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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Jun 16. 2022

<우리들의 블루스> 아동학대가 불편합니다


 에 실을 사진을 찾기 위해 '매질'이라는 말이 영어로 정확히 뭔지 검색해 봤다. 원래는 <우리들의 블루스> 드라마  인물이 아니라 아이가  맞는 사진이나 그림을 찾아서 넣을 생각이었다. '매질'이라는 단어를 검색창에 넣는 순간 이상하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니까 햇수로는 거의 30년이 훨씬 지난 일인데 나는 아직도 '매질'이란 단어를 키보드에 치는 것만으로   없는 공포에 휩싸였다. 키보드 위에 얹은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렸다. 결국 사진 찾기를 포기하고 그냥 이병헌 얼굴 사진을 넣었다.


어릴 때 부모에게 받은 정서적, 물리적 학대가 이렇게 무섭다. 오래전 EBS에서 방영된  <마더쇼크> 같은 다큐에서 '부모의 학대가 아동의 뇌를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과학적으로 낱낱이 입증하기 이전에 나는 내 몸을 통해 스스로 알았다. 어린 시절 상처로 내 영혼 어디 한 구석은 완전히 망가졌고 복구되기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는 것을. 30년도 더 전에 엄마에게 당한 폭행과 매질이 내게 어떤 상흔을 남겼는가를 나는 여전히 매일매일 깨닫는다.


그래서 <우리들의 블루스>의 옥동과 동석을 보는 게 힘들다. 옥동이 암에 걸렸으니 이제 엄마를 이해하라고 호통치는 주변 인물들에게는 분노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고, 드라마가 종영되자 불쌍한 옥동을 이해하자며 쏟아지는 기사를 보니 심장이 쿵쿵댄다.


가장 힘겨웠던 기사는 어머니 옥동도 시대와 가부장제의 희생자이니 동석이 그를 감싸 안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옥동이 어린 동석의 감정을 조금도 헤아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때리고 방치하고 거의 학대했던 것을 '그 시대 어머니들은 다 그랬다'는 식으로 두둔하는 것도 참을 수 없지만, 그걸 피해 당사자인 동석이 앞장서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목소리들은 나를 숨 막히게 한다.


가부장제를 이야기하고 싶다면 제대로 알고 말하기를 바란다. 벨 훅스는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뿐 아니라 아동에 대한 성인의 폭력, 십대에 대한 폭력 등 모든 형태의 폭력을 반대하는 것이 가부장제를 비판하는 페미니즘 정신이라 밝힌 바 있다. 만약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을 두고 '그 시대 남성들은 제대로 못 배워서 그래', '남자들도 나쁜 게 아니라 폭력적인 시대를 사느라 어쩔 수 없이 거칠어진 거야.'라고 두둔한다면 수긍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유독 아동을 향한 어머니(혹은 아버지)의 폭력은 왜 자꾸 미화되는 걸까.

김희경 작가는 그의 저서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2016년 미국 텍사스대학교의 발달심리학자 Elizabeth Gershoff가 체벌과 관련된 50년 치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를 언급한다. 체벌을 받은 아이는 반사회적 행동, 공격적 성향, 인지 장애 등 부정적 행동을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체벌 수준을 '손바닥으로 아이 엉덩이나 팔다리를 때리는 정도'로 한정했는데도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방치와 학대 속에 큰 동석이 완전히 엉망으로 살지 않고 그 정도 인성을 유지하기까지 그는 어금니를 깨물고 참고 또 참았을 것이다. 어머니 옥동이 시대의 비극 속에 삶이 고달팠다면, 어리고 연약한 동석은 그 시절을 견디느라 몇 배로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뒤늦게라도 옥동을 감싸 안아야 할 대상은 불행한 시대와 부조리한 사회이지, 피해자로 살았던 동석이 아니다.


동석이가 어머니를 끝내 용서하지 않은들 누구도 함부로 비난할 수 없다. 그건 정말로 동석이 말대로 "너희들이 뭘 알아"이다. 겪어보지 않은 이들은 모른다. 설혹 비슷한 일을 겪었어도 고통은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기에 힘든 정도로 줄 세울 수 없으며, 각각의 사연은 깊이 들어가면 다 다르다. 그러니 '나는 더한 일을 당했지만 우리 부모를 이해한다'고 섣부르게 우월감을 드러내는 것은 수많은 아동학대 피해자들을 또 한번 자책의 바다에 빠뜨리는 행위다. 안 그래도 아동학대를 당한 이들은 피해자면서도 자신이 나쁜 사람이라는 자기모멸에 시달리는 일이 흔하다.


