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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Oct 11. 2021

매수 먼저? 매도 먼저?

번번이 신도시 청약에 실패한 우리에게 구원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구도심에 위치한 우리 집 매매 가격이 꽤 올랐다는 것이다.


"언니, 이 동네 집값 많이 오른 거 알아요? 요즘 없어서 못 판대요. 언니네 세 놓은 집도 내놓으면 바로 팔릴 걸요?"


아는 동생이 전해 준 소식에 우리는 집 매매를 결정했다. 그간은 갖고 있던 집을 팔아 봤자 신도시 집을 사기에는 턱없이 부족해서 집을 살 꿈도 못 꾸고 있었는데 이제는 대출을 받으면 신도시에 집을 살 수 있을 정도로 간격이 좁혀졌다. 꿈쩍도 않던 구도심 집값은 오르고 끝없이 오를 것 같던 신도시 신축들은 숨 고르기에 들어간 것이다.


들뜬 마음도 잠시, 매도를 먼저 할지 매수를 먼저 할지 결정해야 하는 어려운 문제가 남아 있었다. 매매 순서를 어떻게 할지 판단하는 건 늘 어려웠다. 딱히 정답이 없다. 누군가는 이사할 집을 먼저 사놓으면 초조해서 집을 헐값에 팔게 되니 판 다음에 사야 한다고 했고, 누군가는 좋은 집이 있으면 일단 사놓고 잔금 기간을 최대한 길게 잡아 놓는 게 유리하다고 했다. 시장 상황에 따라, 각자의 경험치에 따라 모범답안은 매번 달라졌다.


인생은 순서만 잘 짜도 큰 고생을 피할 수 있는 게임 같다.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활용해서 뭔가를 성취하려면 일의 순서가 중요하다는 걸 학창 시절에 이미 알았다. 당장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중간고사를 앞두고 여러 과목 중에 무엇을 먼저 하고 무엇을 나중에 할지 순서를 전략적으로 잘 짜야했다. 평소 예습 복습을 착실히 한 모범생에게는 불필요한 전략일 수 있지만 대부분 학생들은 발등에 불 떨어져야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니 이 순서는 상당히 중요했다.

난 시험 과목에 대해서는 제법 영악하게 순서를 매길 줄 알았던 학생이었나 보다. '벼락치기' 시험공부를 자주 했지만 부침은 있을지언정 학창시절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인생이란 실전에서는 매번 서툴기 짝이 없었다.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치해야 한다는 점에서 인생도 시험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세상 살기에 남보다 탁월하게 유리한 조건을 가졌다고 하기 힘든 평범한 사람일수록 전략은 중요했다. 다른 점은 인생은 시험과는 비교도 안 되게 예측하기 힘든 과제들을 무심하게 끌고 와서 던져놓는다는 것이다. 순서를 잘 짜야한다고 눈에 잔뜩 힘을 주고 노려봐 봤자 지나고 나면 '그 순서가 아니었구나' 깨닫게 된다.


덜컥 사표부터 내고 이직을 준비했던 거나 남편 공부가 끝나기도 전에 첫아이를 출산하는 등 돌이켜보면 몸과 마음이 고될 수밖에 없는 선택을 종종 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직장 때문에 주말 부부를 하자던 내게 "주말부부 할 거면 왜 결혼하냐, 너는 나랑 같이 있는 게 나만큼 안 중요한 거냐"며 화를 내는 그를 보니 내 사랑이 어쩐지 속물 같아서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사표부터 냈고, 벌이가 변변찮은 학생 부부 비슷한 상황이었지만 찾아온 생명은 소중했기에 기꺼이 낳았다. 순서가 좀 바뀐 것 같아도 바로잡기에는 늦은 경우가 많았다.

얼결에 선배 언니 따라서 가게 된 유명 점집에서 "스물여섯에 엄청난 집안에 시집가게 될 거니까 가만히 기다려!"라고 신들린 듯한 할아버지가 무섭게 호통쳤지만 그때는 이미 지금의 남편과 만나기 시작한 이후였다. 남편과 만나기 전에 점집을 찾아갔어야 '엄청난 집안'에 시집이든 뭐든 갔을 텐데 그런 순서는 내가 새로운 우주에 태어나지 않는 이상 재배치되지 않는다.


이때 이야기를 하며 안타까워하면 남편은 '엄청난 집안'이 어떤 의미인지 어떻게 아냐고, '엄청난 조폭 집안', '엄청난 시집살이하게 될 집안' 등 여러 의미가 있지 않냐며 웃는다. 순서가 뒤바뀌었다고 웃으면서 회상할 수 있는 일도 있지만 순서에 따라 생사가 바뀐 일을 떠올릴 때는 웃음이 나지 않는다.


