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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Jan 06. 2023

반장 선거와 글쓰기


신학기에 운전하다 보면 라디오에서 꼭 나오는 사연이 있습니다. 아이가 반장선거에 나가니 응원해 달라거나, 처음으로 회장이 되었으니 축하해 달라는 사연을 라디오 디제이가 읽으면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다는 걸 실감합니다. 도로 양옆에 늘어선 벚꽃에 가지마다 올망졸망 움튼 새눈은 새 봄, 새 학기의 시작에 같이 들썩이는 친구 같아 정겹고요.


하지만 신학기 반장 선거가 마냥 달갑지 않은 부모님도 있을 거예요. 애초에 관심이 없는 아이라면 괜찮습니다. 문제는 본인은 반장을 너무 하고 싶어 하는데 친구들이 안 뽑아줄 때예요. 반장이 안 되었다고 속상해며 귀가하는 아이를 보면 괜스레 같이 울적한 기분도 들지요. 반장 선거는 인기투표 성격도 있어서 반장 되는 거야말로 엄마가 뭘 대신해줄 수가 없습니다. 유치원 때야 친구들 불러 집에서 놀리는 등 엄마의 배려로 친구 관계를 도와줄 수도 있지만 클수록 이런 거 별 소용이 없거든요. 그래서 어느 시기에 이르면 엄마들은 아이의 사회성 때문에 애를 태우기도 합니다.



흔히 둘째가 어리숙한 첫째보다 사회생활을 잘한다고 하잖아요? 모든 경우에 딱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수긍하는 통설이지요. 저희 작은애도 그랬습니다. 언제나 인기인이었고 생일이면 책상에 선물이 산더미였어요. 학급임원은 물론 전교임원으로 뽑히고, 늘 리더십과 배려가 뛰어나다는 주위 평판을 들어서 저는 그저 잘 크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회성은 걱정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이가 중학교 들어갈 무렵 점검 차원에서 한 종합심리검사에서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이의 사회성을 더 키워줄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학교에서 원만하게 잘 지내는 아이였기 때문에 검사한 선생님 말이 처음에는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아이의 학교생활을 언급하며 선생님들도 다 예뻐하시고 친구들에게 인기도 많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사회성이 좋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셨어요.


"사회적 관계에 대한 대처능력이 좋다는 것은 외형적인 지표로만 정의하는 건 아닙니다. 아이의 친구들은 아이와 맺은 관계에서 만족도가 높지만, 아이 본인은 만족도가 현저히 떨어져 있습니다. 바꿔 말하면, 타인에게 잘 맞추니까 다른 사람들은 이 아이를 좋아하지만 본인은 힘든 상황인 거죠."

"남한테 맞추고 잘 배려하는 것도 사회성이 높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물론 그렇지만, 문제는 나를 잘 알고 이해한 상태에서 남을 배려하는 것과 무조건 남을 우선순위에 두는 건 다릅니다. 후자의 상태로 계속 지낸다면 겉으로는 인기인으로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본인 삶의 만족도는 떨어진 채 지낼 수 있습니다."


평안 감사도 저 싫으면 그만이라는데 선생님 말씀을 듣고 보니 제가 뭔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권력과 명예가 보장된 벼슬도 본인이 좋아하지 않으면 소용없다는 걸 우리 선조들은 일찍이 꿰뚫어 봤잖아요. 사회성이 좋다는 게 주변에 친구들이 많다는 것과 동의어가 아닌데 저는 친구가 많은지 적은지 그것만 중요하게 여기고, 정작 아이 마음이 어떤가는 세심히 들여다보지 못했습니다. 주변에 친구가 많고 시쳇말로 '인싸'가 된들 아이가 행복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요. '사회성'은 남한테 무조건 잘 맞춰서 주변에 따르는 사람이 많다는 뜻이 아니라, 상대의 욕구와 나의 욕구를 적절히 조정하는 균형감을 일컫는다는 것을 뒤늦게 배웠습니다.

Photo by AJ on Unsplash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쓰는 나의 욕구, 읽는 독자의 요구 사이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그저 많은 독자를 확보하는 것에만 급급해지면 중요한 걸 놓칠 수 있어요. 근래 몇 년간, 출간으로 인생 역전을 이룬 것처럼 선전하는 이들을 종종 봤습니다. 빨리 유명세를 타는 작가가 되어 성공해야 한다며, 쓰고 싶은 글이 아니라 독자가 읽고 싶은 글을 써서 많이 파는 게 중요하다고 하는 분들도 있었고요.