감정은 초시간적이다. 30년 전, 50년 전 사건도 내가 너무 큰 상처를 받았던 일은 오늘 당한 것처럼 똑같이 아프고 서럽다. 부모는 아이에게 우주다. 어릴 때 부모는 세상의 전부였고 나를 보호해 줄 단 하나의 존재였다. 그런 부모가 나를 학대하고 때리고 함부로 굴린 것은 아이에게 트라우마로 남는다. 누군가는 옛날 일이니 용서하고 잊으라고 쉽게 말하지만 트라우마는 의지로 극복할 수 없으며, 극복하라는 강요야말로 폭력과 다름없다.


정혜윤 작가의 <슬픈 세상의 기쁜 말>에는 1999년 콜럼바인 총기 사건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20년이 흘러도 천둥소리에 놀라서 벌벌 떨며 의자 밑에 숨는 장면이 나온다. 2018년, 딴지일보에 '세월호가 지겹다는 당신에게 삼풍 생존자가 말합니다'란 글을 쓴 '산만언니(필명)'는 1995년에 일어난 그 사건으로 20여 년간 트라우마에 시달렸다고 고백한다. 트라우마를 관통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상처가 되는 말은 "아직도 그래?"이다. 산만 언니는 말한다.


"당신들은 모른다. 아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 잘 모른다. 이런 사건 사고가 개인의 서사를 어떻게 비틀어 놓는지 당신들은 정말 모른다. 사고 이후 나는 여태 불안 장애로 정신과를 다니고 있다. 번번이 미수에 그쳤지만 그간 공식적으로 세 번이나 자살 기도를 했다."


아동학대는 아이에게 총기 사건이나 백화점 붕괴만큼 크고 절대적이며 공포스러운 기억이다. 그걸 평생 감당하며 살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매해 끔찍한 아동학대 사건이 신문 지면을 채우고, 엇비슷한 탄식과 정책이 쏟아지는 사회다. 부모를 죽이는 존속살해는 가중처벌이 있으며 매우 엄격하게 다뤄지는데 반해, 부모가 아이를 죽이는 비속살해에는 가중처벌이 없으며 형량도 관대한 편이다.


가뜩이나 이렇게 기울어진 분위기인데 아동학대 피해자들은 용서까지 강요받는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그래야 어른이라고 훈수를 둔다. 나 또한 내가 부모에게 당한 일이 학대인지 아닌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누구에게 당당히 아동학대라고 말할 만한 사건은 아닌 것 같았다. 내가 약하고 못나서, 내가 속 좁아서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못 벗어나는 거라고, 그래도 부모니까 용서해야 하는데 내가 어른스럽지 못한 탓이라고 나를 비난해 왔다. 이런 드라마는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린다. 작가의 의도는 그게 아니었겠지만 이 드라마를 소비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그렇게 다가온다.


예전에 상담을 시작할 때 상담의 목표가 뭐냐고 상담 선생님에게 물었던 적이 있다. 만약 나를 학대한 부모를 이해하고 용서하는 게 목표라면 하고 싶지 않다고. 선생님은 결코 용서를 상담 목표로 두지 않는다고 했다. 상담을 하는 과정에서 내가 먼저 자연스럽게 부모를 한 인간으로서 이해하고 수용하게 된다면 좋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아무 상관없으며 그게 궁극적인 목표도 아니라고 했다.


어쩌면 이 순간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은 왜 동석이처럼 학대한 부모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했을까, 왜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은 아름다운 가족 간 화해로 마무리되지 못했을까, 혹여 내 잘못이었을까, 곰곰이 되씹으며 울적해하고 있는 사람이.

만날 수 있다면 말해 주고 싶다. 부모도 불쌍한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어린 당신은 더 불쌍한 존재였으며 지금 당신의 마음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밖에 없다는 걸. 지금 들어야 하는 것은 가족주의를 내세워 억지 화해를 종용하는 세상의 목소리가 아니라 당신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뿐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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