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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Mar 23. 2022

그놈의 약자 타령


그놈의 약자 타령 지겨워요.


짧은 댓글이었지만 충격이었다. 사회 부적응자들이 약자를 향해 여과되지 않은 적개심을 아무렇지 않게 쏟아내는 일베 같은 사이트가 아니었다. 평범한 동네의 맘카페에서 본 댓글이었다. 맘카페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어쨌든 최소한의 정규 교육을 받고 사회에서 정상 궤도라고 두른 선 안에 존재하는 사람들이다. 처음에는 장강명 작가의 <댓글 부대>에 나오는 '댓글 알바'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녀가 차곡차곡 써온 게시물을 보니 고만고만한 또래의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였다. 길거리에서 마주쳐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의 일상이 그려졌다. 그런 사람이 복지국가에 대한 논의가 나오자마자 약자 타령 지겹다고 댓글을 달았다.


어릴 때 옷이 더럽고 머리를 못 감는 친구가 짝이 돼도 차마 손 높이 들고, "선생님, 얘 냄새나니까 싫어요! 바꿔 주세요!" 그런 말을 하는 친구는 없었다. 열 살도 채 안 된 나이지만 안다. 그런 생각이 들어도 그 말을 입 밖에 내면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낀다. 그게 상대에게 얼마큼 깊은 상처가 될지, 그러니 함부로 그런 말을 내뱉으면 안 된다는 걸 누가 알려 주지 않아도 그 어린아이들도 잘 알고 있다. 오히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은 더 무지해져서 자기보다 조금이라도 힘이 없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만나면 '갑질'을 하며 유치하게 굴지만, 어린 시절 짝꿍을 함부로 모욕하는 아이는 드물다.


그 댓글을 본 순간, 옆 짝꿍이 더럽다며 번쩍 손 든 아이를 본 것처럼 공연히 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물론 본인이 얼마나 완벽하게 깔끔하고 깨끗한지는 모를 일이다. 자신은 '사회적 약자'에서 평생 비껴 살 거라는 자신감은 어디에서 근거하는지 물어보고 싶다. 당장 그녀의 어린 두 아이는 이 사회에서 약자다. '노키즈존'이라며, 떠드는 어른들은 참아줘도 아이들은 못 참는 상점이 있고, 전셋집을 구할 때에도 "집주인이 어린애들과 반려동물 없는 집으로 해달라고 했어요"라며 대놓고 싫은 내색을 하는 부동산 사장님도 있다. 칭얼대는 아이들을 데리고 지하철이라도 타면 '맘충'이라고 누군가가 밑도 끝도 없이 보내는 혐오의 말을 견디기도 해야 한다.


정녕 그녀는 한 번도 약자의 위치에 서보지 않은 건가? 그녀가 생각하는 약자는 대체 누구고 아직도 복지 중진국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사회가 무슨 약자 타령을 그리 했다는 걸까?


Photo by Andre Hunter on Unsplash


평범한 사람들이 복지국가에 대해 혐오에 가까운 거부감을 느끼며 신자유주의의 경쟁 논리를 적극적으로 내면화하곤 한다. 김만권 작가의 <새로운 가난이 온다>에서 그 이유를 두고 세계적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분석한 내용이 나온다. 선진국의 무거운 세금을 내는 데 지친 일부의 반발이 있다는 지적과 더불어 눈여겨본 내용은 복지국가 수혜를 받고 자란 세대가 지닌 특성이다. 복지 국가에서 태어나고 성장하며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된 다수 중산층이 자신들은 더 경쟁해서 더 잘살 수 있다고 지나친 낙관을 했다는 점이다.


산업사회 초기에는 극도로 빈곤한 계층이 많았고 이들에게 사회 안전망을 제공하지 않고서는 결국 사회 전체가 불안해질 수 있다는 데 중산층도 동의했다. 복지국가 초기의 중산층과 달리, 오히려 수혜자로 자라난 다음 세대가 더 많은 물질적 욕망을 채워달라며 복지 사회를 걷어차고 경쟁 사회를 옹호한 결과가 예를 들어 블레어리즘이다. 그 블레어리즘이 할퀴고 간 상처를 그린 영화가 <나 다니엘 블레이크>같은 작품이다. 영화에서처럼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사람들은 굶고 아프고 죽어나간다.(저자가 지적했듯 우리의 경우엔 복지 국가 경험도 없이 민영화와 민간 위탁의 시대로 넘어갔다는 게 다르다.)


