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수 Oct 15. 2021

이 집은 애가 없어서 집이 깨끗해!


"이 집은 맞벌이라 지금 비었거든. 천천히 편하게 보세요."

집을 사기로 결정한 이후에 날마다 부동산 따라 집을 보러 다녔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경우에는 종종 빈 집을 보기도 했는데, 그날도 부동산 사장님 안내를 받아 빈 집에 들어갔다. 짐이 별로 없어서 그런지 거실이 다른 집보다 더 넓어 보였다. 오전 햇살을 받은 마루는 따스했고 장식장은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 서재방에 책이 많아서 집 보러 온 사람이란 것도 잠깐 잊은 채 서가 구경을 하고 있는데 사장님이 말씀하셨다.


"이 집은 애가 없어서, 이거 봐봐, 집이 깨끗해! 벽에 낙서 하나, 바닥에 긁힌 자국 하나 없이 집 상태가 최상이에요."


애가 없구나. 그 말 뒤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집이 깨끗해'가 좀 낯설었다. 책상 위 사진에서 얼핏 본 부부는 신혼은 아닌 것 같았다. 부부 합의 하에 아이를 안 낳은 건지, 어떤 사연이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건데 '애가 없다'는 게 이 집의 장점처럼 불쑥 튀어나왔다. 집은 아늑했지만 '아이가 없어서 깨끗한 집'으로 인과 관계가 드러나니 집안 공기가 왠지 서늘하게 느껴졌다. '아이'란 최상의 집을 위해서는 불필요한 존재인 걸까?




어릴 때 부동산에서 집 보러 오면 엄마가 언니들에게 놀이터에서 잠깐 놀다 오라고 한 기억이 떠올랐다. 여섯 식구가 북적거리고 있으면 집이 좁아 보일까 봐 그랬는지 모른다. 집 보러 오는 사람마다 애들 넷이 옹기종기 있으면 "애가 많네!"라고 꼭 한 마디씩 했으니 엄마 입장에서는 그것도 듣기 싫었을 수 있다. 당시만 해도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표어가 매체에 수시로 등장했고 산아 제한 홍보 포스터가 길거리 곳곳에 붙어 있던 시대였으니까. 포스터를 볼 때마다 아들 낳으려고 아이 넷을 낳은 우리 집은, 어린 마음에도 부끄러웠다. 겨우 20~30년 뒤에 출산율 저하로 나라가 없어지네 어쩌네 우려스러운 목소리가 쏟아질 줄 모르고 이미 태어난 아이가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산아 제한 캠페인은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전개됐다.


엄마가 언니들을 내보낸 건 집이 좁아 보일까 걱정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사회적인 분위기가 다산을 무지의 소산처럼 취급해서일 수도 있다. 거기에 보태 지금 부동산 사장님 반응을 보니 애들이 많으면 집을 험하게 썼을 거라는 생각에 매수자가 안 좋아할까 신경 쓴 결과가 아닐까 싶다. 아이들이 있는 집을 보러 가면 사장님들이 꼭 덧붙이는 한 마디에서도 짐작하게 된다.


"이 집은 애들이 어려도 워낙 얌전해서 낙서 같은 건 안 했대요."

"이 집은 애들이 다 커서 대학 가고, 취직하고 그래서 집에 거의 없었대요."


아이란 집에서 낙서를 하거나 기스를 내지 않고 그림자처럼 머물다가 때 되면 대학이나 직장으로 사라져 하는 존재인가 보다. 물론 아이가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경우도 있긴 하다.


"이 집이 터가 좋아. 애들이 다 공부를 잘해. 큰애는 특목고 갔대요."

"이 집 기운이 좋아요. 학업운이 있는지 애들이 둘 다 명문대에 가서 서울로 올라갔대요."


그러니까 부동산 시장에서 '아이'란 존재는 집에 흠집을 내거나 '말짓'을 하지 않고, 정물화 속 목각인형처럼 책상에 앉아만 있다가 명문대로 직행해야 언급될 가치가 있는 듯했다. 어쩌면 한국 사회가 아이한테 바라는 바가 명확하게 드러난 건지 모른다. 아이에 대해서는 야박하지만, 말짓하고 어지르는 어른들에 대해서는 부동산 사장님이나 손님들이나 이상하게 관대했다. 예전에 살던 동네에서 연구원들 기숙사로 쓰이는 아파트를 보러 갔을 때 일이다.


