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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May 16. 2022

아내에게 아메바라고 막말하는 남편


남편 때문에 힘들다며 온라인 카페에 종종 글을 올리는 이가 있었다. 한 번은 명절을 앞두고 돈을 미리 안 찾아놨다고, 같은 말을 몇 번을 반복해야 알아듣고 움직일 거냐고, 남편이 자신에게 '무뇌아, 아메바, 단세포'라고 비난했단다. 마음 아팠던 것은, '저는 왜 몇 번이나 주의를 듣고도 똑같은 실수를 할까요?'라고 자책하는 내용으로 글이 끝났다는 것이다. 누가 봐도 배우자끼리 용인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선 막말이었는데 정작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심한 말을 한 상대보다는 자신의 부주의를 탓하고 있었다. 그녀가 그간 올린 글을 읽어보니 결혼 생활은 불행했고, 그렇게 된 이유를 계속 자신에게 찾으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가스 라이팅인가?'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닌지 남편 말이 심하다는 댓글이 연이어 달리고 그런 남편하고 어떻게 사느냐고 당장 이혼하라고, 앞서가는 조언을 하는 이도 있었다.

10년, 20년, 배우자와 함께 살면서 '이혼'이란 단어를 한 번도 떠올리지 않은 부부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 뒤통수도 꼴 보기 싫어지고 이럴 바에는 이혼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예전에 상담하면서 물어본 적이 있다. 상담사 선생님들은 어떤 경우에 이혼을 권하느냐고. 이혼이란 단어가 떠오를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이 정도 일로 이혼을 하기도 하나? 내가 유난한가?'라는 질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처한 상황을 남에게 물어보고, 이혼해도 된다는 승낙을 남에게 받고 싶어 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마음이 힘들었을 때 선생님에게 질문했다.

"저는 시댁 때문에 오랜 세월 힘들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남편도 바뀌었고 많은 부분이 해결됐는데도 가끔 속에서 뭔가 올라오고, 남편이 조금만 서운하게 해도 마치 건드리면 수면 아래 침전물이 다 우수수 떠오르는 것처럼, 예전에 안 좋았던 기억이 모두 떠오르면서 혼자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죠.

하지만 극단적으로 뭔가 잘못한 것도 없고, 어쨌거나 생활에 건실하고 현재는 나에게 잘하는 남편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나약한 건지 고민스러워요. 상담하면서 '이런 내담자에겐 반드시 이혼을 권한다', '이런 내담자는 결혼 생활을 유지하도록 권한다', 이런 식으로 매뉴얼이 있으신가요?"


Photo by OSPAN ALI on Unsplash

선생님은 빙긋 웃으며 말씀하셨다.

"일단 과거 기억이 다 떠오르면서 힘들다고 느끼는 건 당연한 거예요. 생인손 같은 거죠. 땡땡 부어 있으니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아픔이 확 솟구치는 겁니다. 그러니 남편 입장에선 사소한 말인데 내 감정이 크게 올라온다고 자책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 내가 그때 많이 힘들었고, 그 마음이 아직 다 해결이 안 됐구나, 이렇게 이해하면 돼요. 감정은 초시간적이니까요.

그리고 이혼에 대한 매뉴얼 같은 게 있지는 않아요. 다만, 처음 올 때는 이혼을 결심하고 오셨다가 상담하면서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다는 걸 깨닫고 이혼을 접는 분도 있고, 거꾸로 별로 이혼 생각 없이 왔다가 상담하면서 마음에 힘이 생겨 홀로서기를 결심하는 분들도 있고요."


부부간에 명백하게 분리가 시급한 상황-폭력이나 폭언 등으로 안전이 위협받는 경우-이 아니라면 결국 이혼을 결정할 때 중요한 건 상대가 아니라 나라는 것이다. 상대가 아메바라고 하든, 공룡이라고 하든, 내가 그 말에 끄덕하지 않고 '뭐라는 거야?'라고 무시할 수 있으면 내가 누리는 결혼 생활의 장점을 더 크게 보고 넘어갈 수도 있다. 물론 제일 최상은 그런 말을 하는 배우자가 먼저 바뀌는 것인데 대개의 경우 그런 배우자는 성장 과정이나 자아 존종감에 문제가 있고 그게 부부 관계에서 폭언이나 비난 같은 말로 드러난다. 자기 성찰이 잘 되어 스스로 문제를 깨닫고 고치거나 상담이나 교육을 통해 바뀌면 다행인데, 안타까운 건 자기에게 문제가 있다는 사실조차 잘 모르는 이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바뀌지 않는 배우자를 보며 애태우는 것보다는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 동요하지 않는 나를 만드는 것이 빠를지 모른다. 결혼과 이혼을 저울질하며 끝나지 않는 고민을 하는 것보다는 일단 내면이 단단한 자신을 만들어보고 그다음에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돌이켜보면 나 또한 결혼 생활 초기에 힘들었던 문제 중 상당 부분은 시댁과 남편에게 인정받고 싶어 애태우던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 많았다. 공부하고 직장만 다니던 내가 갑자기 살림하고 육아하면서 아무런 유능감도 확인할 수 없어 자존감이 바닥까지 떨어졌을 때, 중요한 관계라고는 시댁과 남편이 전부였던 그 시절, 나를 향한 그들의 박한 평가는 나에게 내면화되었다.

시어머니가 '네가 나가서 돈 버는 것도 아닌데 살림이라도 잘해야지'라고 꾸짖으면 '다 잘하는 사람이 어딨나요? 전 애들 키우고 나가서 일 잘할 건데 지금은 준비기간이에요'라고 당차게 맞설 수도 있는 문제였는데 한 마디 대꾸도 못하고 '그러게, 난 정말 무능해'라고 금세 납작해졌다.


상담 선생님이 부부는 표면적으로 둘이 살지만, 각자 자기 부모와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있는 경우, 둘이 아니라 여섯이 사는 셈이라고 했다. 상대가 자기 성장과정에서 부모와 풀리지 않은 문제를 안고 와서 나에게 쏟아낼 때, 내가 그의 비난이나 막말에 흔들리지 않으면 상대도 근거 없는 공격을 하는 데 점차 힘이 빠진다고 했다. 타격감이 전혀 없는 공격은 결국 하는 사람도 지치게 만드니까. 내가 납작해지지 않고 꿋꿋한데도 결혼 생활에 변화가 조금도 없다면 그때는 다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남편에게 아메바 소리를 듣고 주눅  그녀에게 긴긴 댓글을 달아줬다. 부부 사이가 좋아 만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상대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기보다는 자신에게 먼저 집중해 보셨으면 좋겠다고. 이렇게 화창한 봄날, 혼자 적막하고 추운 겨울을 사는 그녀가 자책을 멈추고 자신을 돌보길 마음으로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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