평소 즐겨 신는 플랫을 신었다. 역시 뭐든 한 번이 어렵지 해보니 별거 아니라는 친구의 말이 맞는 것 같다. 겨우 세 번째이지만 첫 번째의 그 불안하고 긴장한 내 모습과는 이미 많이 다르다.
S는 Civil Engineer, 도로를 계획하고 다리와 터널을 설계하고 건물들이 들어갈 자리를 결정하는 그런 멋진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와의 대화는 우리 동네의 도로들과 그 위 버스노선들에 관한 것들이라든지 그의 동네 달리기 코스 같은 친숙한 것들이었다. 그 역시 다른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내 호텔 직업에 관해 궁금해했다. 나는 곧 다가오는 미친 듯이 바쁠 토론토 국제 영화제를 앞두고 있는 내 심정과 매일 카페 길 건너 정류장에서 새벽 5시에 출근버스를 기다리는 일 등 따위를 이야기했다.
한 시간여쯤 이야기를 나눈 우리는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그도 나도, 그 어떤 이성적인 호감이 섞인 제스처라든지 다시 만나자라던지 하는 것 서로 없이 담백한 만남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그저 동네 이웃을 만나 커피 한잔 하며 일상적인 이야기를 나눈 딱 그런 느낌이었다. 그에게 다시 연락할 생각은 없었고, 그에게서 다시 연락이 올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음날 새벽 5시 여느 때처럼 졸음을 견디며 출근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문자가 왔다. 누구지 이 시간에?
'Are you at the bus stop?'
S였다. 그는 내가 새벽 5시에 카페 길 건너에서 버스를 탄다는 말을 기억했던가 보다. 그 이른 시간의 내 모습이 궁금하다고 했다. 내가 피곤에 찌든 내 모습은 별로일 것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그래도 내가 충분히 예쁠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언제가 같이 달리기를 나가면 좋을 것 같다고.
'뭐지 이 갑작스러운 작업모드는!?'
나는 사실 S에게 딱히 이렇다 할 호감이 없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매일 달리기를 해서인지 상당히 마른 몸매였는데 키까지 커서 더 깡말라 보였다. 누구나 개인의 취향이 있듯이, 나는 늘씬한 남자보다는 덩치가 있는 남자다운 스타일에 끌린다. 꼭 근육질이 아니더라도 배가 조금 나와도 듬직하면서도 유쾌한 스타일에 매력을 느낀다. 더구나 그는 좀 소심한 성격인 것도 같았다. 그의 표정은 부드러웠지만 종종 수줍어했고 그런 S는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다시 만나자고 했지만, 나는 곧 다가오는 영화제와 아이의 개학에 당분간 바쁠 것 같다고 했다.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핑계였다. 아무리 지옥 같은 국제 영화제가 나를 힘들게 하고 아이의 개학준비가 바빠도, 그를 다시 만나고 싶으면 불가능한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눈치가 없는지 상대방의 말을 그대로 믿는 성격인지, 아니면 포기하기 싫었던 건지 나와의 연락을 끊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문자만 띄엄띄엄 주고받던 어느 날 S는, 자기가 아침 달리기를 일찍 나와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는 것은 어떠냐고 물었다. 내가 바쁘니 출근버스를 기다리는 몇 분이라도 볼 수 있다면 나오겠다는 것이다. 단 몇 분을 나를 보기 위해 그 이른 시간에 나온다니... 솔직히 좀 당황스러웠다. 그가 나에게 그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남자답고 적극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진심으로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것은 그 진심에 상처를 줄까 싶어서이기도 했지만, 그 마음을 좀 더 들여다보고 싶어 졌기 때문이다.