대학 때 희귀병을 앓던 친구가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픈 사람 같지 않아서 병이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까지도 그녀가 정확히 무슨 병이 있었는지 모른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우린 졸업 시험공부하랴, 취업이나 진학 준비하랴, 정신이 없었다. 그 친구는 처음에 여성학과 대학원을 가고 싶어 했는데 친오빠가 엄마에게 '거긴 시집 못 가는 여자들이나 가는 곳이다'라고 말해서 온 집안이 반대해 무산됐다. 사회학과 대학원을 가려했더니 이번에도 친오빠가 '거긴 데모하는 애들 가는 곳'이라고 해서 또 엄마 반대에 부딪혔다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대화를 나눈 지 얼마 안돼, 친구는 갑자기 죽었다.


바로 며칠 전에 상태가 많이 안 좋다며 의사가 입원하라고 했지만 전공필수 과목 시험이 남았으니 그것만 보고 입원하겠다고 했었다. 시험 마치고 입원한 다음에 대학원 진학 문제를 엄마랑 다시 상의하기로 했는데 그 모든 계획이 의미 없게 되었다. 하숙집에 친구를 만나러 갔는데, "00이 좀전에 사망했다"고 말하던 하숙집 주인아주머니, 응급실에 실려가기 직전까지 엎드려 공부했는지 바닥에 펼쳐진 책들과 굴러다니던 볼펜, 옆에 놓인 안경. 그런 것들을 떠올릴 때는 하고 싶은 공부를 시작도 못 해보고 사라져 간 젊음이 떠올라 서글퍼진다.

Photo by Tingey Injury Law Firm on Unsplash

생과 사가 뒤바뀌는 무거움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오래전 매도와 매수 순서를 잘못 짜서 애먹은 일이 있다. 신혼 때 남편 취직과 동시에 우린 사택으로 이사하게 됐다. 사택에 들어가면서 빈 집이 된 신혼집은 세를 줬다. 사택에 무한정 살 수 있는 건 아니고 몇 년간 살 수 있었는데 이 기회에 자산을 늘려야 한다고 주변에서 입을 모았다.


그때 나는 야무지고 살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은, 의욕 넘치는 새댁이었다. 재테크 책도 열심히 읽었다. 결혼 초기에 종잣돈을 모으지 않으면 점점 더 돈을 모으기 힘들며 여유자금을 '지렛대' 삼아 부동산을 사놔야 한다는 내용을 밑줄 그으며 읽었다. 마침 부동산 시장이 곧 들썩일 거라는 신호가 곳곳에 나타났고(정확히는 내 눈에는 그런 신호만 보였고), 세 놓은 집을 팔기도 전에 무리하게 대출을 받아 전세를 끼고 마음에 드는 집을 한 채 더 샀다. 신혼집은 20평대라서 어차피 30평대로 갈아타야 하는데 집값이 오르기 전에 미리 사놓아야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가진 돈도 별로 없으면서 졸지에 집 두 채가 생겼지만 사택에서 나가기 전에 한 채를 팔면 되니까 문제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팔려고 내놓은 집이 1년 넘게 나가지 않았다. 값을 내리면 팔릴까 싶어서 깎고 또 깎아서 내놨지만 보러 오는 사람 한 명이 없었다. 마음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계산에 없던 일이다. 지하철이 생겨서 '역세권'이 된 아파트가 이렇게 안 팔릴 수는 없었다. 애가 탈 대로 타 있던 어느 날, 누군가 집을 산다고 나타났을 때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부르는 대로 다 깎아주고 헐값에 팔았다. 그날부터 오르기 시작한 집값은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두 배가 되었다. 지하철이 들어선다고 해도 꿈쩍 안 하던 집값이 지하철이 개통한 다음 1년쯤 지나니 움직이기 시작했고, 한번 매수 심리가 붙자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서울에서는 지하철 계획만 나와도 바로 시세가 뛰는데 지방은 반응 속도가 달랐던 것이다. 거꾸로 내가 좋은 동네라고 고심 끝에 대출까지 받아 미리 사놓은 집은 근처에 대단지 신축이 들어서면서 집값이 형편없이 떨어졌다.


