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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Oct 17. 2019

4-4. Dear B,

네 번째 데이트 - 쓰레기



B가 돌아오고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날. 나는 그게 마지막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지만, 우리의 끝이 다 와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떤 이유는 없었다. 조금은 다가온 줄 알았던 그가 예전보다 더 많이 멀어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을 뿐이다. 역시 안 되는 것이었는데, 왜 바보같이 희망을 가졌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눈물이 났다.


눈물이 난다는 사실이, 아프다는 사실이 싫었다. 나 자신을 위한 일탈을 원해서 시작했던 이 만남에 결국은 마음을 쓰고, 그가 안타까워지고, 그럼에도 그에게 그 마음조차 말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우리 관계가 나를 아프게 했다. 이러려고 시작한 게 아닌데 난 또 왜 이렇게 바보 같고 답답할까,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아직까지 그를 향한 내 마음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가 혼란스러우면서도, 나를 차갑게 대하는 그가 미웠다. 무엇인가 달라진 것인지 추측할 수도,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렇게 아프고 답답하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나는 겨울의 한 복판에 서 있었다.


몇 시간 만에 쏟아진 폭설로 온 도시가 마비되었던 1월의 어느 월요일 저녁. 그날따라 첫 출근을 했던 새 룸메이트가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폭설 때문에 버스가 언덕 밑에서 올라가지도 돌아가지도 못하고 한 시간 넘게 갇혀 있었다. 날이 좋아도 걷는 데에 한 시간이 걸리는 거리를 걸어오기로 결심한 그녀가 걱정되었다. 게다가 아침에 운동화를 신고 나간 그녀가 무사히 집에 온다고 해도 그녀의 발은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도 무섭게 눈이 쏟아지는 와중에 차를 끌고 나간다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룸메이트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 언덕 위로만 올라 와 있으라고 하고 키와 핸드폰만 챙겨 들고나갔다. B가 걱정되었다. 도시 외곽으로 출근했을 그도 어딘가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밖에 보고 있어? 괜찮은 거야? 나는 지금 룸메이트 구하러 나가.'

'나는 괜찮아. 조심해.'


재택근무하는 날도 아니고 출근했으면 퇴근하고 있을 시간인데 아무렇지도 않게 문자를 보내는 것이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다. 문득 그가 토론토가 아닌 다른 곳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주에는 클라이언트와 작업한다더니 어디 멀리 출장을 간 걸까? 그런 의문들은 위험천만한 바깥세상으로 나가면서 완전히 잊혔다. 도로는 이미 무릎까지 눈이 쌓여 있었고, 어떤 차들은 길에 버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눈은 그칠 기세 없이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인 듯 무섭게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의 마지막은 그 험난했던 겨울에 찾아왔다. 봄까지 가기에는 겨울이 너무 긴 이 곳이었다. 두어 주 후에 나는 B가 이미 먼 도시로 떠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와이에서 돌아와 내가 느낀 그의 거리는 아마 그가 떠날 것이 결정된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에게서 무엇인가 달라진 것 같다고 느낀 내 직감도 그것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조금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그때에, 그는 아예 멀리 가야 했기에 더더욱 차갑게 나를 떨쳐냈을 것이다. 마음에 조금도 남지 않게.


다시 돌아오기는 하는 거냐는 나의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왜 언제 돌아오는지 말해주지 않느냐며 화가 난 나에게, 그는 마지막을 고했다.

 

'우리 서로 그만 보자. 나보다 자상한 사람을 만나.'


'그래, 네 말이 맞아.'


B의 말이 맞았다. 나의 대답은 진심이었다. 나는 나의 일상을 알고 싶어 하고, 자신의 일상을 알려 주고 싶어 하는 자상한 사람을 원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나는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눈물이 났지만 많이 울지는 않았다. 너무 많이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던 건데. 울려고 시작한 게 아닌데. 그러니 울지 마. 나 스스로에게 다짐시켰다.

 

Wellington Street, Toronto, ON


그렇게 한 달여를 보냈다. 딸아이의 매일을 챙기고, 회사를 나가고, 친구들을 만났다.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요리를 하고, 그림도 그리고, 고양이들과 낮잠을 잤다. 그리고 그 속에는 B가 있었다. 지하철에서 건너편에 앉은 그를 상상하고,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는 그를 보고, 잠 못 드는 밤이면 역시 홀로 잠 못 들고 있을 그를 떠올렸다. 나는 한 번도 같이 하지 못한 그의 일상들이 그렇게 그리웠다. 그를 쓰레기라고 욕했다가, 쓰레기가 된 그를 연민했다가, 그를 그리워했다가, 그를 잊었다고 했다가, 그런 내가 서러워졌다.


