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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Sep 19. 2022

집값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운전하는데 라디오에서 "부자 되세요!" 누군가 외치는 광고가 나온다. 운전석 차창 너머 건물에는 "부동산 재테크 학원-소액의 꿈으로 실현하는 부자의 꿈"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는 큼직한 간판이 눈에 띈다. 지난 몇 년 사이 자주 등장했다. '나는 소액으로 아파트 00채를 샀다, 부동산으로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을 마련하고 조기 은퇴했다, 부동산으로 경제적 자유를 실현했다' 등등. 부동산 시장이 활황일 때 매체에서, 책에서, 선전문구에서 쏟아져 나온 이야기다.


2020년 11월에 나는 '집값이 오르기 시작했다'라는 글을 썼다. 내 기준 '집값이 오르기 시작'한 실제 시점은 2019년 11월이었으니 3년이 채 안 된 지금, '집값이 내리기 시작했다'는 제목으로 글을 쓰게 됐다. 이 글 제목을 보고 클릭한 독자들은 어떤 상황일까. 무주택자라서 집값이 더 떨어지길 기다리는 중인지, 이사를 앞둔 1주택자인데 집이 팔리지 않아 애를 태우고 있는지, 아니면 자금이 풍부해서 부동산 시장이 어떻든 이익 실현을 위해 느긋하게 기다리는 다주택자인지 내 입장에서는 알 수가 없다. 그러니 이 글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매우 공감이 될 수도 있고 오히려 마음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일단 나는 '주택을 재테크 수단으로만 접근하는 사회 분위기는 바뀌어야 한다'는 대전제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길 추천한다. 세부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면 해법을 보는 시각은 또 다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주택 갖고 적극적으로 돈 벌자는 움직임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다. 기왕이면 내가 산 집이 가격이 오르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기왕이면' 이랬으면 좋겠다는 기대치를 갖는 것과 집을 오직 재테크 수단으로만 바라보며 벼락거지와 벼락부자, 하우스푸어와 패닉바잉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곡예하듯이 사는 삶은 다르다. 남의 전세금을 지렛대 삼아 집을 수십 채 사는 걸 건강한 투자라고 봐야 하는지도 의문이다. 요즘 뉴스에서 역전세난이 올지 모른다는 우려스러운 기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어쩌면 전 재산일지 모르는 거액의 보증금을 묶인 세입자들은 정말 불안할 것 같다.

Photo by Anthony Reungère on Unsplash

부동산 고수도 아니고 재테크 전문가도 아니지만, 아파트로 재테크를 한다는 개념이 불붙기 시작한 우리 부모님 세대의 투자부터 어깨너머로 부동산 시장을 30년간 지켜본 입장에서 내 나름대로 결론은 냈다. 부동산 시장 흐름은 돌고 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이 정확한 기간은 예측하지 못하지만 대체로 동의하는 건 영원한 상승장도, 영원한 하락장도 없다는 것이다.


내가 결혼하고 얼마 뒤에는 집값이 폭락하기 시작해서 주변에 막대한 대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하우스푸어'가 된 이들이 많았다. 대출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집을 내놔도 보러 오는 사람이 하나 없었다. 그때 무리하게 집 산 부부들 중에 네 탓, 내 탓을 하며 부부 싸움하는 이들을 종종 봤다. 그들이 언제까지 힘겨운 터널에 갇혀 있었냐 하면, 꼭 그렇진 않다. 그 시기를 넘기고 집값이 다시 폭등했으니까. 지금은 안정된 환경에서 애들 대학 보내고 잘들 살고 있다.


지난 몇 년간 부동산 불패신화를 강조하는 세칭 부동산 일타강사들을 보면서 마음 한편이 불안했다. 오래전 집값이 떨어져 하루가 멀다 하고 사네, 못 사네 부부싸움을 하던 그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상승장이 영원할 거라는 이들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고, 부동산을 재테크가 아니라 주거 공간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원칙론적인 입장이 너무 가볍게 무시당하는 상황도 좀 불편했다. 심지어 다주택자들이 임대 사업을 하니까 주거 안정에 기여한다는 궤변이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얻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차가 없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되고, 돈이 없으면 새 옷 대신 낡은 옷을 입으면 되며, 만약 식비도 줄여야 하는 상황이라면 반찬 가짓수를 줄이거나 저렴한 식자재를 이용할 수 있다. 집은 대체가 안 된다. 없어도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집 없어 길바닥으로 나앉는다'는 표현처럼 섬뜩한 말도 없을 것이다.


