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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Oct 10. 2019

4-1. 그의 눈동자는 올리브색

네 번째 데이트 - 쓰레기



Dear B,
On the subway, I picture you sitting across; in a café, I imagine you walking in and ordering coffee; during sleepless nights, I think of you lying in your bed alone also not being able to sleep...


B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그에 대해 글을 쓰는 것은 나에게는 참 어려운 일이다. 흔히 사람들은 B와 같은 남자를 쓰레기라고 부른다. 인간관계, 남녀관계에 대한 통상적인 기준들로는 이해되지 못할 그를, 그와의 관계를, 그리고 그에게 주었던 내 마음을 쓰레기로 만들지 않고 어떻게 풀어낼 수 있을까. 그가 나에게 누구인지, 그와의 관계가 내게 무슨 의미였는지, 그에 대한 내 감정의 본질은 무엇이었는지 ,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에게 이제는 설명할 수 있을까.


영국의 어느 연구결과에 따르면 사람은 삼십 대가 되어서야 완전한 어른이 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신체는 십 대 후반이 되면 성장을 멈추고 어른의 몸이 되지만, 우리의 뇌와 정신은 서른 살이 넘어서야 완전히 성장을 끝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보면 나는 이십 대 초반에 전남편을 만나 연애하고 이십 대 중반에 결혼했으니, 우리는 아직 어른이 되기도 전에 만나 결혼을 하고 그 속에서 같이 성장했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서로 맞지 않는, 서로를 힘들게 하는 어른들로 성장했고 결국은 그로 인해 헤어지게 되었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들과 헤어지게 된 과정 속에서 누구의 잘못이 더 크고 누구의 책임이 더 커야 하는지 그런 것들은 다 제쳐두자. 그와 함께 했던 16년, 그 시간 동안 나는 성장했고 어른이 되었고 내가 되었다. 그 시간을 후회하거나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만난 그와 결혼하면서 다른 남자들을 만나보지 못한 것은 좀 억울했다. 내 성장이 너무 한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쉬웠고, 삶의 여러 단면에서 종종 드러나는 나의 나약함과 부족함이 그 때문인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연애를 다시 해보기로 결심한 것은 꼭 연애 그 자체만 목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동안 접할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을 만나보고 다른 관계를 경험해 보고 싶었다. 늦게라도 다시 기회가 주어진 것은 지난 세월을 버텨온 것에 대한 보상이라고 해두자.


그런 의미에서 B는 분명 그동안 내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못했던 관계와 경험을 하게 해 준 사람이다. 앞서 만났던 O, I 그리고 S도 각자 너무 다른 배경과 성격의 사람들이어서 나에게 다른 경험을 주고 그 과정 속에서 나는 각각 다른 감정들을 느꼈지만, B만큼 나에게 획기적인 사람들은 아니었다. 앞선 이들과의 만남이 상식적이고 전형적인 연애관계를 전제에 둔 것이었다면, B와는 예전의 나라면 절대 용납하지 않았을 관계로 시작되었다. 그것이 옳지 못한 것이어서가 아니라, 20대의 나와 지금의 나는 상황도 내 생각의 범위도 너무 많이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의 연애는 늦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경험들이 분명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상대에 대한 좋아하는 감정만이 전제였던 20대의 연애와는 다른 깊이와 다른 의미의 관계를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은, 차라리 보상보다는 행운이라고 해야 하는 걸까?   


사실 B를 처음 만났을 때 그를 다시 만나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는 대단히 매력적이고 새로웠지만 그래서 위험하다는 것을 나는 바로 알아챘다. 그의 방식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그의 방식으로 그와 만나게 되면 순진하고 여린 나는 분명 상처를 받게 되어 있었다. 그는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고, 그를 만나는 방법은 그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래서 그를 더 알고 싶고, 경험해 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B를 생각할 때 늘 먼저 떠올리는 것은 그의 눈동자다. 그가 사는 건물 옥상 위로 내리쬐는 초가을 햇살 아래 그의 눈을 처음 마주 보았다. 그의 눈빛은 부드러우면서도 나를 꿰뚫어 보려는 듯 날카롭고, 자신감과 총기가 가득하면서도 신비로웠다. 처음에 내가 회색이라고 생각한 그의 눈동자는 올리브색이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초록색 눈동자라면 선명한 에메랄드색을 떠올리기 때문에, 그와 같은 올리브색의 눈동자는 회색이나 갈색으로 많이 느껴진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해외생활을 오래 하면서 여러 색의 눈들을 만나 보았기에 그의 올리브색 눈이 신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누군가의 눈을, 그 색을 알아보기 위해 일부러 들여다본 것은 내게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고 있을 때면 여러 감정이 들었는데, 늘 벽을 쌓고 내보이지 않던 그의 마음을 아주 조금이지만 들여다볼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인 것만 같았다.