고만고만한 어린아이들을 타지에서 키우느라 나는 일할 형편이 못 되었고 이제 막 공부를 마친 남편이 받아오는 월급은 예상보다 적었다. 푼돈이면 되는 아이들 군것질거리도 망설이며 사주던 시절, 팔자마자 오르는 집값과 사자마자 떨어진 집값, 그 낙폭과 오름폭 사이에서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처음으로 남편과 큰소리로 다투기도 했던 것 같다. 남편이 신중하게 결정하자고 할 때마다 ‘내가 다 알아봤다’고 장담하며 다분히 밀어붙였으니 내 책임이 컸다. 손실을 본 액수는 푼돈도 아쉬웠던 젊은 부부가 서로 그럴 수도 있다며 다독이기엔 너무 큰 짐이었다.


아이를 재우고 깊은 밤 설핏 눈을 떴을 때 옷도 갈아입지 않고 벽에 기대앉은 남편이 눈에 들어왔다. 어둠 속에서 문틈으로 가느다란 불빛만 흘러들어와서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떨어뜨린 고개에 어쩐지 힘이 없어 보였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밤늦게까지 일하면 뭐하냐고, 대출은 언제 갚냐고 푸념했다. 이불을 뒤집어썼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가 지쳐 보이는 만큼 죄책감의 크기도 커졌다. 매도와 매수 시점을 잘못 판단한 탓에 가정 경제에 먹구름이 드리워졌다는 자책을 끝없이 되풀이하던 힘겨운 밤은 몇 번의 계절이 바뀔 때까지 한참 이어졌다.


집 매매를 앞두고 오래전 그 일이 떠올랐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고민이 더 깊어졌다. 제값을 받고 팔아야 우리도 좀더 비싼 신도시 집을 살 수 있었기에 잘 파는 것도 중요했다. 헐값에 팔고 비싸게 샀다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가.

이번엔 신중하게 잘해야겠다고 다짐했지만 구도심에 위치한 집이 생각보다 바로 팔리지 않으니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청약에 계속 떨어져서 반쯤 포기하고 있다가 한 가닥 희망이 생겼는데 이렇게 계속 기다리다가 신도시 집값이 먼저 올라 버리면 다시 원점이었다. 처음에 유령도시가 될 거란 신도시가 '어어?' 하는 사이에 집값이 분양가 두 배로 뛰는 걸 목격한 입장에서 마냥 느긋할 수가 없었다. 저녁을 먹다 남편에게 지나가는 말로 이런 걱정을 내비치니 그가 못 마땅한 듯이 말했다.


"행여 집 팔리기도 전에 먼저 사놓을 생각하지 마. 그랬다가 애 먹었던 거 기억 안 나? 냉큼 집은 사놨는데 팔려는 집이 안 나가면 얼마나 초조한 지 잊었어? 그러다 손해 보고 팔아서 대출 갚느라 고생했잖아."

10년도 더 지난 일을 그렇게 꼭꼭 기억하고 있다가 불쑥 말할 줄은 몰랐다. 맞는 말인데 서운한 마음이 밀려들었다.

"그때 내가 좀 밀어붙이긴 했어도, 결정은 나 혼자 했어? 당신도 결국 동의한 일이었잖아. 잘 되면 내 덕이고 못 되면 조상 탓이라더니, 결과적으로 손해를 봤다고 해서 그렇게 말하는 거 너무 서운하다. 나도 잘해보려고 애썼는데 잘 안 된 거였잖아."


집을 사게 될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들떴던 마음이 차갑게 식었다. 남편도 뭐라 더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갑자기 식탁을 둘러싼 공기가 심상치 않자 아이들도 눈치를 보며 말없이 밥을 먹었다. 새 집을 살 기대에 부풀어 시작했던 대화가 왜 이 모양이 됐지? 문제가 되는 게 매매 순서인지, 남편과 나의 대화방식인지, 결국 끝에 가서 모두를 우울하게 만드는 돈인 건지, 속이 얹힌 것 같아 밥도 들어가지 않았다. 저녁도 다 안 먹고 부동산 시세를 알아보려고 동네 부동산 카페에 들어가니 우리 부부랑 똑같은 문제로 다투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번에 집값이 요동치면서 저희 부부 사이에 갈등이 끊이지 않아요. 저는 이 기회에 갈아타고 싶은데 남편은 섣불리 집을 판 후에 괜찮은 집을 구하지 못하면 어쩔 거냐고, 먼저 집을 사놓아야 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요즘 부동산 시장 분위기가 좋아도 전 그렇게 하면 마음이 급해져 내 집을 헐값에 팔게 될 수 있으니 반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시간 끌다 내 집은 안 오르고 이사 갈 동네 집만 오르면 어떻게 하나 내심 걱정도 됩니다.’


