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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Oct 14. 2019

4-2. 그 낯선 세계로 한 걸음

네 번째 데이트 - 쓰레기



B와 헤어지고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뭐든 한 번이 어렵지 해보면 별거 아니야'의 그 친구다. 나는 친구에게 그와의 대화를 모두 털어놓으며 그를 다시 만나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자 그녀는 '이번만은 그도, 아이도, 그 누구도 생각하지 말고 너 자신만을 생각해'라고 했다. 해야 할 것,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따지지 말고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만 생각하고 그대로 하라고 말이다.


친구는 내가 결혼 생활에서 늘 원하는 것은 포기하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가정의 평화유지를 위해 사소한 것부터 사소하지 않은 것들까지 늘 전남편의 눈치를 보고 그의 편의대로 해왔다는 것을, 그것을 그가 알았든 몰랐든 말이다. 그런 나를 항상 답답해하고 안쓰러워했던 그녀가 내 결혼생활의 끝이 '나의 삶'을 살 수 있는 시작이 되길 누구보다 바라 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늘 틀에 박혀 살아온 내 가슴 한 구석에 자리하고 있는 반항적 기질을 알고 있기에 나에게 '일탈'이 필요하다는 것을 늘 강조해 왔던 그녀다.


지금 B가 그 일탈을 제시해 왔다. 내가 그동안 상상해 보지도 못한 일탈이었고, 그 일탈을 선택할 자격이 내게 있었다. 선택할 용기와 그 일탈을 감당할 깜냥이 있는지 판단하는 것도 온전히 내 몫이었다.


전남편과 헤어진 이유를 떠올렸다. 책임감 부족하고 이기적이고 감정 기복도 심한 그 사람 때문에 오랫동안 힘들었다. 그도 불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불만들이 직접적으로 나에 대한 것이든, 그의 삶 자체에 대한 것이든 말이다. 세상에 완벽하게 화목한 가정이 없고, 완벽하게 잘 맞는 부부가 없고, 완벽하게 행복한 삶이 없다. 우리 또한 그 세상을 살아가는 완벽하지 못한 존재들이기에 완벽하지 못한 채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의 불륜은 그렇게 힘들어도 지키고자 했던 우리의 가정을 한 순간에 산산조각 내었다.


그래, B를 다시 만나자. 내가 불륜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를 만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적어도 나 자신, 그 바깥에는 없었다. 연애관이 나와는 너무도 다른 그를 만나 내가 어떤 상처를 받게 되더라도 그것은 나만의 상처였고 나만 감당하면 되는 일이었다. 그깟 상처는 전남편에게서 받은 상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게 분명했다. B를 더 알고 싶었고, 그가 제시하는 일탈을 경험해 보고 싶은 것 또한 분명했다.


나의 결연했던 결심이 무안하게 우리가 다시 만나기까지는 한 달 반의 시간이 걸렸다. B는 곧 태어날 첫 조카를 만나기 위해 가족들이 사는 매니토바로 떠났고, 몇 주 만에 돌아오자마자 새로운 직장을 시작했다. 그가 새로운 직장을 시작하던 날 저녁에 만나기로 했던 것은 다분히 순진한 계획이었다. 그의 새로운 직장은 만만치 않았고 첫날을 시작으로 한동안 그를 정신없이 만들었다. 하지만 한 달 반의 시간은 우리가 다시 만나기 전에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B는 나만큼이나 호기심이 많았고, 여러 분야에 적지 않은 지식과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러 언어를 할 줄 알고, 나처럼 역사학을 전공해 대학원까지 공부했고, 외국에서 캐나다 주재원으로 오래 생활했다. 또한 사회적 이슈를 둔 논쟁이든 서로를 약 올리는 경우든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 그와의 대화는 재미있었다. 아이슬란드계 후손인 B를 만나 고대 바이킹의 역사부터 현대의 매니토바가 제2의 아이슬란드로 불리게 된 역사를 알게 된 것도, 스스로를 바이킹이라고 부르며 남자다움을 어필하던 그와 나누던 적당하게 은밀한 대화도 즐거웠다. 처음에는 조금 겁이 났던 그와의 재회가 점점 더 기대되었다.

