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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Apr 15. 2022

가끔 다른 사람이 네 엄마면 어떨까 생각했어

가끔 생각했어. 부모한테 사랑 듬뿍 받고 구김살 없이 큰 사람이 네 엄마면 어떨까. 거의 반백년을 살아놓고도 아직도 유년의 상처랑 싸워야 하는 나 같은 사람 말고 좀 더 따듯하고 화사한 사람이 너의 엄마였다면, 어린 너를 그렇게 많이 울리고 외롭고 슬프게 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너 어렸을 때, 그때 너무 힘들었어. 된장찌개 한번 끓여 본 적 없이 그저 공부하고 직장 다니던 내가 갑자기 낯선 곳에서 출산과 육아, 살림을 떠안은 것도 힘든데 그 힘든 마음 한 조각을 나눌 사람 하나가 없었어. 늦게 공부를 마치고 입사한 너희 아빠는 자기도 새로운 직장 생활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었지. 그 와중에 시어머니는 왜 그리 전화를 자주 해서 나를 채근하고 닦달하던지. 지금 같으면 적당히 피했을 텐데 그때만 해도 어렸지. 나한테 내던지는 온갖 감정 쓰레기를 요령도 없이 다 받아 안았어.


그리고 참으로 부끄럽게도 그 스트레스를 어린 너한테 막 쏟아냈어. 지금도 이 생각하면 눈물 나고 부끄럽다. 엄마가 왜 화났는지 영문도 모른 채 노여워하는 내 표정에 겁먹고 뒷걸음질 치던 어린 너. 내가 그 시절 이야기를 하며 미안하다고 하면 넌, "나 다섯 살 때 이야기 또 하는 거야? 엄마가 말한 그 사건은 잘 기억도 안 나. 괜찮아."라고 말하며 오히려 날 위로해 줬지.


그러다 어쩔 때는 투정도 부리긴 했어.


"난 말이야,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릴 때 엄마가 나를 차갑게 외면했을 때 상처가 깊었나 봐. 지금은 엄마가 나한테 참 잘해주는데도 어느 순간 엄마가 내게 냉랭하고 무심하다 느껴지면, 분명히 그렇게 서운할 일이 아닌데도 눈물이 날 만큼 서럽고 슬퍼. 사소한 일로 내가 왜 이렇게까지 동요하지, 생각해 봤는데 어릴 때 상처가 건드려져서 그런 가봐.


내가 이런 걸로 슬퍼하는 게 어쩔 때는 엄마한테 미안해. 엄마도 불쌍한 사람인데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하는 것 같고. 엄마는 선생님이었던 외할머니가 너무 엄격하고 무섭게만 대했다며. 잘못한 것도 없는데 때려놓고 사과한 적도 없고, 힘들 때 위로해 준 적도 없다며. 그에 비해 난 엄마한테 사과도 많이 받았고 나 힘들 때마다 엄마가 제일 많이 다독거려줬으니, 나 어릴 때 일로 엄마를 원망하면 안 된다고 생각은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안 될 때가 있어.


Photo by Diana Polekhina on Unsplash

하지만 어쩔 때는 그런 생각도 들어. 엄마가 외할머니 같은 사람은 아니니까 내가 엄마한테  다정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지니는 것도 잘못된  아니지 않을까? 엄마는 좋은 사람이고, 좋은 엄마니까 나를   다독여주기를 요구할 수도 있는  아닌가 하는 그런 마음?"

그러면서도 불행한 유년을 보낸 엄마가 안쓰러워 네가 더 참아야 할 것 같다로 결론을 내곤 했지.


그 얘길 듣고 내가 뭐라고 했더라. 아마 내 문제를 갖고 너한테 감정적인 짐을 지운 게 아닌가 생각했던 게 먼저일 거야. 엄마가 내 얼굴에 걸레를 던진 거나, 다리에 피가 나도록 때린 것, 그런 것까지 말하지는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도 했지. 그러면 넌 정말 엄마가 불쌍해서 자식이면서도 엄마한테 모든 걸 양보하려 들었을 테니까.

네가 많이 컸다고 생각해서, 그리고 어차피 외가 가면 너도 자연스레 느끼게 되니까 내 어린 날의 불운을 말했던 건데 의도치 않게 마음의 짐을 지운 것 같아 미안하다고 말했어.