‘집 문제 때문에 아내랑 자주 다퉈요. 며칠 전에 아내가 신도시 집을 보고 와서는 뭐에 홀린 것처럼 그 집을 사자고 난리네요. 부동산에서 이 가격에 나온 건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라고, 가을 되면 최소 몇 천은 올라 있을 거라고 바람을 넣었나 봐요. 지금 사는 집은 후끈한 시장 열기에서 좀 소외된 곳이라 쉽게 팔리지도 않을 텐데 우리 형편에 무리하게 신도시의 비싼 집을 샀다가 돈이 모자라면 어떻게 하려는지 답답해요."


많은 사람들이 정답을 원하지만 누가 대신 알려줄  있을까? 당신은 매수를 먼저 하세요,  옆에 당신은 매도를 먼저 하시고요.  일도 아닌데 이렇게  부러지게 말해줄 타인을 만나기는 힘들 것이다. 아니, 오히려 너무 단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경계해야 할지 모른다. 물론 고수는 있다. 내가 기억하는 부동산 고수는 집을 여러  사고팔며 부자가  자산가나 유명 재테크 강사가 아니라 조금 엉뚱하게도 박완서 작가의 어머니다. 그분이 재테크 책을   물론 아니고 <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라는 박완서 작가의 산문에서 잠깐 언급되었을 뿐이다.


작가의 어머니는 1953년, 살고 있던 집이 팔리기도 전에 하숙을 목적으로 다른 동네에 덥석 집을 산다. 박완서 작가가 어머니에게 ‘그러다 우리 집이 더디 팔리면 어쩌려고’ 집을 샀냐고 걱정하지만 어머니는 ‘올케가 차곡차곡 모아 온 돈을 쥐고 있으니까 겁날 게 없다’고 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어머니 덕에 집안 재산이 크게 불었다. 때마침 단행된 화폐개혁과 남북 양측이 휴전을 조율하고 있다는 소식에 집값이 엄청나게 폭등한 것이다. 어머니는 ‘오래 살다 보니 이승만 박사 덕을 볼 적이 다 있다는 식으로 신기’해하며 ‘육이오 때 국민들은 내버려 두고 혼자 도망갔다 와서 뭘 잘했다고, 사과를 하기는커녕 양민을 빨갱이로 몰아 가두고 죽이기 바빴다고 줄곧 욕하고 미워만 하던 늙은 대통령하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화해’하기에 이른다.


정부가 떠나가 버린 서울에서 공포와 굶주림을 견디며 결국 아들까지 보내버린 작가의 어머니는 어떤 마음이셨을까? 감히 짐작건대 모든 걸 놔버리고 싶은 순간도 있지 않으셨을까? 하지만 딸과 며느리, 손자들을 건사해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 그래도 살 길을 찾아 먼저 집을 사놓으셨다. 그 시대에 어디에서 재테크 강의를 듣거나 책을 보셨을 리도 없는데 순전히 자기 삶의 촉에 의지해서 대담한 선택을 하셨다. 그분만 한 고수가 없다고 느끼는 까닭이다.


전시 상황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에서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은 사실 매우 제한적인지 모른다. 준비도 안 됐는데 오는 생명을 막을 수 없었고 안타까운 젊은 생명이 가는 것도 막을 수 없었다. 종잣돈을 불리고 싶었던 새댁이 재테크 서적을 탐독하고 부동산을 쫓아다녔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제 부동산 시장에서 우린 완전히 소외된 줄 알았는데 세월이 흘러 뜻밖에 신도시 집을 살 기회가 주어졌지만 남편이 10여 년 전 기억을 소환해 갈등을 빚었다. 힘들었던 기억을 남편 머릿속에서 지울 수도 없는 노릇이니 평화로운 대화를 통해 합의점에 도달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아마 매수 먼저 하기 위해서는 남편과 수없이 언쟁을 벌이고 밥 먹다 체할 것 같은 식탁 풍경을 자주 연출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싸우면서까지 매수와 매도 순서를 짜고 싶지 않았다. 내 예상이 빗나가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꼴이고, 내 예측이 맞아떨어져 돈을 남긴다 해도 그 과정에서 관계는 분명히 손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통제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면 내 마음이 상하지 않고 중요한 관계가 훼손되지 않는 게 먼저다.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인지 인생 앞에서 제아무리 영악한 척 순서를 짜 봐야 우린 그의 손바닥 안일 뿐이다. 오늘의 선택을 내일 후회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가장 먼저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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