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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May 20. 2022

부동산은 어쩌다 주부의 일이 되었나


(A)

성공한 남편을 둔 여성들은 남편에 걸맞는 성공한 아내가 되기 위해 전력투구한다. 아파트 투기, 땅 바람, 골동품 투기 등은 이러한 전력투구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모습들은 남의 이야기일 경우에는 부정적으로 비치지만, 자신의 이야기일 때는 오히려 바람직하게 보이는 법이다. '경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한 부동산 투기는 성공적인 주부 역할의 하나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게 분명하며, 반면에 자신의 정의감 때문에, 혹은 우유부단 때문에 이러한 방법으로 가정의 부를 이루지 못한 대부분의 주부들은 무력감에 젖어 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B)

남편은 자신이 이렇게 아직 내 집이 없는 것을, (재테크를 제대로 하지 못한) 부인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직접 집을 알아보거나 이 일에서 주도권을 잡으려 하지 않는다. 수희 씨는 이런 남편의 압박이 부당하다고 말하면서도 아직 내 집을 마련하지 못한 건 다 자기 탓이라고 여긴다. '여자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투기적 주택장에서 남편이 직장에서 버는 만큼의 이윤을 내지 못한 자신을 책망한다. 이렇게 투기적 주택 실천이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사회 분위기는 집 없는 여성에게는 불안과 우울을, 그리고 다주택자 여성에게는 모호한 자부심을 불러일으킨다.


(A)글과 (B)글은 상당히 닮아 있다. 돌봄과 가사노동을 전담하지만 실질적인 소득이 없는 전업주부, 특히 중산층 주부들이 부동산 재테크 등을 통해 가정 경제에 기여하고 계층을 유지하고 싶은 열망이 높으며 이를 실현하지 못할 경우, 스스로 자책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내용이다.


(A)글은 1990년에 나온 계간지 < 하나의 문화> 실린, 가수 이적 어머니이자 여성학자로 유명한 박혜란 작가 글이며 (B)글은 2021년에 나온 최시현 작가의 저서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에서 인용한 것이다.


30여 년의 간극이 있지만 동시대에 나온 글이라 생각하며 읽어도 크게 어색하지 않다. 그간 여권은 충분히 신장되었고 심지어 여성을 둘러싼 구조적 불평등 같은 건 사라진 지 오래라는 정치인의 발언이 나오는 시대인데, 2022년을 살면서도 1990년 글에 쉽게 공감이 되는 게 참 이상하다.


더구나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 추천사를 쓴 이라영 작가가 지적한 대로 부동산 투기가 사회적 논란이 될 때마다 남성 정치인들이 시전 하는 단골 변명은 "저는 모릅니다. 집사람이 한 일이에요."이다. 부동산 투자가 중산층 주부의 미덕이자 의무인양 강제하다가도, 투자와 투기의 한 끗 차이로 구설수가 생기면 속물근성에 찌든 '집사람'의 소행으로 간주된다.


1980년대는 개발에 따른 부동산 투기가 극성을 부리던 시기다. 이때 나온 임권택 감독의 영화 <복부인>은 평범한 주부가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어 큰돈을 번 이후 남편을 무시하고 향락에 취해 결국 파멸한다는 서사를 담고 있다. 경제적 활동을 등한시하며 살림만 하는 여성을 무능한 사람 취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경제 흐름을 잘 알고 이용한 여성을, 사회를 어지럽히는 주범으로서 단죄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영화 <복부인>의 한 장면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 책에서 지적한 대로 남성이 청렴한 공적 자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번거롭고 도덕적 논란이 될 일은 여성이 주로 해왔다. 하긴 어디 정치인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겠는가. <사라짐, 맺힘>을 쓴 김현 작가도, 아내가 자기 몰래 반포 아파트에 당첨되었을 때 "아무튼 내 속으로는 집이 생겨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며 자신이 위선자였노라 고백한다. 결국 행려병자로 삶을 마감한 나혜석이 이혼당한 것도 남편이 처한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고 외간남자에게 편지를 쓴 탓이었으며, 작품 속 인물이긴 하지만 <인형의 집> 노라가 아버지 서명을 위조해 돈을 빌렸던 것도 남편이 죽을병에 걸렸기 때문이었다. 훗날 이 사실을 알게 된 남편은 격분하며 도덕성을 상실한 그녀에게는 엄마 자격이 없다고 단언한다.


