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세이지 Nov 28. 2019

7-4. 우리는 그렇게만이라도 좋을 것 같았다

일곱 번째 데이트 - 광부씨



“지금 나한테 꽃을 주는 거야?!”

“집에 처음 오는 거잖아.”


내가 건넨 튤립 다발을 받아 들고 꽃을 받아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수줍게 좋아하는 그가 반가웠다. 그는 튤립들을 정성스레 화병에 담고, 집을 구경시켜주었다. 우리는 나가서 점심으로 또 생선초밥을 먹고 커피를 사서 돌아오면서, 생선초밥과 커피만 있으면 우리는 데이트 뭐할지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며 같이 웃었다.

 

Tatemono Sushi Bar & Restaurant, Whitby, ON


“이렇게 너랑 데이트하니까 진짜로 쉬는 기분이다. 너무 좋아.”


나는 그렇게 말하며 신나 하는 그가 귀엽기도 하지만, 또 안쓰럽기도 했다. 그는 늘 토론토와 멕시코, 일과 아이들 사이에서 제대로 쉬는 날도 없이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바쁘게 사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나와 함께 있는 시간이 휴식처럼 느껴진다면, 내가 그에게 쉼터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만이라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나도 고단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같이 숨을 돌리고, 같이 웃고, 같이 기대어 쉴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그가 그날 아침에 배달받은 새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바짝 붙어 앉지 못하고 아직은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고 앉은 우리가 서로 처음 좋아하기 시작한 십 대들 같았다. 이제 그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겨우 15분 정도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는 애꿎은 시계만 자꾸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내게서 덩그러니 떨어져 앉은 그가 남은 시간 동안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어떻게 키스를 할 건지 내심 초조해졌다. 서로 말없이 잠시 조용해진 사이 그가 말했다.


"저번에 내가 키스해주면 좋겠다고 했잖아..."

"... 어?"

"너한테 키스해도 돼?"


내게 자연스럽게 다가와 키스를 해올 것을 상상했었던 나는 그가 그렇게 직접적으로 물어보자 처음 만난 날 그랬던 것처럼 얼어버렸다. 나에게 키스해도 되는지 허락을 구해온 남자는 그가 처음이었다. 나는 가슴이 콩하고 내려앉아 대답도 못한 채 그의 눈을 바라보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나에게 다가오는 그 짧은 순간이 슬로 모션처럼 느껴졌다. 주의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겨우 붙들고 있는 나의 가느다란 숨결만이 그와 나 사이에 있었다. 그는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따뜻한 그의 입술을 따라 내 입술이, 그리고 내 마음이 열렸다.


그가 내 몸을 그에게로 더 가까이 끌어당겼다. 우리 둘 사이의 거리는 사라지고 그의 키스는 점점 더 깊어졌다. 어느새 뜨거워진 그의 키스로 숨이 차오른 내가 그의 품에 안겨 숨을 고르면 그도 잠시 멈추고 나의 숨소리를 따라왔다. 그러다가 그의 입술이 내 목덜미에 가 닿으면 나의 가슴은 더 세게 뛰었다. 하지만 그는 더 이상 멀리 가지 않고 곧 다시 내 입술로 돌아와 사랑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너무 부드러워.”


그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난 그의 달콤한 목소리에 다시 스르르 눈이 감겨 그의 입술을 찾았다. 그의 입술이 너무 부드럽고 따뜻해서 나도 모르게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말았다. 그는 곧 나를 가볍게 들어 올려 그의 무릎에 앉혔다. 내가 그의 안경을 벗기고 그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키스하자, 그는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그렇게 지나고, 나는 그의 목을 끌어안고 가쁜 숨을 진정시켜야 했고 그는 그런 내 등을 다정하게 쓸어주었다.


“우리 점심 먹으러 나가지 말걸.”


짧은 시간이 아쉬웠던 마음이 그도 나와 같았던가 보다. 그의 말에 수줍게 웃으며 그의 집을 나서는 나를 안아주던 그는 한번 더 입을 맞추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에게 더 가까워졌다. 첫 만남에서, 그리고 두 번째 만남에서 조심스러웠던 우리 마음이 기다린 만큼 우리의 첫 키스는 많이 설레고 달콤하고, 상상했던 것보다 뜨거웠다. 그리고 앞으로 그를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그만큼 더 어려워질 것이다.


아이들의 필드하키 경기를 위해 주말에 다른 도시를 다녀온 뒤 다시 멕시코로 떠나야 하는 그의 스케줄 때문에 우리가 다시 만나려면 2주를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나는 그가 호텔에서 5분 거리인 그의 다운타운 사무실로 출근하는 날 잠깐이라도 만나자고 제안했다. 그와 만나기로 한 목요일, 짧은 점심시간 30분 동안만 허락된 우리의 네 번째 데이트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유난히 비도 많이 오고 쌀쌀한 봄이 못마땅하긴 했지만, 그와의 약속시간을 기다리는 내 마음은 한껏 들떠 있었다. 우리는 호텔 건너편 토론토의 예술의 전당 격인 건물 처마 밑에서 만났다. 비를 피하려는 목적이었지만 때마침 막 비가 그친 상태였다.


