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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Apr 08. 2022

엄마도 집에 있기 아까운 사람이야


사람들은 부모의 은혜가 넓고 깊다 하는데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게 넉넉한 품을 지닌 부모를 만나지 못했다. 내가 입은 정서적 상처가 학대인지 아닌지 오랫동안 고민했는데 오은영 선생님 강연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내가 학대라고 느꼈으면 학대라고. 많은 부모들이 '나는 네가 미워서 그런 거 아니었어. 그때는 화나서 그런 것일 뿐 진심이 아니야'라고 쉽게 말하지만 더 약자인 아이 입장에서 학대라고 느꼈다면 그건 학대다. 부모는 아이의 감정을 두고 시비를 가리면 안 된다고 오은영 선생님이 강조했다. 이 말이 참 위로가 됐다.


살다 보면 누군가의 말이 쩍쩍 갈라진 메마른 가슴에 한 방울 빗물처럼 스며들면서 위안을 줄 때가 있다. 나랑 전혀 친분이 없는 강연자의 한 마디일 때도 있고 가장 가까운 사람의 한 마디일 때도 있다. 얼마 전 큰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면서 예전에 기간제 교사로 근무할 때 만났던 선생님 이야기를 했다.


"나보다 나이는 한참 많으셨는데 되게 멋진 선생님이었어. 공부도 잘해서 명문대 영문과를 나오고 미국 대사관에도 근무하셨지. 그런 것 말고도 인품이 참 좋으셔서 의지가 됐어. 기간제 교사지만 학생들한테 인기도 많았어."

"지금도 연락돼?"

"아니, 지금은 연락 끊어졌는데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하다. 능력 있고 똑똑한 선생님이었는데 가끔 훨씬 더 아래인 젊은 선생님들 중에 공연히 그분한테 심술궂게 구는 사람도 있었어. 기간제치고 학력이나 경력이 너무 좋아서 샘을 내는 건지 뭔지. 그 선생님 보니까 아깝더라. 집에 있기도 아까운 분이고, 운신의 폭이 좁은 기간제 교사하기도 아깝고."


잠깐 가만히 있던 아이가 고개를 돌려 운전하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엄마도 아까워. 엄마도 똑똑하고 능력 있어."


때마침 학교에 도착해서 뭔가 대꾸할 말을 찾기도 전에 아이가 훌쩍 내려 버렸다.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총총걸음으로 들어가는 아이 뒷모습을 보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내가 별로라고 해도 엄마를 전적으로 지지해 주는 아이가 있다는 게 천군만마를 얻은 것처럼 마음이 든든했다.


그날도 이렇게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하필이면 우산도 없었다. 그때만 해도 장롱면허인 데다가 내 차도 없어서 기간제 교사로 일하는 학교에 버스를 타고 다녔다.

정년이 보장된 멀쩡한 직장에 사표를 내고 남편을 따라 지방으로 내려오면서도 별로 두렵지 않았다. 일자리를 새로 구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그러나 현실은 냉정했다. 서울에도 일자리 없다 하지만 지방 도시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공무원, 교사, 은행원 정도였다.


친구들은 아이 키우고 나서 출판사나 잡지사에도 재취직하고 중견기업에도 나가는데 내가 사는 곳에서 그런 일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많은 이들이 예견했듯, 결혼이나 출산으로 경력에 공백이 생긴 여자는 숙련도가 낮은 노동 시장으로 눈높이를 낮춰서 재진입하거나 불안정한 비정규직으로 들어가야 했다. 정규직 일자리를 갖기 위해 그렇게 부단히 애써 놓고 결혼과 출산이란 문턱 앞에서 결국 사표를 낸 나를 탓해 봤자 돌이킬 수 없었다.


그나마 아이들이 조금 컸고 약간의 경력이라도 있으니 기간제 교사라도 할 수 있었다. 학생들은 예뻤지만 잘못을 해서 혼내기라도 하면 들으란 듯이 "기간제 교사 주제에"라며 비아냥거리는 버릇없는 아이들도 가끔 있었고, 선생님들은 대체로 친절했으나 한 교무실 안에서도 대등한 동료로 대해주지 않는 순간이 자주 찾아왔다.

Photo by Christina Rumpf on Unsplash

부슬거리며 떨어지는 비라고 하지만 버스 정류장까지 내리 맞으면서 가기엔 한참이었다. 구두 신고 전력 질주로 뛰어가기도 힘들 것 같았다.


