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성한 여주인공에겐 이혼이 답인가

by 은수


컴퓨터 파일을 정리하다 대학교 때 쓴 과제를 발견했습니다. 문예 창작론 시간에 쓴 과제였는데 짧은 콩트였어요. 할 일이 많았지만, 도입부를 읽으니 뒤가 궁금해서 끝까지 읽어 버렸는데요, 간추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지하철에서 갑자기 내가 노라를 만난다.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에 등장하는 노라가 지하철 플랫폼에서 열차가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지친 얼굴로 낡은 코트를 입고 있었지만 눈에는 생기가 넘쳤다. 그녀를 알아본 내가 놀라서 말을 걸고, 그녀와 많은 대화를 주고 받았다. 노라는 집을 나간 자신을 향해 사람들이 훈수를 둔 걸 잘 알고 있었다.

19세기 후반, 더 이상은 남편의 인형으로 살지 않겠노라 선언하고 무작정 집을 나간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이 뭐 있겠냐며, 사람들은 그녀가 사회 가장 밑바닥 인생을 살고 있을 거라고 수군거렸다. 조롱인지 걱정인지 모를 그들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지도 않았고, 또다시 누군가에게 기대 살지도 않는다고 당차게 말했다. 그러고는 지하철이 왔다며 총총걸음으로 사라진다. 안 그래도 여자에게 결혼이 무엇인지 고민하던 나는 그녀와 헤어져 지하철을 타고 오는 길에 깊은 생각에 잠긴다."


지금 읽으니 서툴지만 누구 눈치도 보지 않고, 맘껏 상상하고 도전하는 내가 보였습니다. 혹여 이상하거나 유치해 보일까, 신경 쓰지 않고 난데없이 첫 장면부터 노라를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대범한 전개가 현재의 나와 달라서 내 글인데도 낯설었습니다. 그리고 행간에서 결혼을 향한 부정적인 시선도 엿보였어요. 그때는 결혼은 가부장제 안에 제 발로 들어가는 어리석은 선택이라고 여겼습니다. 연애와 결혼을 경계했어요.


그래놓고 10여 년 뒤 전업주부가 되었지요. 가정과 사회는 예상보다도 더 전업주부에게 매몰찼고 굴욕감을 느끼는 상황은 수시로 생겼습니다. 한 가지 사건으로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했는데 다음 사건이 또 찾아왔어요. 신용카드 하나를 만들 때에도 상담원이 남편에게 전화를 해 동의를 구했으며, 시어머니는 대놓고 '돈도 안 버는 네가 남편 내조라도 잘해야 한다'고 훈계했습니다. 잘 다니던 직장을 남편과 사느라 어쩔 수 없이 그만둔 건 누구도 애써 기억해 주지 않았어요. 아이들을 키우고 뒤늦게 두드린 취업 문은 경력단절녀에게는 쉽사리 열리지 않았고 '엄마'는 어떤 경력도 되지 못했습니다. 나와는 멀게 느껴진 홀대와 무시가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점령해 왔습니다.


서툴고 유치한 글을 쓴 20년 전 나와 견줘 지금의 나는 더 현명해졌을까요. 그때도 이미 인생에 대해 책을 통해 많이 알고 있었어요. 특히 여자의 일생에 대해서는. 어떤 부분이 취약하고 생애 주기상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가부장제와 타협하고, 어느 대목에서 그것 때문에 무너지고 후회할지 정보는 충분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발목 잡는 선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던 걸 떠올리면 전 참 헛똑똑이입니다.


그렇다면 노라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20년 전의 나와 지하철에서 만난다면, 연애도 결혼도 하지 말고 지금 갖고 있는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그대로 밀고 나가라고 조언할까요. 출산보다는 너의 커리어가, 결혼보다는 너의 독립이 더 중요하다고 힘줘 말할까요. 혼자라도 얼마든지 행복할 거라고, 무엇보다 결혼과 출산, 육아로 이어진 긴 터널을 통과해 봤자 얻는 것은 없노라고 이야기하게 될까요.