Photo by Senjuti Kundu on Unsplash


"이 집은 연구원 셋이 쓰던 집인데, 공부만 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청소는 정말 안 해서 집 상태는 별로예요. 그런데 어차피 사모님 인테리어 공사한다고 했잖아? 고쳐 쓰면 돼요."

부엌이며 화장실이며 아무리 '공부만 하는 사람들'이라 해도 이렇게 더럽게 쓸 수가 있나 비위가 상할 지경인데 같이 집을 둘러보던 다른 팀 손님들마저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러게요, 남자들이 뭔 청소를 하고 살겠어요. 와서 잠만 자고 빠져나가겠지요, 호호호."


어린아이들 낙서나 기스도 못 참아하는 사람들이 다 큰 성인 남자들이 아무렇게나 집을 쓴 거에 대해서는 아기들 귀여운 재롱을 볼 때처럼 너그러웠다. 집은 누군가 시간을 보낸 곳이고 그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시간의 흔적이 남는 게 자연스러운 결과인데도 그 흔적에 대한 거부감은 선택적이었다. 그들의 연구가 얼마나 촌각을 다투는 중요한 사안인지 알 수 없지만 전쟁이나 재해 같은 국가적 위급 상황이 아닌 한, 청소 안 하고 사는 근거가 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런데도 당사자들도 없는 공간에서 그들이 게으르거나 모자라서는 아니라고 굳이 두둔해 주는 분위기에 좀 어리둥절해졌다.


아이들을 향한 냉정한 태도와 많이 달랐다. 하긴 아이들이라고 다 같은 아이들이 아니고 공부 잘하는 애들은 평범한 집을 학업운이 있는 집으로 둔갑시켜주는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집을 어떻게 썼든, 고학력자이면서 고소득자인 연구원들에게는 아량을 베풀어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 모른다.




부동산에서 집 보러 온다며 언니들을 내보내던 엄마가 평상시 우리를 보며 하던 말이 "으이그, 이 돈 덩어리들!"이었는데 빠듯한 살림에 아이 넷을 강남에서 키우며 얼마나 돈 생각이 간절했으면 그랬을까 싶으면서도 아직까지도 그 말은 상처로 남아 있다. 지금도 부동산 매매 현장에서 돈이 되기보다 키우는 데 돈이 들기나 하는 '아이'란 대상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으며 남긴 흔적조차 말끔히 지워야 했다. 매수자 입장에서 그저 깨끗한 집을 선호해서라고 이유를 대기에는 앞서 본 사례처럼 종종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 연출된다.


언젠가 집을 사놓고 미리 둘러보러 간 적이 있다. 인테리어 공사를 하기 전에 치수를 재기 위해서 들렸던 건데 욕실에 아이들이 붙여 놓은 바다 생물 스티커나 벽 한편에 표시된 아이들 키 성장 그래프를 보며 혼자 웃었다. 

이 집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는 정겨운 흔적이 싫지 않았다. 이런 걸 붙이며 까르르 웃었을 아이들과 매달 키 성장 그래프에 아이 키를 그려 넣으면서 "우리 00, 한 달만에 이만큼 컸네!" 다정하게 말했을 부모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걸 다 떼어내고 공사하는 게 약간 아쉽기까지 했다. 돈 되기보다는 돈 드는 아이들 덕에 우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웃고 행복해한다.


사람들은 돈 되는 것, 명예로운 것, 강한 것들만 기억하고 싶어 한다. 그렇지 않은 것은 흔적조차 수용하지 못한다. 돈 되지 않고 명예롭지 않으며 강하지도 않은 것들이 없으면 세상은 유지되지 않는데 우린 반대쪽만 애타게 치켜세운다. 나약하고 집에 흠집이나 내는 아이들, 돈을 벌기는커녕 돈이 드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이 없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미래가 없고 암울한 현재만 가득한 디스토피아 아닐까? 아니, 이미 출산율 저하로 나라의 존립이 위태롭다 하니 그런 세상이 성큼 다가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우리가 아이들이 낸 바닥 기스에라도 좀더 여유로운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게 아닌가, 너무 늦은 건 아닌가, 집을 둘러보다 말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반질반질한 마루를 한참 내려다봤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