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데이트 - 쓰레기
B는 내가 연애를 할 좋은 남자를 만날 때까지 서로를 즐기자고 했고, 가끔 내가 새로운 남자와 데이트를 하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다른 여자를 만나는지 아닌지 아예 물어보지 않았다. 우리의 관계가 그동안 내가 익숙해 있던 일반 연애관계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첫 만남에서 이미 알고 있었다. 상대방 이외의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는, 한 사람과 기간과 조건을 정해두지 않고 사귀는 일반 연애가 아닌 우리와 같은 관계가 '섹스 파트너'라고 불린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전남편이 어느 날 아침 우리의 결혼을 깬 이후, 나는 결혼이라는 약속이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었다. 한 순간에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듯 져버릴 수 있는 약속 따위 차라리 하지 않는 게 상처를 덜 내는 방법이지 않을까? 결혼도 그러한데 연애 관계에 있어 어떤 규칙이나 약속이 얼마큼 의미가 있는 걸까? 그런데도 사회적 통념이 정해 놓은 연애 관계를 벗어나면 '섹파'라는 비하 가득한 이름을 얻는다. 그 관계에 섹스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왜 '섹파'일까? 그 관계가 다른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왜 비하당해야 하는 걸까? 불륜도 당당한 요즘 세상에 말이다.
내가 B를 만나서 갑자기 나의 연애관이 바뀐 것은 아니다. 앞으로는 나도 아무 약속도 책임도 지지 않을 순간만 즐기는 상대만 만나는 배타적 연애를 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정해져 있는 하나의 정의에 들어맞지 않으면 옳지 못한 것으로 비하당하는 것이 비단 연애 관계뿐만은 아니다. 대상이 무엇이든 그렇게 정당화되는 사회적 폭력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나도 B를 만나기 전에는 이런 관계를 편견을 가지고 보았을지 모른다. 설령 그렇지 않았다고 해도 나 스스로가 그런 관계에 자발적으로 발을 들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B를 만남으로써 나의 생각이 확장되고 새로운 것에 대한 가능성을 열게 된 것이지, 그간의 나를 부정하고 바꾸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나는 주위에서 걱정스럽고 부정적인, 때로는 불쾌함마저 깃든 발언들을 들어야 했다. 그들은 나를 걱정해서라고 했지만 그 밑에는 혐오라는 폭력이 잠재해 있음을, 단지 우리의 친분이 그 폭력이 직접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막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쓰레기라는 호칭에 대해서도 그렇다. 나도 그를 쓰레기라고 부르지만 그것은 그를 비하해서가 아니다. 쓰레기는 비난받을 이유가 없다. 누군가에 의해 사용되고 버려졌기에 쓰레기가 된 것이지, 버려지기 전에는 깨끗하고 빛나는 고유의 가치를 가진 존재였을 것이다.
어느 날 짧았던 그의 회상 속에서 보았던 것은 누군가를 진심을 다해 사랑했던, 그 사람과 가정을 이루는 꿈을 위해 살았던 젊고 로맨틱한 B였다. 그때의 자신을 다른 세계의 일인 듯 말하는 그의 눈동자를 흔들리게 했던 것은 쓰레기가 되기까지 짧지도 쉽지도 않았을 방황에 힘들었던 그의 아픔이었다.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기 위해 그 문을 닫아 놓고, 돌아보지 않게 추억을 만들지 않고, 기한과 조건으로 금을 그어놓고 때로는 그 안에 서서 못되게 말하는 것은 사랑 자체를 믿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에 호되게 버려진 자신을 믿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에게는 자기와는 다른 좋은 남자를 만날 것 같다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던 B. 나는 그의 말이 나를 위한 진심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군가는 그게 마음을 홀리려는 수작이라며 비난해도, 나는 그의 마음이 고마웠다. 그리고 그런 그가 안타까웠다.
한 발짝 가까워졌다 싶으면 또다시 선을 긋고 서는 B와의 관계였지만, 우리가 함께 있는 순간만큼은 그는 나에게, 그리고 나는 그에게 온통 집중했다. 그와 온몸으로, 그리고 온 마음으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 그의 표정, 그의 목소리, 그의 숨결, 그의 손길, 그의 몸짓... 그 모든 것들이 말을 걸어오고 나는 대답했다. 평상시에 차갑게 구는 그가 부드럽고 따뜻하게 나를 살펴주고 만져주면 그의 닫아 놓은 마음속에 숨겨 놓은 다정함이 느껴졌다. 그 순간만큼은 그것이 그의 진심이고 나의 위로여서, 우리가 오래 만나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면서도 그와 있는 것이 행복했다. 어차피 영원한 것은 세상에 없다.
그렇게 서로 이어져 있다는, 서로 교감한다는 느낌을 전남편과는 가져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냥 섹스가 육체적인 감각 그뿐이라고 생각했고 그 마저도 별로 특별하지가 않아서 많은 경우 그가 원해서, 그래서 했다. 전남편이 유일한 남자였으니 비교 대상이 없었고 섹스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별다른 의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사랑을 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결혼을 했고 아니고의 문제도 아닌 것 같다. 흔히들 말하는 섹스의 기술이나 속궁합 같은 것은 더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어쩌면 나 자신의 마음과 상황의 문제였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든 확실한 것은 B를 만남으로써 섹스에 대한 새로운 경험과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말했던 '서로를 알아가는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도 동의하게 되었다.