Roy Thomson Hall, Toronto, ON


"오늘 예쁘다."


호텔 유니폼을 입고 나타난 내게 그가 웃으며 말했다.


"너도 멋져."


회사에 가기 위해 비지니스 정장을 입고 온 그는 정말 멋졌다. 그리고 그다음 그가 한 말은 더 멋졌다.


"그냥 너한테 알려 주고 싶어 하는 말인데, 나 오늘 회사에 안 가도 되는데 너 보려고 온 거야."

"뭐? 그러면 말을 하지. 일부러 온 거야!?"

"말하면 네가 오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그럼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내가 오고 싶어서 온 거야. 그만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는 단 30분을 나를 만나기 위해 일부러 집에서 한 시간 거리의 다운타운까지 통근기차를 타고 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뜻밖의 그의 고백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미안하기도 했지만, 나를 보고 싶어 한 그의 마음과 정성에 감동을 받아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누군가가 나를 좋아해 주고 나를 보고 싶어 해 주는 것이 얼마나 따뜻한 감정인지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미안함에, 그리고 고마움에 얼굴이 붉어져 어쩔 줄 모르는 나에게 그가 말했다.


"우리 걸을까?"

"응."


그에게 팔짱을 끼자, 그는 수줍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우리 손 잡을까?"


나는 그가 처음 내 손을 잡았던 순간이 얼마나 좋았는지, 그날 가까운 곳에 주차하자고 했던 나 자신이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그에게 얘기한 적이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에게 내 손을 건넸고, 내 손을 잡는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우리는 서로 가까이 붙어 체온을 나누며 걸었다. 코끝까지 시려지는 쌀쌀한 날씨에 깍지 낀 손이 시려진 내가 손을 오므리자, 그가 내 손을 감싸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커다랗고 따뜻한 손에 폭 파묻힌 내 손만큼 내 마음도 한없이 따뜻해졌다.

 

Simcoe Park, Toronto, ON


우리는 근처를 한 바퀴 돌아 호텔 직원 출입구에 도착했다.


"다음번엔 내가 먼저 와서 연락할 테니까 그때 나와. 그럼 시간을 아낄 수 있잖아."


그의 그런 말이 그 어떤 미사여구보다도 달달하다는 것을 그는 알까. 그런 그를 보내야 하는 것이 가슴이 답답해질 만큼 서운하다는 것을 그는 알까. 우리는 그렇게 작별인사를 앞두고 있었다. 우리 회사 근처인 것을 의식한 그는 내 볼에 가볍게 입맞추었지만, 나는 그에게서 떨어지지 못하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참을 수 없는 아쉬움에 나도 모르게 그를 끌어안으며 흔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고 싶을 거야..."

"나도 보고 싶을 거야. 너무 긴 한 주가 될 것 같아.”


결국 그는 짧지만 깊게 키스를 했다. 그를 보내고 나는 제대로 걸을 수도 없을 만큼 가슴이 뛰어 복도에 한참을 기대어 있었다.


이런 감정도 처음인 것 같다. 분명 과거에도 연애를 하고 사랑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N과 느끼는 이런 감정들이 모두 처음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그 감정들이 너무 오래되어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나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그 기억들을 지워버린 것인지, 아니면 그와 느끼는 이 감정들이 이전의 것들과는 다른 종류의 것들인지 도무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번개처럼 꽂힌 호감과 끌림, 그와의 키스에 대한 갈망, 잠깐의 만남을 위해 먼 길을 와준 것에 대한 감동, 그리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가슴이 답답해지는 그와의 작별인사. 그 모든 감정들이 가슴 설레도록 기쁘지만 또 너무 생소해서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그것은 과거의 내 연애감정들과 사랑이 모두 허구였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기도 했다. 그리고 정말 그것들이 허구였다면 그것을 진짜라고 믿고 살아왔던 그 동안의 내 삶은 도대체 무엇이 되는 것일까.


나는 전남편과의 애틋했던 기억이 전혀 떠오르지가 않는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기억 나지만 그때의 감정들이 어땠는지 전혀 떠오르지가 않는다. 그때는 분명 좋았을텐데, 사랑이라고 생각했을텐데... 나는 사랑이 무엇일까를 지금까지 이토록 절박하게 고민해 본적이 없었다. 그런데 막상 사랑이라고 믿었던 관계와 감정들이 하루 아침에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난 이후에 나는, 난생 처음 사랑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리고 누군가를 다시 만나게 되면, 다시 그 감정들을 느끼고 관계를 갖게 되면 어떤 실마리를 잡을 수 있을까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물론 아직 N과의 관계가 그 어떤 합의나 정의가 없는 이른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감정들이 더 조심스럽게, 어쩌면 불안하게까지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혹시 나 혼자만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날 없었던 일들이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그가 좋고,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좋고, 그와 더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에 설레고 기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그런 불안한 마음이 함께 자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분명 그도 나와 같았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7-3. 키스한 것보다 더 설레게 하는 남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