쉽게 말해 밑바닥 삶을 경험해 보지 못한 이들의 낙관이 "복지 따위는 필요 없어"란 구호로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사회적 약자란 먼 이야기고 자신은 결코 그들과 같이 될 생각도 없고, 그럴 일도 없으니 더 살벌한 경쟁에서 이기고 과실을 독차지하는 승자가 되고 싶었던 건가. 그러고 보니 "약자 타령 지겹다"는 그녀가 사회적 약자를 가까이에서 경험해 봤는지 궁금해진다.


돌이켜보면 80년대 개발 시대를 관통하면서 초등학생이었지만 극명한 빈부 차이를 실감했다. 고급 아파트가 밀집한 동네였지만 한쪽 편에는 무허가 판잣집이 즐비했다. 한 반에 유력 정치인 아버지를 둔 부잣집 친구도 있었지만 무허가 판잣집에 사는 친구도 같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그 부잣집 아이랑도 놀고 무허가 판잣집 아이랑도 비교적 스스럼없이 놀았다. 부잣집 친구라고 해서 특별한 존재가 아니듯 판잣집에 사는 친구라고 해서 이상하거나 부족하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물려받은 해진 옷일지언정 그 아이는 단정히 입으려 애썼고, 친구들이 놀러 오면 냉장고를 뒤져 야쿠르트라도 줄 만큼 마음 씀씀이도 살가웠다.


가끔 사회적 약자나 빈곤층을 뭉뚱그려 그들이 무임승차만 바라는 '기생충'인 것처럼 막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책장에 칸칸이 꽂힌 책을 부러워하며 "한 권만 빌릴 수 있어?" 조심스레 묻던 그 친구가 떠오른다. 그 아이나 그의 부모에게서 무임승차만 바라는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의 흔적 같은 걸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그냥 사람들이었다. 나처럼 다음날 있는 반 대항 피구 시합을 기다리고 부모님이 싸우면 걱정하며, 부잣집 친구가 아빠가 미국에서 사 온 인형을 자랑하면 부러워하던-당시만 해도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이었으니-평범한 같은 반 친구였다.


어느 날 거짓말같이 판잣집이 다 헐렸다.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 베란다로 나가보니, 지금 생각하면 '철거 깡패'란 사람들이 집을 때려 부수고 있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집기를 내던지고 몽둥이로 집을 부수었다. 누군가는 소리치며 그들을 말렸고 누군가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울었다. 그 친구 집도 사라졌고 소식은 알 수 없었다.


90년대 초까지도 철거 과정에서 용역 깡패를 썼다. 건설업체의 비호와 관의 묵인을 받으며 그들이 저지른 만행을 훗날 대학생이 되어 알게 됐을 때 그 친구가 떠올랐다. 책 한 권도 조심스레 빌려가던 아이다. 살던 집이 헐리고 세간살이가 아무렇게나 내동댕이치는 광경을 보고도, 엄마 아빠가 용역 깡패에게 맞거나 끌려가는 걸 보고도 그때처럼 단정하고 참한 표정으로 계속 살아갔을까? 유년에 새겨진 상처를 회복할 새도 없이 성인이 된 것도 숨찬데 또 누군가에게 언급하기도 지겨운 "약자"가 되어 수모를 당하지는 않았을까?


지그문트 바우만의 분석에 감히 곁들이자면, 우리 삶이 경쟁 논리에 휩쓸리며 각박해진 건 우리가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연민이나 공감 능력을 다 같이 한날한시에 잃게 된 것은 아닐 거다. 타인의 서글픈 사연 따위, 나와 상관없다는 생각이 독버섯 자라듯 우리 마음 안에 서서히 퍼져나갔을 것이다. 서로 금 긋고 밀어내며 배척해온 결과다.

고급 아파트 주민들이 임대 아파트 아이들은 놀이터에 들어오지 못하게 철조망까지 둘렀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행여 자기 아이가 그 아파트 아이들과 친구가 될까 봐 그랬다고 한다. 철조망으로 둘러싼 앙상한 마음 안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욕망을 아무리 채워 넣어도 타인은 물론 자신조차 행복하기 힘들다는 걸 모르는 것 같다. 이기적인 마음의 그릇에는 담을 수 있는 행복의 크기도 작다는 걸 잊고 사는 것 같다.


아직 제대로 도입하지도 않은 복지 사회에 대한 논의마저 거부할  가장 먼저 무너지기 시작하는 이들은 사회적 약자다. 하지만 부실한 사회 안전망으로 망가지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결국  사회 전체가 흔들리게  것이다.

약자 타령이 지겹다는 댓글이 서늘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것이 종내는 사회 전체에 균열을 내는 혐오와 배척이란 생각이 들어서만은 아니다. 타인을 향한 근거 없는 적의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생각조차 않는 몰지성의 시대를 살고 있음을 실감케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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