그날 밤은 오래전부터 계획해 온 하와이 여행을 떠나는 전날이었다. 지루하고 피곤했던 연일 근무 스케줄을 끝내고 저녁 내 짐을 싸다 보니 여행을 떠나기도 전에 심신이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잠시 숨을 돌리며 B에게 문자를 보냈다. 우리는 며칠 전 이미 여행 전 마지막이라며 만났지만, 앞으로 최소 2주간 그를 못 본다고 생각하니 서운했다.
'내가 잠깐 갈까?'
'그럼 좋겠지만 시간이 늦었는데?'
‘그냥 나를 원한다고만 말해.’
'잠깐이라도 네가 오길 원해.'
'나 짐 싸느라 머리도 엉망이고 화장도 안 했는데.'
'그거 좋은데?’
분명 두 시간째 혼잡스러운 짐 싸기에 기운이 다 빠져 있었는데 갑자기 생기가 솟았다. 부리나케 헝클어진 머리를 틀어 올리고 스웨터를 주워 입고 안경을 찾아 썼다. 그런 모습으로 그를 만나게 될 줄 몰랐지만 왠지 그게 좋았다. 30여분을 달려 도착한 토론토 시내는 한 달이나 먼저 나온 크리스마스 장식들에 반짝이고 있었다. 주차를 하고 나오니 갑자기 찾아온 겨울에 머리가 띵했지만, 차가운 밤공기가 피곤을 씻어 주는 것 같았다.
눈이 살포시 내린 거리를 빨리 걷느라 볼이 빨개져 도착한 나를 반갑게 맞아 주는 그가 좋았다. 내가 부츠와 코트를 벗자, 그는 장난스러운 눈빛을 하며 나의 커다란 스웨터를 벗기더니 나를 안아 침대에 눕혔다. 내 몸에 닿는 그의 몸이 따뜻했다. 나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무는 그의 입맞춤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입술 깨문 적 없다더니 이것 봐."
뭐든 지기 싫어하는 그는 내가 더 이상 항의하지 못하게 더 깊게 키스했다.
그날 밤 우리는 사소한 것들을 많이 얘기하고 서로 많이 웃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편안하고 따뜻했다. 돌아가는 나를 가볍게 안아주며 입 맞추던 그의 입술은 달콤했다. 아주 조금이지만 그가 내게 다가 온 듯 느껴졌다. 어쩌면 우리도 오늘 밤처럼 연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오랫동안 닫아 놓은 그 마음을 다시 열 수 있지 않을까, 더 이상 그가 외롭지 않게 내가 옆에 있어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내 마음 한구석에 자라났다.
돌아가는 길에 마주친 호텔이 은하수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사진을 찍어 B에게 보내주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휴가였는데, 한동안 이 길을 지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워졌다.
하와이에서 나는 아주 오랜만에 구김 없는 시간을 보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창밖만 바라봐도 행복함에 미소 지어지는 그곳은 정말 지상낙원이었다. 언제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회색 하늘이 앞으로 한참 지속될 토론토와는 정말 다른 세상이었다. 하와이는 늘 반짝반짝 빛났다. 그 어떤 걱정도 근심도 그 찬란한 햇살 아래서는 금방 부서져 내릴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착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만큼은 그 아름다움을, 그 행복을 마음껏 들이키고 싶었다. 그 순간을 위해 오랫동안 육체적으로 금전적으로 비싼 값을 치르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보다 더 비싼 정신적 대가가 현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 겨울 토론토는 유난히도 흐렸다. 추워도 쨍한 겨울 해가 틈틈이 나던 여느 겨울과는 달리, 매일 회색의 하늘이 계속되어서 흑백영화 속에 살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와이에서 가득 받아온 에너지가 그 회색의 도시 속에서는 오래가지 못했다. 오히려 그 반짝이던 하늘과 바다와 나무들이 너무 그리워 향수병이 난 내 마음은 온통 우울한 회색으로 빛바래 갔다. 아름답던 휴가는 끝났고 기나긴 겨울을 버텨내야 하는 현실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B는 또 차가웠다. 오히려 전보다 더 그렇게 느껴졌다. 재택근무를 하는 날 가끔 그를 위해 문 앞에 커피를 두고 가면 왜 들어오지 않았냐며 아쉬워하던 그였는데, 하와이에서 돌아온 후에는 그런 나를 나무랐다. 토라져서 반박하는 나에게 요즘 기운이 없다면서 못되게 말할 생각은 아니었다던 B. 그런 그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며칠 후 그는 겨울 연휴에 맞춰 매니토바에 간다고 했다. 새 일을 시작한 몇 달간 거기에 모든 기운을 쏟아왔던 그가 많이 지쳐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가족들에게 간다는 것이 기쁘면서도, 또 한동안 그를 보지 못할 생각에 서운했다. 게다가 떠나던 날 저녁에서야 그 얘기를 해주는 그가 못내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그가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돌아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사진: Downtown Toronto, 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