 

근무 중이던 어느 금요일 아침, B는 집에서 재택근무 중이라고 했다. 그의 집은 호텔에서 길 건너 2분 거리에 있었다. 내가 그에게 호텔 카페에 커피를 마시러 오라고 제안하자, 그는 배달을 부탁했다. 우리는 그렇게 다시 만났다.


The Rosemont Residences, Toronto, ON


블라인드를 드리워서 어두침침한 그의 원룸 안에 두 대의 노트북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도 두 눈을 빛내며 나를 맞았다.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그동안 잘 지냈냐는 의례적 인사를 나누었지만, 우리 둘 사이에는 순식간에 긴장감이 차올랐다. 나를 바라보던 그 눈이 유난히 반짝이던 순간, B는 나에게 키스했다.


첫 키스라기엔 지나치게 열정적인 그의 키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아니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것만 같은 그 뜨거움에 가슴이 뛰고 숨이 가빠졌다. 우리는 짧았던 점심시간이 남은 만큼 키스했다. 회사로 돌아가기 위해 발을 헛디디며 구두를 찾아 신으면서도 키스는 멈추지 않았고, 우리가 문을 사이에 두고 서로 다른 공간에 놓인 후에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나흘 뒤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에는 의례적인 인사 따위는 없었다. 다시 만나게 되면 술 한잔 먼저 하자던 내 요청도 서로 잊어버렸다. 처음 만난 날 그가 제안했던 서로를 알아가는 방법, 그리고 나의 일탈의 밤이었다. 나에게는 전남편이 처음이자 유일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와의 기억은 이미 헤어지기 오래전부터 희미했다. 그런 나에게는 B와의 섹스에 대한 어떠한 예상도, 어떠한 기대도 의미가 없었다. 그저 그가 이끄는 대로, 밤이 흘러가는 대로, 내 몸이 느끼는 대로 따라가는 것 밖에는 생각할 것이 없었다.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그 대상을 알아 가는 데에 무엇보다 큰 장벽이 된다. 하지만 그 두려움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는 그 낯선 세계로 한 걸음 발을 내딛는 순간 깨닫게 된다. 다른 남자와의 섹스에 대한 두려움도, B라는 사람에 대한 두려움도 그날 밤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그가 자기 가슴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던 나에게 무슨 생각을 하고 있냐고 물었다.  


"I have no thoughts."


정말 그랬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완벽하게 아무 생각이 없었다. 전남편과 헤어진 이후, 아니 그 이전부터도 오랫동안 내 머릿속은 너무 많은 생각들로 가득 차 있었다. 원래도 생각이 많은 편이지만, 지난 몇 년간의 내 삶은 끝이 보이지 않는 생각들에 잠겨 서서히 익사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B를 만나는 것에 대해서도 나는 너무 많은 생각을 하고 걱정을 했다. 하지만 막상 그의 품에 안겨 있는 그 순간 나의 머릿속은 고요했다.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고 한참을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넓고 따뜻한 품과 부드러운 손길에 마음이 편안해져 눈이 감겼다. 그렇게 오랜만에 찾아온 나의 평온은 B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다시 내게 키스하면서 깨어졌다. 그는 처음보다 더 뜨겁게 나를 안았다.


솔직히 B와 다시 만나기로 한 것은 그와의 관계가 원나잇일 수 있음을 감안한 결정이었다. 그렇게 되어도 담담할 수 있게 단단히 마음먹고, 그렇게 될 수 있음에도 나는 일탈의 기회를 선택했다. 어쩌면 그렇게 원나잇의 일탈로 끝났다면, B에 대한 내 감정도 그때에 한 번쯤은 필요했던 내 삶을 향한 도발의 욕구로 정리할 수 있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더 만났고, 나는 그에 대해 더 알아갔고, 그에 대한 내 감정은 더 커졌고 그만큼 복잡해졌다.




사진: Danish Pastry House, CF Toronto Eaton Centre, Toronto,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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