물론 많은 사람이 읽고 공감해 주고, 내 글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어준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장르에 따라서는 철저하게 기획된 조건으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에세이에 한정해서 보자면, 자기를 감추고 독자에게 듣기 좋은 말만 골라 담는다고 해서 베스트셀러가 되기는 힘들어요. 독자는 둘째치고 자신도 설득하기 어려운 어정쩡한 글이 나올 수 있어요. 무엇보다 문제는 세상이 원하는 말로만 자신의 글을 솎아내다 보면 스스로 글쓰기를 이어갈 동력을 상실한다는 거예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글을 쓸 때 느끼는 기쁨이 작품을 쓰는 '엔진'이라고 했습니다. '다양한 표현 작업의 근간에는 늘 풍성하고 자발적인 기쁨(p109)'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어디 글쓰기뿐인가요. 유시민 작가님도 '성장문답' 강연에서 "인생은 자기를 표현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며, "나한테 없는 것을 표현하려면 되게 힘들고 의미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에세이로 독자와 소통하고 싶다면 무조건 팔리는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은 경계해야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독자가 듣고 싶은 이야기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익히는 게 먼저일 거예요. 저는 이 감각을 저절로 얻지는 않았어요. 다양한 경로를 활용한 훈련을 통해 습득했습니다. 습작 기간에는 동료나 글쓰기 선생님에게 받는 피드백을 통해 내 글에서 보완할 점을 찾게 되지요.

그러다 플랫폼 등을 통해 대중에게 공개하는 글쓰기를 하면 독자의 코멘트를 보고 내가 쓰는 글과 독자들이 읽고 싶은 글 사이 어떤 간극이 있는지 조금씩 느끼게 됩니다. 이 간극을 어느 정도까지, 어떤 방식으로 좁힐 것인지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본격적인 '글쟁이'로 거듭나겠지요.



쓰는 나와 읽는 독자 사이에서 균형 감각을 갖춘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저는 수강생들에게 자신의 경험과 사색에서 건져 올린 주제의식은 소중히 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글에 담을 주제의식은 나의 것으로 밀고 나가되,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풀어갈 것인지, 형식적인 측면은 독자들을 살펴보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다양한 시도를 할 것을 권합니다.


그림책 수업을 종종 했었는데요, 같은 그림책을 갖고 수업을 해도 초등학교 방과 후 수업에서 제가 쓰는 어휘와 성인 대상 그림책 수업에서 쓰는 어휘는 다릅니다. 서두에 호기심을 환기하는 방식도, 중간에 건네는 농담도, 주제를 요약한 문장도 달라집니다.


이렇게 상대와 더 잘 소통하기 위해서 표현방식을 다듬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퇴고하면서 문장을 좀 더 리드미컬하게 다듬어 가독성을 높인다거나 구체적인 사례를 적절하게 들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거나, 이런 시도는 필요해요. 그러나 내가 전하려는 메시지는 뚝심 있게 밀고 나가야 합니다. 독자들 맘에 들고자 주제의식을 희석하거나 결론을 바꾸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라고 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글쓰기는 부자 되는 데 일조하는 수단이 아니며 무욕의 글쓰기야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만든다'는 내용을 골자로 강연을 준비해 갔는데, 막상 가보니 주최측이 다단계 성공신화를 이룬 모 기업이며 온 사람들이 대부분 성공에 목말라하는 직장인이었다고 칩시다. 무욕을 논하는 게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자리일 것 같아서 제가 그 자리에서 '글쓰기로 나는 책도 내고 돈도 벌었다'고 강연 내용을 180도 바꾼다면 그건 제가 아닐 겁니다.

유시민 작가님 말씀처럼 나한테 없는 것을 표현하려고 애는 쓰겠지만 결국 진심을 전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호응을 얻지도 못한, 어쩌면 거짓된 강연을 하고 돌아올지도 모르지요. 어깨가 축 처진 채로 강연장을 나서며 인생이 뒷걸음질 치는 기분을 느낄 거예요. 그런 귀갓길은 설혹 유명해지거나 강의료를 많이 받는다 해도 도무지 행복할 것 같지 않습니다.


겉으로 학교에서 인기가 많고 적고가 아니라, 아이 본인의 행복이 중요한 거라는 상담 선생님 말씀을 듣고, 작가로서 저의 위치를 대입해 보니 어려운 문제의 결론이 쉽게 납니다. 독자와 소통하기 위해 다양하고 유연한 시도를 하되, 글 속에 드러난 나를 세상의 시선이 두려워 함부로 깎아내지 않는 것. 모난 돌이 정 맞는다 해도 누군가에게는 니의 모서리가 필요할 테니 말이지요. 행복한 작가가 되기 위한 노력은 매일매일 이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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