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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이지 Oct 03. 2019

추억의 맛 - 토론토 만두장

그래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맛을 찾아 헤맨다.



나의 첫 외국 생활은 북경이었다.


일본 어학연수를 준비하고 있던 친한 대학 친구를 따라 유학원에 갔던 것이 그 시작이었다. 지금이야 대학생 어학연수나 워킹홀리데이가 대단히 일반적이지만, 그때만 해도 여행이 아닌 외국 생활을 해 본 사람들이 주위에 그렇게 많지가 않았다. 같이 일본어 학원을 다니던 친구가 일본에 간다니 무척이나 부러웠다. 하지만 부유하지 못한 우리 집 사정에 외국 어학연수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게다가 살인적 물가의 일본이라니.


그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외국생활이 한국에서의 학비와 생활비 정도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친구 따라갔던 유학원에서였다. 대신 목적지는 역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중국이었다.


중국도 지금은 물가가 많이 올랐겠지만, 2001년 당시만 해도 북경의 물가는 한국보다 훨씬 낮았다. 한국 대학 학비로 중국 대학 부설 어학원 학비와 기숙사 비용이 충당되었고, 당시 30만 원의 용돈은 북경에서의 한 달 생활비로 충분했다. 재빠르게 부모님을 설득하고, 중국어 학원을 한 달 끊어서 '니하오'를 배웠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학기에 나는 북경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북경에서의 첫 한 달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흥미진진하고 신나는 시절이었다. 언어부터 시작해 길거리 풍경, 마트의 물건들, 사람들의 모습과 표정들, 모든 것이 한국과는 너무나 다른 그곳. 거기에서 나는 떠나기 전에는 기대하지 못했던 자유로움과 모험심에 생기가 넘쳤다.


굳이 탈 이유가 없어서 (라고 쓰고 무서워서 라고 읽는...) 배우다 말았던 자전거 타는 법을 북경에서 처음 익혔던 날의 그 흥분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에게 어디든 갈 수 있는 날개가 달린 것만 같았다.  


북경에서 살아 남기 위해 마스터해야 할 것은 자전거 이외에도 많았다. 특히 사진 한 장, 영어 한 자 없는 잡지 한 권 분량의 식당 메뉴들은 극도로 불친절했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그 글자들 속에 기다리고 있는 미지의 중국음식들은 새로운 맛과 경험을 향한 내 욕구를 강하게 자극했다. 북경에 도착한 첫 주 어느 날, 룸메이트와 둘이 손가락으로 찍어 고른 미스터리 메뉴가 나오기를 기다렸던 기억에는 지금도 가슴이 떨린다.


북경을 떠나서 오랜 시간 동안 그곳이 그리워 향수병에 시달렸다. 그중에서도 북경에서 즐겨 먹었던 음식들은 잊히지가 않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북경오리라든지 중국식 탕수육 같은 것들도 물론 맛있지만, 북경에서 처음 먹었고 북경에서만 먹을 수 있었던 음식들이 있다. 그것들은 북경 어느 식당에 가도 있고 가격이 저렴해서 일상적으로 먹던 단골 메뉴들이다.


돼지고기와 죽순의 식감이 좋은 위상로쓰 / 단짠소스에 아삭한 파채를 곁들인 진장로쓰
따끈하고 부드러운 연두부를 밥 위에 올려 먹던 르번토푸 / 닭을 땅콩처럼 썰어 구별이 안되야 제 맛인 꽁바오지딩

사진출처 https://m.blog.naver.com/noll92/110179799932 


그런데 한국이나 캐나다에서는 같은 이름의 음식이어도 그 맛이 확연하게 달랐다. 일단은 요리 방식과 재료가 달라서겠지만, 그 맛이 다르게 느껴지게 하는 다른 요소들이 분명히 있었다.


그중 가장 큰 요소는 바로 '추억'일 것이다. 단지 코로 맡아지고 입안에서 느껴지는 맛을 넘어서, 추억의 맛은 그때, 그곳, 그 사람들과 함께 했던 모든 느낌이 어우러져 만들어 낸다. 그래서 같은 장소로 다시 돌아간다 해도 '그때'와 '그 사람들'을 전부 소환해 낼 수 있지 않는 한, 살면서 똑같은 맛을 찾아내기란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맛을 찾아 헤맨다. 똑같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그 맛을, 그 추억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그런 맛을 말이다. 나도 오랫동안 북경의 맛을 찾아다녔지만, 중국인 이민자가 많은 이곳 캐나다에서도 북경 현지처럼 요리를 하는 식당을 찾을 수가 없었다.


만두장을 처음 간 것은 북경 음식을 찾아서가 아니라 중국식 냉면을 먹기 위해서였다. 한국처럼 진짜 맛있게 하는 곳을 해외에서 찾기 어려운 음식 중 하나가 냉면이다. 조선족 중국인이 운영한다고 알려져 있는 만두장에서는 함흥냉면이나 평양냉면은 아니지만 저렴한 가격에 냉면을 먹을 수 있다. 게다가 메뉴에 꿔바로우와 고구마 맛탕도 있어서 토론토 한인들 사이에는 꽤나 알려져 있는 곳이다. 간판도 '만두장'이라고 한글로 되어 있다.


