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혜 작가의 에세이집에 한 평론가가 '여성' 작가들을 겨냥해 다음과 같이 쓴 내용이 나옵니다.
몇 년 전 한 남성 평론가가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문학계에 여성 작가가 많은 것은 상대적으로 생계에 대한 부담이 적기 때문이다. 팔리면 좋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다. 부모 또는 남편이 있기에"
이 문장은 일차적으로 나를 비롯한 결혼한 여성 작가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다. 모든 결혼이 여성에게 생계를 의탁하게 해 주지도 않지만 생계를 보장받는다 해도, 보장받는 이는 가사(육아) 노동자이지 글쓰기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혼 여성 작가가 생계에 대한 곤란으로 글을 쓰지 못할 때, 기혼 여성 작가는 생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느라 글을 쓰지 못한다. (중략) 밥을 먹을 수 없어 창작을 포기한 이들과 밥을 먹는 대가로 창작을 포기한 이들 중 누가 더 불행한지를 말하라니.
-<참 괜찮은 눈이 온다>, 한지혜
문학계뿐일까요. 여성의 일은 수시로 취미생활 취급을 받습니다. 회사에서도 '남편 있으니까 생계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는 말을 들으며 승진에서 혹여 부당하게 밀려도 외벌이인 사람이 먼저 올라가야 하니 항의하지 말 것을 종용당하며, 나이 많다고 문전박대를 당하면서도 꿋꿋하게 이력서를 냈는데 '남편분이 잘 버시는 것 같은데 왜 꼭 일을 하려고 하냐'는 의구심에 찬 눈길을 마주해야 할 때가 있지요.
'너는 남편 잘 만난 줄 알아라. 집에서 편하게 애만 키워도 먹고 살 걱정 안 하잖니'라는 시부모의 훈수에 마음속으로 애들 교육비니 주택담보대출 이자니 가계 부담에 허리가 휘청이는데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 거냐고, 그리고 나도 직장 다닐 때 유능하다 인정받았는데 애들 봐줄 사람이 없어 할 수 없이 그만둔 거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해받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입을 다물어 버립니다.
남편 있으니까 '팔려도 좋고 안 팔려도 좋을 책'을 쓰면서 한가하게 하루를 보낸다는 오해에 예전에는 해명이든, 변명이든 뭐라도 말해 주고 싶었어요. 공부하고 직장만 다니던 젊은 여성이 출산 이후의 삶을 구체적으로 상상한다는 건, 도로 틈새에 피어난 민들레가 바다를 상상하는 것만큼이나 괴리가 큰 일이었어요.
책이나 미디어에서 보고 들은 출산과 육아는 지극히 단편적인 몇 개의 사건이었어요. 육아는 훨씬 더 길고 끈질겼습니다. 사건 몇 개로 끝나지 않았어요. 하루에 한 시간도 나한테 온전히 집중하기 어려운 일상이 10여 년간 지속될 거라는 걸, 그래서 인생 한 부분이 통째로 날아가는 당혹감을 느끼게 되리라는 걸 몰랐습니다. 조부모나 도우미 같은 조력자가 항시 대기하고 있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주양육자로 살아가는 엄마들 거의가 저와 비슷한 경험을 했을 거예요.
저희 아이들은 이제 양육자의 물리적 보살핌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청소년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제가 엄마라는 자리에서 마냥 자유로워진 건 아닙니다. 며칠 전에도 아이들 시험 때문에 부득이하게 제가 진행하는 글쓰기 모임 시간을 바꿔야 했어요. 아이가 학교에서 일이 생기면 여전히 엄마한테 연락이 오고, 입시 설명회에도 주로 엄마들이 아이와 참여합니다. 애들 어릴 때, 소아과에서 아픈 아이 업고 안고 어르며 복도에 길게 늘어선 보호자들 대부분이 엄마였는데 이만큼 커서도 마찬가지더라고요.
새벽에 졸린 눈 비비며 책 읽고, 밤이면 저녁 설거지까지 마친 후 천근만근이 된 몸을 이끌고 모니터 앞에 경건하게 앉아 한 줄 한 줄 써 내려가는 것을 느긋한 취미생활이라고 한다면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이렇다 할 작업실은커녕 '자기만의 방'도 없어서 이 방 저 방 메뚜기처럼 옮겨 다니며 글을 쓸지언정, 기다리는 독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출판사랑 확실하게 계약한 원고를 쓰는 것도 아닐지언정, 그래도 하루에 정한 목표치를 채우려고 혼자 끝끝내 노력하는 일상을 너무 가볍게 취급하는 시선에 마음이 울적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제는 애써 설득하려 들지 않아요. 내가 어떤 삶의 이력을 지나왔는지 잘 알지도 못하고, 알려들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어차피 이야기해 봐야 말하고자 하는 바가 가 닿지 않더라고요. 그들을 설득하는 데 너무 공들이기보다는 그저 오늘 하루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쓰고자 합니다.