살인적인 서울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해 수해에 속수무책인 반지하 집이 늘고 화장실과 싱크대가 한 곳에 있다거나 어른이 목을 꺾고 다녀야 할 만큼 천정이 낮은 집 등, 비인간적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집도 등장했다. 지난 몇 년간 부동산 시장이 들썩일 때 열악한 주거 시설에 내몰린 이들이 겪은 고통은 비위생적이고 물리적인 환경이 주는 불편함만은 아니었다. 무능한 이들이라는 세간의 시선이 그들을 더 힘들게 했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쓴 김중미 작가는 한 인터뷰에서 예전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서로 의지하며 모여 살았지만 가난이 죄가 된 시대에 그들은 서로를 피하며 작은 도움조차 주고받길 꺼린다고 했다.


가난한 이들을 죄인으로 만든 이들은 누굴까.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부동산 재테크 일타강사라는 사람들이나 그들이 부지런히 쓴 책들이 큰 몫을 한 것 같다. 그들이 사회의 멘토 역할을 자처하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가난은 그저 개개인 무능과 게으름의 소산이자, 재테크에 대해 무지한 결과라는 인식이 퍼졌다. 경제관념을 갖추고 사회가 돌아가는 바에 관심을 갖고 배워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아파트 갖고 자산 증식하는 게 이 사회 전체의 생산성 향상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모르겠고, 나의 주거 확보를 위해 최소한의 지식을 갖추는 것과 오직 돈 벌려고 집을 이용하는 건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 흐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않아 도태되는 사회라면 개인이 문제가 아니라 이미 병든 사회로 진입한 거다.


한편으로는 나만 이상론에 갇혀 낙오되는 건가 가끔 초조한 생각이 든 적도 있다. 그래서 부동산 강좌나 일타강사란 이들의 블로그를 기웃거려보기도 했는데 빚내서 집 사지 않는 이들을 바보 취급하거나 심지어 경매로 취득한 집에서 임차인을 내쫓는 강제집행 과정까지 사진으로 찍어 '꼼꼼히' 알려주는 내용에 거부감이 들었다.


나는 무슨 사회운동가나 투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헬렌 니어링이나 <월든>을 쓴 소로우처럼 홀연히 숲속으로 가서 살 만큼 뚜렷한 철학이나 소신이 있는 사람도 아니다. 속세에서 복닥거리며 아이들을 키우고 다음 달 공과금이나 세금이 얼마나 나올지 걱정하는 소시민일 뿐이다. 그래서 출렁거리는 부동산 시장을 앞두고 어떤 자세를 견지해야 할지 단정적으로 입바른 소리는 못 하겠다. 사람 사는 집 갖고 돈 번다고 법석을 떠는 것도 불편하지만 막상 내가 살 집이 없으면 얼마나 불안할지 알고 있으니까.


다만 끝없이 욕망을 부추기는 이들에게 휘둘려 인간성마저 상실하진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한다. <조선에서 백수로 살기>  많은 책을  고미숙 작가어느 매체와  인터뷰에서 "지금 부동산이 거의 맹목이  있는데 한번 따져보자. 집을 갖는 쾌락, 소유하는 쾌락의 실체를 말이다. 집이란  따뜻하고 기본 의식주 해결되는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사는  거의 똑같다고 본다. 나머지는 머리로 망상하는 거다. 내가 남보다  집에 산다. 이런 거밖에 인생의 의미를  만한 데가 없으니까. 지금의 아파트는 마음의 거처가 아닌 욕망의 거처다."라고 말했다.


집값은 오르내리기 마련이다. 생애 주기가 공교롭게 맞아떨어져 별 노력도 안 했는데 뜻밖의 이익을 실현할 수도 있고, 주야장천 재테크 책도 읽으며 애썼는데 예상 밖의 손실로 괴로울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 시기는 지나간다.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 잠시 힘들어도 마음까지 나락으로 떨어지진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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