"아, 어떡하지? 우산도 없는데?"

창 밖을 보며 혼자 중얼거리듯 말한다는 게 너무 큰소리를 내뱉어 버렸다. 몇몇 선생님들이 계셨는데 정류장까지 태워달라거나 우산을 빌려달라거나, 뭘 부탁하고 싶어서 꺼낸 말은 아니었다. 조용한 교무실에 내 목소리가 민망할 정도로 퍼져버렸는데도 누구 하나 고개를 드는 사람이 없었다. 퇴근 시간이 되자 다들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떴다.


'차라리 말을 하지 말걸. 괜히 뭐 바라고 말했다가 거절당한 기분이네.'

혼자 터덜터덜 비를 맞으며 걷는데 처량했다. 비 같은 게 뭐 대수라고 그렇게 기분이 가라앉는지 모를 일이었다. 예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느꼈던 보람이나 만족감이 떠올라서 더 그랬을 거다. 그때도 크고 작은 어려움은 있었지만 대놓고 투명인간 취급당한 적은 없다. 갈등은 있었지만 대등한 직장 동료였고 '나 오늘 우산 없는데?' 말 떨어지기 무섭게 '아, 그럼 내 차 타고 가' 내지는 '우산 있는데 빌려줄게' 같은 말이 나왔던 것 같다.


'후, 누굴 탓하겠어. 사랑에 눈이 멀어 다 버리고 온 내 탓이지.'


자기가 다 책임진다며 주말부부는 안 된다고, 결혼하면 같이 살아야 한다고 우기던 남편은 막상 내가 전업주부가 되자 육아와 살림에 더 신경 쓰기를 바라는 잔소리꾼이 되었고 시어머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있는 네가 남편 신경 써야지'라고 말하며 내조를 강요했다. 전화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남편 건강을 어떻게 챙겨야 한다는 훈계가 이어졌다. 어쩌다 만나는 사람들이 '집에서 종일 뭐해? 할 일 없어 심심하겠다'와 같은 말을 쉽게 내뱉을 때마다 어디서부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득한 기분이 들곤 했다.


한때는 그 세월이 억울하다고만 생각했다. 이런 삶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고. 적어도 학교 다닐 때 말썽 안 피우고 제법 모범생으로 살았으며 힘들게 취직했어도 친구들이 너도나도 사는 명품 한번 안 사고, 해외여행 한번 안 가고, 그렇게 성실하게 산 내가 홀대받고 살 일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경로를 벗어난 삶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나는 절대 무시당하지 않고 대접받으며 살 거란 착각도 안 하게 됐고, 내가 아픔을 겪은 만큼 남에게 더 관대해지고 타인의 마음을 한 뼘 더 헤아리게 되었다.


무엇보다 고군분투하는 내 모습에 응원을 보내는 아이들을 얻게 된 것. 언젠가 작은아이가 말했다.


"예전엔 엄마가 결혼해서 직장도 없어지고 친구들도 연락 끊어졌다고, 잃은 게 많다고 한탄하는 거 보면서 같이 힘이 빠졌는데 이제는 엄마가 달라진 거 같아. 오히려 엄마처럼 나이 들어도 새로운 걸 시도하고 해낼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어. 책도 두 권이나 내고. 그런 거 보면 나도 얼마든지 뭔가 해낼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생겨. 엄마가 나이 들었다고 그냥 주저앉지 않고, 잘 되든 안 되든 계속 뭘 도전하는 게 나한테도 힘이 돼."


엄마도 충분히 아깝다는 큰아이. 엄마를 보며 힘을 얻는다는 작은아이. 친정 부모랑 여전히 살갑게  지내는 사람들을 마음 깊은 곳에서 부러워할 때가 있었다. '부모복'이라는 것도 있는 건가 싶었다. 어릴  부모에게 살뜰한 보살핌을 받은 사람들은 태가 난다. 허름한 옷을 입어도 반짝거리고 혹여 궁핍하게 살아도 여유가 있어 보인다. 그런 인생은 어떨까 몹시 궁금하고 부러웠다.


하지만 요즘은 부모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과 인정, 이해와 공감을 내 아이들에게 넘치게 받는다는 생각이 든다. 자식을 키우며 희생한 게 많다지만 자식에게 받는 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깊고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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