그렇다면 남편 대신 부동산 투자에 무사히 성공한 여성들은 이들과 달리 가정 안팎에서 발언권을 획득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았을까? 여기에 대해 책의 저자는 회의적으로 말한다. '여성들에게 일시적으로 해방감을 선사하고 사적 관계에서 권련 관계를 재협상하는 그들의 부분적 역량을 강화해줄 수는 있지만 사실 거기까지가 한계이며, 그들이 놓인 구조적 억압을 바꾸는 데는 역부족'이라고 지적한다.


주부가 재테크에 성공해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루거나 시세 차익을 얻으면 일시적으로 가정에서 목소리가 커질 수는 있다. 하지만 엄마이자 아내, 며느리인 여성이 가정 내에서 좀더 많은 양보를 하고, 좀더 자주 침묵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복부인> 영화에서 드러난 것처럼, 투자가 성공할 때는 치켜세우다가 행여 투자에서 실수가 있거나 손해를 보면 '여자가 설치더니 꼴좋다'는 식의 사회적 조롱도 여전히 난무한다.


지나친 가족주의는 종내는 반사회적 욕망으로 연결된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이 사회가 다 같이 공멸하든 말든, 나와 내 가족만 수완 좋은 재테크로 살아남으면 된다는 극단적인 각자도생으로 치닫는다. 지금도 "아이들에게 자기 명의 집 한 채씩 물려주는 게 엄마로서의 목표"라고 하는 이들을 종종 본다. 이런 열망 앞에서 공공임대 주택 같은 사회적 의제는 '국가에 의존하는 무력하고 열등한 존재를 양상하는' 이슈일 뿐이며 내 아이를 그런 대열에 서게 하지 않는 게 훨씬 중요한 소명이 된다.


전업주부들이 사회활동을 하는 여성보다 내 집 마련을 두고 책임감을 더 크게 느끼는 경향이 강한 것도 주목해야 한다. <부동산은 어떻게 여성의 일이 되었나>란 제목에 고개를 갸웃하는 이들이 있는데 표본이 적어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바로 직장을 다니는 젊은 주부들이다. 그들이 체감하는 부담은 전업주부와 달랐다. 대체로 전업주부만큼 부동산이 여자의 일이라고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


가사와 살림을 전적으로 맡고 있는 주부들이 부담을 더 크게 느낀다. 지금도 심심찮게 맘카페에는 '남편이 다른 여자들은 재테크도 잘해서 집도 넓혀가는데 저는 집에서 뭐하냐고 타박해요'라며 서운한 심경을 토로하는 글이 올라온다.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은 '부동산은 어쩌다 주부의 일이 되었나'로 정했다.


주부가 하는 '살림'은 '죽임'의 반대말이다. 녹색평론에서 나온 책 <살림의 논리>에서 장택희 박사는 살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살림은 한 가정을 살리는 것인 동시에, 내 몸을, 국가를, 지구를 살리는 일이라는 것이다. 어떻게든 내 가족이 살 집만 마련하면 되고, 내 아이를 키울 경제력만 갖추면 되며, 그 이외의 사회적 가치를 생각하느라 우물쭈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비웃음을 당하는 시대다.


그러나 이 낡은 신념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도 있긴 하다. 당장에 내가 아는 작은 도서관 관장님이 그렇다. 세종시 초창기에 충분히 받을 수 있었던 공무원 특공을 부부가 상의한 끝에 신청하지 않았다. 너도나도 부동산 투자의 과실을 따겠다고 덤비는 시류에 편승하고 싶지 않아서였다고 한다. 지금과 달리 그때만 해도 공무원 특공 조건이 까다롭지 않고 경쟁률도 낮아 신청만 하면 아파트 한 채가 분양가로 주어지고, 프리미엄 덕에 자산이 순식간에 몇 배로 늘었다. 재테크가 지상 과제가 되어버린 요즘 같은 때, 누군가에게는 이 선택이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하지만 중산층의 속물근성을 극복하고 궁극적으로 우리 일상을 살리는 '살림'을 실천하는 것은, 이 어리석음에서 시작되는 거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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