Photo by S. Tsuchiya on Unsplash

내 선택을 종종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아마 20년 전의 나에게 절대 이 길로 들어서지 말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결혼 생활에 고난의 영역만 있는 건 아니고 즐거움과 친밀감, 사랑과 안정이란 영역이 꽤 크게 자리하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한 번도 꿈꿔 본 적이 없는 길을 걷느라 때론 상실감에 몸부림치기도 했지만, 나를 잃어가는 시간 속에서 오히려 더 치열하게 나를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가만히 두면 내가 소멸할 것 같아서 더 기를 쓰고 나를 붙잡았어요. 꽃길만 걷지는 못했지만, 모난 길도 걸어본 나는 이전의 나와는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20년 전의 나에게 이 길로 오지 말라고 하지 않는 건, 그 다른 존재가 된 내가 싫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같은 흙에 유약을 바르고 같은 가마에서 구워도, 사람 손으로 만든 그릇은 어느 것 하나 똑같지 않지요. 700도에서 800도 사이 뜨거운 열을 통과한 그릇은 고난을 이겨낸 제각각의 사연을 담은 것처럼 자세히 보면 빛깔도 모양도 조금씩 다릅니다.


고난을 겪은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예를 들어 똑같이 호된 가난을 겪어도 이후 삶은 각인각색이지요. 어떤 사람은 가난은 지긋지긋하다며 돈 버는 데 혈안이 되고, 어떤 사람은 그 경험 덕에 사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간신히 취업한 같은 사회 초년생들이더라도, 직장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나 관계를 맺는 방식도 각자 다릅니다. 취업 준비 기간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암흑기라고 여기는 이도 있고, 그때 방황했던 덕에 지금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각성한 여주인공이라면 꼭 이별이나 이혼을 해야 하는 건지 스스로 묻곤 했습니다. 때론 싸우고, 때론 타협하며 내 결혼생활에 드리워진 가부장제 그늘을 걷어내 왔지만 여전히 미진한 구석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저는 각성했다고 이별이나 이혼을 선택하는 인물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중에 나온 책에서 종종 힘든 관계는 끊어라, 이런 사람과는 교류하지 말라고 충고하지만 실제로 우리를 힘들게 만드는 대상은 부모나 자식, 배우자 등 쉽사리 끊을 수 없는 관계로 얽힌 경우가 더 많습니다. 상황에 따라 관계를 끊어내는 것이 자신의 성장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있지만 정답은 하나가 아니겠지요. 모래알만큼 많은 선택지 중에서 자기가 고르면 됩니다.


가부장제 억압이나 폭력을 겪은 여성들의 선택도 같을 수는 없습니다. 노라처럼 가출할 수도 있고, 영화 <델마와 루이스> 주인공들처럼 친구랑 나란히 손잡고 절벽에서 뛰어내릴 수도 있습니다. 자발적인 선택을 하지 못해 길먼의 소설 <노란 벽지> 속 여자처럼(주인공인데 이름도 없네요) 남편과 시누이의 감시 속에 방에 갇혀 점점 미쳐버리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어요. 반대로 영화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속 조안나처럼 알게 모르게 결혼생활에서 자존감을 갉아 먹히다 뛰쳐나와, 치료도 받고 남편보다 더 많은 연봉을 받는 당당한 커리어우먼이 되어 양육권 분쟁을 벌이는 사람도 충분히 있을 법합니다. 운신의 폭이 좁을지언정 저처럼 결혼이란 제도 안에서 불합리와 편견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사람도 있는 거고요.


매년 오는 봄이지만 한 번도 같은 봄이었던 적이 없습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봄이 풍기는 정취는 해마다 같은 듯 달라요. 손바닥만 한 아파트 정원이지만 똑같은 꽃이 피지 않으며 다만 몇 센티라도 더 자란 나무는 작년과는 다른 개수의 잎을 틔우고 다른 모양의 그늘을 드리웁니다.


나의 이야기에는 각성한 여주인공이 성취하는 극적인 드라마는 없지만 부딪치고 또 부딪치며 매일 한 뼘씩 자라는 중년의 성장통이 있습니다. 박완서 작가님의 말을 빌자면 "한 평범한 여자가 꿈에서 깨어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아직도 꿈을 못 버린 이야기"이자 "끊임없이 꿈으로부터 배반당하면서도 끊임없이 새로운 꿈을 창출해내는" 나의 서사가 이제는 싫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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