The Rooftop


그와의 대화가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즐겁고 유쾌한, 그런 이상적인 첫 데이트의 대화는 아니었다. 나는 그의 눈빛과 커다란 몸집에 다분히 위축되어 있었다. O와 S만큼 큰 193cm의 키에, 호리호리했던 그들과는 다르게 B는 전형적인 역삼각형에 다부진 근육의 체형이었다. 그가 가까이 서면 내 시야에는 그 밖에 보이지 않았다. 또한, 첫 만남이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대화를 이끌어 나가려고 노력하던 다른 남자들과도 그는 달랐다. 종종 대화의 공백이 생기고 그때마다 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과 마주치면 나는 어찌해야 할 줄 몰랐다. 하지만 이전의 데이트들에서 느꼈던 어색함과는 분명 다른 느낌이었다. 어색해도 피하기 싫었던 그 눈빛과 낮고 무거운 그의 목소리에는 마음을 끌어당기는 어떤 힘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졌다. 그것이 이성적인 호감이었는지, 나에게는 너무나 새로웠던 사람과 그 사람에게서 받는 새로운 느낌에 대한 호기심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남녀관계가 아니더라도 그에 대해 더 알 수 있다면 친구가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B가 곧 나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을 때 그의 의도가 내 것과는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최대한 태연한 척 표정관리를 하면서, 처음 만난 남자의 집에는 가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갈 이유가 없다는 나에게 그는 우리가 서로를 좋아하는 것만으로 이유는 충분하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의 초대에 응하는 것이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방법이라고 했다.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어느 정도 선수일 것 같다고 짐작은 했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것이라고는, 아니 그런 사람을 이제껏 만나 본 적도 주위에서 들어본 적도 없었다. 우리가 서로를 좋아한다는 말에는 헛웃음이 나왔다. 너무 뻔한 작업 멘트를 대놓고 하는 그가 황당하지만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를 따라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것도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방법이라는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처음 만난 누군가를 알아가는 방식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연애 상대를 찾고 싶은 것이지 hook-up을 원한 것이 아니었다.


늦여름의 기운이 아직 가득한 지는 해를 향해 있던 나는 더 이상 앉아 있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따라 일어난 B가 따가운 햇살에 발그레하게 달아 오른 내 두 뺨에 그의 서늘한 두 손을 얹었다. 그의 오묘한 눈동자가 너무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얼굴이 더 붉어진 느낌에 등을 돌려 괜스레 옥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다음날 시작되는 토론토 국제 영화제 준비로 분주한 거리를 내려다보니 아찔했다. 그 아찔함이 까마득하게 내려가는 건물 높이였는지, 영화제로 미치도록 바빠질 일에 대한 걱정이었는지, 아니면 내 등 뒤로 바짝 붙어 선 B의 목소리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한 손을 내 허리에, 다른 한 손은 내 어깨에 얹은 채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여오자 나는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목소리가 크게 나오지 않았다. 만약 그가 내 몸을 돌려 다시 내 눈을 바라본다면, 그리고 키스를 한다면 나는 피하지 못할 것 같았다. 내가 만난 지 한 시간밖에 되지 않은 남자와 키스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충격적인데, 그와 키스한다면 절대 그와 가지 않겠다는 내 결심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자 정말 아찔해졌다.


내 등 뒤로 그의 넓은 품이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산처럼 느껴졌다. 그는 절대 강압적이지 않았지만 강하게 나를 유혹했고, 나는 온 힘을 다해 거절했다. 결국은 그가 포기했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그를 다시 만나기로 한다면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너무나 분명했다.




사진: Starbucks Wellington & John, Toront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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