다음날 새벽 4시 55분. 어두운 가로등 아래 평상시처럼 졸린 몸짓으로 멍하니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가운데, 나는 초조하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가뜩이나 한두 번 만난 사람은 얼굴을 잘 못 알아보는데 이 어두침침한 가로등 불빛에 그를 알아볼 수 있을까. 버스가 십분 안에 도착할 텐데 그는 그 시간 안에 올까. 정말 이 이른 시간에 나오기는 하는 걸까... 갖가지 불확실한 생각들이 그 시간의 어둠처럼 내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분명 그를 처음 만났을 때는 마음이 편하고 가벼웠는데, 상황은 또 내가 예상치 못하게 흘러가고 그것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S가 나타났다. 얼굴은 몰라도 그의 호리호리한 키와 몸매는 알아보지 못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알아보기 전에 그가 먼저 나를 알아보았다. 쌀쌀한 새벽 공기에는 짧은 운동복에 야구모자를 눌러쓴 그가 내가 서 있던 길가 울타리에 걸터앉았다. 처음 만났을 때 다소 수줍던 모습보다는 훨씬 생기 있고 밝은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가 반가웠다. 단 몇 분의 짧은 만남을 위해 나와 준 그의 정성이 고마웠다.
버스가 도착하자 가벼운 허그라도 해야 할까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던 나를 두고, 그는 짧고 수줍은 손인사를 한 뒤 다시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탄 버스가 출발하자 나는 창밖으로 그를 찾았다. 꽤 빠르게 달리는지 생각보다 멀리 가버린 그는 지나치는 버스를 쳐다보지도 않고 달리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나보다 더 초보인 걸까, 아니면 세상 수줍은 성격인 걸까. Flirting이라고는 전혀 없다.
우리는 며칠 뒤 정식 두 번째 데이트를 계획했다. 이번에는 산책이었다. 역시 부담 없이 편안한 방법이다. 분위기가 좋으면 산책 후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이른 저녁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만나기로 한 토요일 오후 그가 퇴근하고 올 나를 근처 지하철역에서 픽업해 주겠다고 했다. 그 주말에 공사로 지하철이 일부 구간 다니지 않을 것을 미리 생각하고 해준 배려였다. 산책하기로 한 정원으로 가는 차 안에서는 그날 아침에 미리 달리기 코스로 와 보았다며 주택가 골목마다 나타나는 예쁜 집이며 특이한 나무, 달리기 중에 반가운 식수대가 있는 곳 등을 설명해주었다. 배려있고 자상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마음을 열어 보고 싶었다.
이제 시작된 가을은 아직 따뜻했고 햇살은 꽃잎들 위에서 반짝였다. 하지만 데이트가 길어질수록 그에 대한 나의 마음은 좀처럼 밝아지지가 않았다.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내 마음을 지배했을 때, 나는 그에 대한 내 마음이 노력으로 달라질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와의 대화는 전혀 흥미가 없었고 나는 점점 더 듣기만 하는 쪽이 되었다. 아무리 그가 내 스타일이 아니어도 그의 얼굴을 쳐다보는 것이 불편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편하게 다가가자는 내 결심과는 달리, 한쪽의 연애 의지가 다른 한쪽의 것과 크게 다르면 마냥 편할 수가 없는 것이 남녀 관계임을, 그런 상황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생각했어야 했다.
나는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이렇게 나를 생각해주고 배려해주는 사람을 내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로 만나지 않는 것이 나에게도 그에게도 실수나 잘못을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상대를 대하는 마음이, 그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이 불편한 관계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시간과 기회를 더 주어야 했다고 비난받아도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냥 그와 헤어지고 집에 가고 싶었다. 그 이상의 것들은 너무 복잡하고 어렵게만 느껴졌다.
결국 S는 많이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나와 헤어졌다. 나는 그가 이제는 다시 연락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연애는 어렵다. 20대의 철없고 뜨겁던 마음을 잊어버린, 혹은 묻어버린 어른의 연애는 더 어렵다. 그런데 정확하게 무엇이 어려운 건지도 모르겠어서, 이제 겨우 세 번째 도전인데 벌써 용기가 없어진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내 마음이 알아보는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나는 그 사람을 잡을 용기를 낼 수 있을까.
- 사진: Edwards Gardens, Toronto,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