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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Jan 27. 2023

블라인드 채용, 폐지가 답일까요


‘경단녀'로 우울하고 힘든 시절이 있었어요. 아이들을 키우느라 한창 바쁠 때였어요. 평생 공부하고 직장만 다녔는데 갑자기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 하니, 대체 어디에서 저의 효능감을 찾아야 하는 건지 혼란스러웠습니다. 육아와 요리, 청소 모두가 처음 하는 일이니 서툴고 못하는 건 당연한데 그 못하는 일만 종일 반복하니 지치더군요. 매일매일 저의 무능을 확인하는 일상은 사람을 시들게 했어요.


그때 저에게 한줄기 빛처럼 다가온 건 블라인드 채용이었어요. 다른 채용공고에서는 일단 나이에서 걸리는데 블라인드 채용은 실력만 있으면 원서라도 내볼 수 있으니 얼마나 반갑던지요. 돌이켜보면 직장이 없다는 사실 자체보다 원서도 내볼 수 없는 처지라는 게 더 서글펐습니다. 사회로 들어가는 입장권을 구하는 긴 대기줄. 거기에 줄조차 서볼 수 없으니 세상이 나를 거부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시름시름 시들어가던 중 국책기관 연구소의 블라인드 채용 공고를 보고 설렜습니다. 오래전 이력서를 뒤적여 그간의 이력을 정리하고 자기소개서 문항을 채우면서 엄마 역할을 하느라 희미해져만 가던 '나'라는 칸에 불이 켜지기 시작했어요.


국책기관의 정규직이라니, 얼마나 쟁쟁한 사람들이 원서를 낼까. 걱정도 되었지만 모니터 앞에 앉아 자기소개서를 썼다 지웠다 하는 시간은 행복했어요. 나조차 잊어버린 나의 재능과 능력을 떠올리는 시간이었으니까요. 공들여 쓴 원서를 접수하긴 했지만 큰 기대는 안 하고 있었는데 서류 전형과 필기시험에 연달아 합격했습니다. 이후 최종 면접까지 갔고요.


살림과 육아에 떠밀려 종일 몸은 분주하게 움직이면서도 맘은 텅 비어 갔는데 어려운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남은 인생 후반전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겼어요. 비록 최종 면접에서 안 됐지만 바닥에 떨어져 있던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는 충분한 경험이었습니다. 자기가 사표 내라고 종용해 놓고, 막상 집안일에 파묻히니 알게 모르게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하던 남편도 저를 다시 보더군요.


그런데 이 블라인드 채용을 없앤다고 하니 언젠가는 다시 기회가 오지 않을까 막연하게 꿈꾸던 마음에 찬물이 끼얹어진 것 같습니다. 연구 성과나 실적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사람을 뽑으니 연구기관의 역량이 떨어지게 되었다고 정부에서 판단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국책기관의 블라인드 채용을 세 번이나 경험한 사람으로서는 블라인드 채용이 그렇게 아무나 뽑는 전형이 아니었어요. 대학 때 어떤 과목을 이수했는지, 학점은 몇 점인지, 직장에서 해온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다 자세히 밝혀야 합니다. 까다로운 필기시험을 보고 여러 면접관의 송곳 같은 질문에 답을 해야 했고요.


Photo by Dirk van Wolferen on Unsplash

특히나 연구직은 논문이 실린 저널, 논문 주제와 요약본 등을 다 기재해야 하고 유학한 지역의 언어로 PPT도 합니다. 연구 실정 증빙이 필수입니다. 그저 졸업한 대학 이름만 밝히지 않을 뿐이지 오히려 학벌 하나로 판가름하는 전형보다 더 세밀한 절차를 거칩니다. 그런 만큼 뽑는 입장에서는 수고와 품이 많이 들지만 미래 사회에서는 이게 맞는 방향 아닐까요?


얼마 전 남편의 지인이 세계적인 회사 구글에 들어갈 뻔했어요. 중년의 나이에 말이지요. 최종 면접까지 총 다섯 번의 심층 면접을 봤다고 합니다. 오래전 졸업한 학부 같은 건 당연히 중요한 게 아니었고요. 이미 업계에서 제법 남다른 이력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면접 과정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수의 면접관이 매번 몇 시간 동안 사람을 탈탈 털어내는데 자신의 바닥까지 다 투명하게 드러나는 느낌이었다고 해요. 최종에서 안 됐지만 구글의 사람 뽑는 시스템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블라인드 채용은 졸업한 대학 이름만 블라인드일 뿐 오히려 학벌 하나 보고 사람을 뽑는 것보다 더 깐깐하게 사람을 고르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국책기관에 근무하는 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과거에 특정 학교가 유난히 많이 뽑히던 시절이 있어서 그 대학 졸업자들이 무리 지어 다니는 걸 탐탁지 않아 하는 분위기도 있었다고 해요.

실력보다는 학벌로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분위기가 조직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거지요. 블라인드 채용은 그런 폐단을 없애는 데 필요한 제도였다고 봅니다. 중국 국적의 사람을 뽑아서 문제가 되었다는 둥, 극소수의 사례로 블라인드 채용 전체를 부정하는 건 빈대 한 마리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우는 격 아닐까요. 제도에 허점이 있다면 보완하면 되지 분명 유의미하게 발전한 제도를 없애 버릴 건 아니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도 무척 아쉽네요. 이 나이에 블라인드 채용 아니고서는 서류 통과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블라인드 채용 덕에 잔뜩 위축된 어깨를 펼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이 생각나서,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될 수 도 있었을 텐데 그 틈이 닫힌 것 같아서 더욱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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