자식은 부모를 불쌍하게 여기면 안 된다고도 말했지. 자식은 그저 부모 품이 한없이 넓고 편안하고 따듯해야 한다고. 세상 모두가 날 욕해도 이 품 안에선 마음 놓고 쉬고, 생기를 회복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그런데 부모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끼어들면 그렇게 할 수 없으니 앞으론 엄마가 너한테 부담되지 않게 그런 이야기를 자제하겠다고 했어. 행여 부담스러운 이야기를 내가 무심코 꺼내도 안 듣고 싶으면 바로 말해 달라고. 나와 외할머니 관계에서 비롯된 문제는 너와는 아무 상관없고 거기에 대해 네가 손톱만큼도 신경 쓸 필요 없어. 그건 너와는 별개의 문제야.


내 말에 네가 알겠다고 했지만 아직도 가끔 내가 외할머니 일로 속상해하지 않는지, 다정히 살피는 너의 눈길이 느껴져서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그래.


오늘 네 책상 맞은편에 붙어 있는 메모들을 봤어. 김수영 시인의 <사령>을 단정한 글씨로 써서 붙여놨더구나. 좋아하는 책이 있고, 그 책에서 인상 깊은 구절을 옮겨 써서 붙이는 네가 좋아. 음악 시간에 배운 드뷔시의 <달빛>이 너무 특이했다며, 불협화음이 주는 몽환적이고 신비한 분위기를 사랑하는 네가 좋아.


열 살 때 처음으로 혼자 타 본 버스에서, 두 아이를 데리고 탄 애기 엄마한테 자리를 양보해 주고 기분이 좋았다고 말하던 네가 좋아.


대학 들어가면 할아버지네 자주 못 갈 것 같다며, 며칠 안 되는 고등학생 방학인데 그중에 사흘을 혼자 할아버지 집에서 보낸 네가 좋아. 그렇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혹여 편찮으시기 전에 많이 챙겨드리고 싶다고 어른스럽게 말하는 너도 좋지만, 할머니에게 같은 여자면서 여자를 존중하지 않는 가부장적인 태도는 불편하다고 말하는 용감한 너도 좋아. 결국 할머니랑 속 터놓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할머니에게 노력하겠다는 대답도 들었지. 갈등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히며 관계를 오히려 더 친밀하게 만든 너를 보며 엄마가 많이 배웠어.


엄마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너에게 고맙기도 해. 학교에서 정법 시간에 사형제도를 갖고 토론을 벌였을 때, 내가 식사하면서 별 뜻 없이 책에서 말해준 내용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발표했던 네가 대견했어. 사형제도 반대근거로서, 집행관들의 트라우마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더구나. '사형제도가 생기면 누군가는 집행해야 하는데, 자기 손으로 반복적으로 사람을 죽이는 데서 오는 정신적 고통으로 평생을 괴롭게 사는 집행관' 이야기에 선생님이 여태껏 누구도 말하지 않았던 근거를 말했다고 칭찬해 줬다며 뿌듯하다고 했어.


엄마가 똑똑하고 공부도 많이 한 덕을 자기가 보는 것 같다며 부스스 웃던 너. 그리 잘난 것도 없는 평범한 엄마의 이야기를 잘 기억했다가 발표도 하고. 너의 그런 태도를 보면 그만큼 날 믿는 것 같아서 더 열심히 살고, 더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어쩌다 너에게 이런 걸 물으면 질색하지.


넌 참 좋은 아이니까 나 같은 엄마 말고, 더 다정하고 배려 깊으며 온화한 사람이 엄마면 어떻겠냐고. 내가 농담처럼 묻지만 사실 조금 떨리는 거 모르지? 혹시라도 대답을 망설이면 어떡하지? 내가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고, 화내고, 말도 안 되는 억지로 너 힘들게 했던 거 다 기억하면 어떡하지? 엄마가 이 세상 전부였던 어린 너에게 줬던 지난날의 상처들, 네가 떠올리면 어떡하지? 내 부모에게 받아본 적 없는 사랑을 준다고 애쓰다 지쳐버린 어느 날, 공연히 너에게 한스런 화풀이를 했던 것까지 다 기억할까? 그런 생각하면서.


하지만 그럴 때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라며, 난 그냥 내 엄마가 좋다고 정색하는 너. 부족한 엄마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 나도 정말로 사랑한다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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