만 두 장


몇 번을 가도 제때 못 찾아 지나치는 특이할 것 하나 없는 허름한 길가 플라자. 그곳에 낮게 자리 잡은 만두장에 처음 들어 선 순간, 나는 북경 어느 식당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빛바랜 핑크색 타일 바닥에 장미무늬의 비닐 테이블보들, 다소 어두침침한 실내와 세월이 스며든 페인트 벽. 별다른 꾸밈없이 소박하고 늘 거기에 있었던 것 같은 모습이 북경에서 자주 다니던 식당들과 너무 닮은 느낌이었다. 그 허름함 때문에 만두장을 선호하지 않는 한인들도 꽤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북경을 떠올리게 해주는 추억의 조미료와도 같은 것이랄까.


냉면은 한국에서 좋아하던 함흥냉면과는 사뭇 다르지만 어딘가 익숙한 맛이다. 어릴 적 시장에서 엄마와 사 먹던 기교 없이 소박한 냉면 맛과 닮았다. 꿔바로우는 요즘 한국에서 유행하는 잘라먹는 탕수육도 아니고 동네 중국집 탕수육과도 다르다. 속 고기는 부드럽고 튀김옷은 심하게 바삭했다. 소스에 과일이나 버섯 따위는 없다. 달고 신, 그 맛 그 자체다.


 

어딘가 다르게 익숙한 냉면 맛 / 부드러운 고기에 심하게 바삭한 튀김옷



고구마 맛탕은 양이 엄청나다. 김이 모락모락 뜨거운 맛탕을 같이 나온 찬물에 담그면 끈적했던 겉이 사탕처럼 바삭해진다. 어린 시절 뽑기를 하면 상품으로 받을 수 있었던 갖가지 모양을 한 설탕과자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다. 속이 폭 익은 고구마의 부드러움과 달콤함은 정겹다.


어린 시절의 추억 고구마 맛탕을 토론토에서


북경에서 가까운 중국 동북부가 주 거주지인 조선족이 주인이라는 얘기가 사실인지 음식의 전반적인 느낌이 북경과 비슷하다. 토론토에는 광동식 음식을 하는 중국식당이 많아서 아무래도 북경식과는 맛과 재료가 많이 다르다. 같은 만두라고 하더라도 지역마다 맛이 많이 다른데, 만두장의 만두는 북경에서 먹던 맛과 비슷하다. 어학원이 있던 대학교 후문 만두집에서 여러 가지 겨자와 간장을 섞어 찍어먹던 속이 알차고 짜지 않은 만두.


볶음밥도 그렇다. 만두장의 볶음밥은 중국식 한국 볶음밥이다. 볶음밥이 원래 중국요리인 것을 생각하면 이 음식에 도대체 몇 겹의 정체성이 씌워진 것인지 경이로울 정도다. 이것은 중국 볶음밥도 아니고 한국 볶음밥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에게는 익숙한, 기억 저 깊숙이 남겨 놓았던 그 맛. 북경의 한인타운인 우다코의 한국식당에서 먹었던 딱 그 맛이다. 쌀에 찰기와 쫀득함이 있고 재료도 한국 볶음밥 재료들인데 중국 볶음밥의 풍미가 배어 나온다.  


속이 알차고 담백한 찐만두 / 중국식 한국 중국요리??


마파두부도 북경에서 먹던 맛이다. 야채가 같이 들어가거나 검붉은 색이 돌지 않는 맹맹한 마파두부를 먹을 때마다 얼마나 실망을 했던가. 요즘 베트남 여행의 유행으로 한국에서도 인기가 많은 공심채 볶음은 마늘 기름으로만 맛을 내 깔끔하고 싱그런 맛이 살아있다. 전분물을 풀어 요리한 야채볶음과는 확실하게 다르다.

 

북경식 요리의 대표주자 마파두부 / 깔끔하고 싱그러운 공심채 볶음


북경에서 즐겨 먹던 딱 그 요리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반가웠다. 처음 집을 떠났던 그 시절 북경에서의 생동감과 어린 시절의 소박하고 정겨웠던 맛들의 묘한 조화랄까. 우리의 오감은 대단히 정교한 타임머신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추억의 맛이 있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린 시절 친구와 먹던 간식거리일 수도 있고, 생일이나 졸업식 같은 날에만 먹던 특별식이거나, 사랑하는 반려견을 보내고 가족들과 울며 퍼먹던 아이스크림, 혹은 한 때 내 삶의 일부였던 그 사람과 떠났던 여행에서 처음 먹어 본 그런 음식일지 모른다.


아마도 다시는 그대로 재현할 수 없는 맛이라는 것을 알기에, 우리는 그 맛을 추억으로 간직한다. 그러다 어느 날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 추억을 다시 만나는 행운이 온다면, 지나간 날들 속의 소중했던 그들도 그렇게 어디에선가 잘 지내고 있을 것이라고 미소 짓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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