지하철만 타면 눈물이 났다. 바쁜 호텔일을 뒤로하고 엄마라는 자리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어폰을 귀에 꽂고 오롯이 혼자 남게 되는 하루 중 그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참을 수 없이 눈물이 났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눈물이 흐를까 참아내는 그 시간이 어떻게 해도 괜찮아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한 달을 지내다 보니 나중에는 지하철 들어가는 입구만 보아도 겁이 나고 숨이 막혔다.


그래서, 큰 맘먹고 이곳에서는 고가인 소주 한 병을 샀다. 아이를 재우고 룸메와 수다를 떨다가 혼자 남았을 때 그 병을 열었다. 그리고 내 마음도 열어 모두 끄집어내었다. 누구에게서 인가 감정도 써야지만 없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말을 믿어 보기로 했다. 애틋함, 아쉬움, 원망스러움, 서러움, 안타까움... 그 모든 것들을 끄집어내어 한참을 들여다보다 소주에 눈물에 흘려보냈다. 얼마큼 울었는지 피곤함 말고는 어떤 느낌도 들지 않는 순간이 왔다.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피로를 못 이겨 결국에는 귀한 소주를 두어 잔 남기고 잠이 들었다.


나이가 들수록 세월은 빨리 가는데, 같은 속도의 시간 속에서도 겨울은 더디게 간다. 나이가 들수록 겨울은 더욱 더디게 간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더운 곳은 더위가 더 길어지고 추운 곳은 추위가 더 길어지고 있다는 내용의 방송을 본 적이 있다. 부끄럽게도 환경문제에 무감한 내가 그 겨울 지구 온난화를 심각하게 걱정하며 그렇게 간절하게 봄을 기다렸다.

 

그 긴 겨울만큼 시간이 지나면 B에 대한 내 감정들도 흐려질 것이라 기다렸다. 시간은 약이니까. 그리고 정말 적당한 시간이 흐르자 나는 다시 나로 돌아왔다. 여전히 그를 종종 생각했지만 더 이상 마음속에는 눈보라가 몰아치지 않았다. 지하철을 타면 눈물을 참는 대신 꾸벅꾸벅 졸음을 참았다. 이제는 그와의 기억이 애틋하지 않았고, 그를 만나지 못하는 게 아쉽지 않았고, 말없이 떠난 그가 원망스럽지도 않았고, 쉬운 게 하나 없는 나의 처지가 서럽지도 않았다. 나는 그렇게 다시 나의 세계로 돌아왔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 남아 있는 그에 대한 연민은 쉽게 지워지지가 않았다.


누군가를 정말 좋아했는지는 헤어지고 나서야 알 수 있다고 했다. 헤어지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남았다면 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했던 거라고. 여러 가지 감정들이 정리되고 사라지고 그 후에도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감정이 그 관계가 나에게 가지는 의미라고 가정하자. 그 마지막 감정이 그 사람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라면 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증거일까.


B가 너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마지막 남은 나의 진심이었다. 꼭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지만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옆에 있는 것이 괜찮지 않은 마음은 외롭다. 그가 아팠던 기억 속에서 걸어 나와 다시 마음을 열고 곁을 내어주고 싶은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다. 내가 내 곁을 내어줄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B에게,

나는 지하철 건너편에 앉은 너를 그려 봐. 카페에서는 문을 열고 들어와 커피를 주문하는 너를 상상해. 잠 못 드는 밤이면 역시 홀로 누워 잠들지 못하고 있을 너를 생각하지. 나는 그쪽으로 건너 가 네 옆에 앉고, 테이블에서 너에게 손을 흔들고, 네 곁에 누워 우리가 잠들 때까지 함께 있어주고 싶어. 하지만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이런 단순한 일들을, 너와는 바랄 수가 없어.

그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이런 작은 일들이 다시 내 삶에 찾아오기를 바라게 된 거야.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슬프게 하기 시작했어. 그냥 그게 원래 나야. 처음엔 나도 너를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지만 말이야. 네가 달라질 거라고 기대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나에게 마음을 열어 주길 나도 모르게 바랬나 봐. 하지만 난, 내가 너의 있는 그대로를 좋아했다는 것은 네가 알아줬으면 좋겠어.

다시는 너를 보지 못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면서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한다는 게 아파. 내가 마음을 준 누군가와 헤어지는 일이 나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아. 하지만 인사도 없이 헤어지는 건 더 아프잖아. 그래서 너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어.

우리가 만나고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너를 알고 네가 아니었으면 알지 못했을 일들을 경험하게 되어 행운이라고 생각해. 너를 지하철에서, 카페에서, 그리고 침대에 누워 생각하겠지. 가끔은 네가 다시 함께 하고픈 누군가를 만났을까 궁금할지도 몰라.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보고 싶을 거야.

안녕,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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