얼마전부터 베란다에서 다육식물을 키우는데 그 생명력이 엄청납니다. 웃자라는 걸 막기 위해 줄기 중간을 잘라서 흙에 심어주면 금세 뿌리가 새로 나고 별개의 개체로 성장해요. 한번은 잘못 자른 줄기 몇 개를 나중에 정리할 심산으로 바닥에 대강 버린 적이 있었어요.
시간이 흐른 후, 버린 줄기들이 베란다 바닥에 있는 얼마 안 되는 흙 부스러기에 기어이 뿌리 몇 가닥을 내리고 살아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흙이 별로 없는 탓에 뿌리가 맨다리처럼 훤히 드러나 있었어요. 흙 있는 자리를 골라 힘겹게 뿌리를 내리느라 모양은 좀 이상했지만 그 와중에 줄기에서 새 잎을 올렸더군요.
내가 디딘 토양이 기름지고 풍성하면 제일 좋겠지요. 아이 학교에서 아프다는 연락도 안 오고 아랫집에서 물이 샌다는 항의를 받는 일도 없으며 빨리 수선을 맡겨야 하는 남편 옷이나, 매일같이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도 없다면 더 집중해서 글을 쓸 수 있을 거예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책을 뒤적이며 글 쓰는 데에만 몰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몇 글자 쓰다 보면 '소독'하는 분이 벨을 누르고 우체국에서 등기를 받아가라고 전화가 옵니다. 예정된 일과 예정되지 않은 일이 수시로 뒤섞여 불시에 찾아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안정적인 시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엄마 작가의 일상입니다.
이제 저는 욕심부리지 않고 제게 주어진 일상을 감당하면서 글을 쓰려 합니다. 은희경 작가는 <새의 선물>을 집필할 때 절에 들어가 몇 개월을 지냈다고 하고 김연수 작가는 9개월간 중국에서 소설을 썼다고 하지요. 이외에도 작가들이 완전히 독립적인 공간이나 작업실에서 집필에만 전념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게 참 부러웠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걸 따라할 형편이 안 됩니다.
매일 쳇바퀴처럼 반복되는 주부의 일상에서 건져 올릴 글감이 별로 없다는 생각에 마음이 심란해져도 막상 바꿀 수 있는 현실이 많지 않습니다. 오랜 기간 주부로 지내왔고 수험생 엄마이기도 한 제가 갑자기 헤밍웨이처럼 전쟁에 참전하고 투우 경기를 즐기며 아프리카에서 맹수 사냥을 하는 스릴을 만끽하며 역동적인 글을 쓰기는 어렵겠지요. 흙 부스러기 위에서 안간힘을 다해 뿌리를 내리는 다육식물처럼 나의 분주한 일상을 기꺼이 감당하며 파도에 몸을 맡기는 기분으로,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에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드문드문 백지를 채울 뿐입니다.
여자들은 취미로 글 쓴다며 은근히 폄하하는 평론가의 글에 처음에는 상처를 받았는데요, 그 아픔마저 이렇게 오늘 저의 글감이 되어 준다는 생각이 들어요. 잘못된 사회 통념을 지적하고 사실 관계를 밝히는 글도 필요하지만 그 상처를 떠안아 기꺼이 풀어내는 글도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주는 모욕조차도 나의 글쓰기 소재가 되며 그 생채기를 글자로 내려앉히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그렇게 탄생한 글 몇 편이 얼마나 절박하게 글을 쓰는가에 대한 구구절절 설명보다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주인의 무심하고 배려 없는 손길에도 흙 부스러기에 뿌리를 내린 다육식물을 보며 저는 그들의 생명력에 감탄하고 뒤늦게 보살펴야 한다는 자각을 했습니다.
오늘도 지지부진한 원고일지라도 손에서 놓지 않는 엄마 작가들이 이 사회에 쏟아내는 글이 함성이 되어, 그리고 물결이 되어, 여자들은 취미로 글 쓰고 재미로 일한다는 편견을 바꾸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