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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Sep 18. 2023

'자식 낳지 마세요' 글을 보며


엊그제 신문에 그런 사연이 나왔어요. 온라인 카페에 어떤 엄마가 '자식 낳지 마세요'란 글을 올렸는데 수많은 공감과 지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카페에 오른 글의 요지는, "진짜 착하고 성실한 자식이 아닌 이상, 부모는 수발드느라 평생 고생해야 하고, 그 수고에 대해서 자식이라는 이기적인 것들은 하나도 몰라준다. 사춘기 때 공부 안 해서 속 썩이고, 재수시키고 대학 보내려니 등골 빠지고, 내 인생 노후도 준비 못했다"며 다시 태어난다면 자식은 낳지 않겠다는 겁니다.


맞장구치는 많은 댓글 중에 "공감한다. 애가 주는 기쁨은 어릴 때 잠깐이다. 대학 졸업하고 빌빌거리며 인간 구실도 못 하는데 평생 짐짝이다"라는 내용도 있었어요.


일단 저는 한국 사회가 언어폭력에 너무나 무감해졌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본문도 그렇고, 댓글도 그렇고 자식을 두고 '이기적인 것들'이라느니, '빌빌거리며 인간 구실도 못하는 짐짝'이라느니, 요즘 제자식만 지나치게 두둔하는 사회 풍토가 문제라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한편에서는 반대로, 혐오에 가까운 단어를 쓰며 자식을 비난하고 있었습니다.


자식 키우는 일은 참으로 고달프고 힘든 일이 맞지요. 그래서 예로부터 "무자식이 상팔자"라고도 하고, "자식이 아니라 원수"라고 부모들은 날 선 푸념도 종종 했어요.


그런데 온라인 카페에 올라온 본문과 댓글들은, 힘들어서 홧김에 툭 튀어나온 말 같지 않았어요. '순하고 착한 아이'만 자식으로서 의미가 있다고 전제한 거나, 취업 못하는 자식을 향해 '짐짝'이라며 사람 구실도 못한다고 비난하는 것에, 다 같은 부모 마음이라고 공감하긴 어려웠어요. 부모 자식 관계에서마저 철저하게 효율과 이득을 계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물론 저도 무조건적인 모성신화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지나치게 신성화되어, 엄마라면 본능적으로 자식을 향한 사랑이 끝없이 샘솟아야 한다는 논리에 동의하지는 않아요.


오래전, 근대 여성 화가이자 소설가로서 불꽃같은 인생을 산 나혜석이 "자식은 모체의 살점을 떼어가는 악마"라고 괜히 그런 게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어요. 예술적 목표를 이루고자 여념이 없던 그녀가 예정에 없던 출산으로 "꼭 한 시간만이라도 마음을 턱 놓고 잠 좀 실컷 자 보았으면 당장 죽어도 원이 없을 것 같았"던 양육 과정에서 느낀 고달픔,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아실현이 막힌 상실감 등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거죠.


온라인 카페에  올린 글들에서 드러난 상실감은 이런 맥락과는 좀 다르게 다가왔어요. 아이가 사춘기 때 자기 뜻대로 공부 안 해서 화가 나고, 그러더니 결국 재수해서 사람 고생시키고, 그러더니 취업도 못하고 수발들게 해서 속 터진다는 내용이잖아요. 신생아를 혼자 키우다 물리적, 신체적 한계에 다다른 나혜석이 자식을 악마라고 원망한 것과는 사뭇 느낌이 달랐어요.

계속해서 자식을 탓하고, 원망하고, 미워한 긴 세월이 느껴졌어요. 이렇게 지속적으로 자신을 한심하게 여기는 부모 밑에서 어느 자식인들 제대로 클 수 있었을까, 거꾸로 저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서관에서 중학생 아이들을 대상으로 독서 수업을 하던 중 그런 질문이 나왔어요. 자기 핏줄도 아닌 아기를 어른들이 입양해서 부모 노릇을 하며 키우는 이유가 뭘까? 아이들이 저마다 손을 들고 말했어요. 놀랍게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그들은 커서 그 자식이 보상해 줄 것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말했어요. 자식을 못 낳는 부부가 보상을 바라고 아기를 입양해서 키운다는 거예요.


저는 아이들이 가정에서, 학교에서, 주변에서 받는 메시지가 무엇이길래 다들 입을 모아 '보상'을 말할까 마음이 좀 아팠습니다. '자식은 부모에게 커서 현실적 보상을 해줄 것이며 이 기대감 때문에 키우는 것이다'라는 가설을, 아이들 스스로 세우지는 않았을 거예요. 은연중에 아이들이 주변에서 받는 메시지가 그러했겠지요.


이쯤 되면 우리는 왜 자식을 낳고 키우는 걸까 근본적인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유독 생애주기별 똑같은 과제를 달성하며 살아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지요. 때 되면 졸업하고, 때 되면 취직하고, 때 되면 결혼하고 출산하고.


아이 낳고 키우는 것도 그저 이 사회가 획일적으로 강요하는 인생 사이클의 한 부분으로서 선택한 거라면, 그런데 그 과제가 의외로 몸과 마음, 영혼까지 탈탈 털릴 만큼 힘들어서 화가 난다면, 그건 아이 때문이 아니라 본인이 아이를 낳고 키울 정도의 깜냥을 지녔는지, 못 지녔는지 제대로 성찰해 보지 못한 결과가 아닐까요. 무엇보다 그 선택으로 인생이 고단해졌다 한들, 태어나게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 아이를 원망하는 건 타당하지 않겠지요.


사회가 지나치게 '엄마'에게만 양육의 짐을 지워서 힘들다면, 사회 시스템을 보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또한 성인이 되었는데도 독립하지 못하고 전적으로 부모에게 의지하는 문제도 본인이 어떻게 아이를 키웠는가, 되돌아볼 일이고요.


자식이 기대만큼 크지 못한 데 대한 회한 또한 자식이 아니라 자신을 겨냥해서 하는 게 먼저입니다. 자기 욕망을 실현해 주지 못하는 자식에 대한 원망이라면, 자식이 아니라 그 욕망에 문제가 있는 거겠지요. 자식과 나는 엄연히 다른 삶을 사는 타인인 걸요.

그 타인을 키우고 보살피느라 수고한 게 억울하다고요? 그 수고는 부모가 아이를 갖기로 결심한 순간 이미 예정된 일이었는 걸요. 사실 효율만 따진다면 자식을 낳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있을까요. 그런데 우린 기꺼이 낳았습니다.


'알쓸별잡'에 나온 장항준 감독이 아이와 연극을 많이 봤었는데, 그건 아이가 장차 이 길로 들어설 거라는 기대를 갖거나, 혹은 이런 쪽으로 재능을 키우기 바라서는 아니었다고 해요. 그때 본 연극은, 아이는 물론 자신도 무슨 내용인지 기억도 안 난대요. 그 연극을 보며 돌아오는 길에 나눈 대화, 주고받은 눈빛, 그 따듯한 분위기만 생생히 떠오른다고 합니다. 그 기억이 아이에게 살아갈 힘이 되어준다고 생각한대요. 아이뿐일까요? 부모의 삶에도 온기를 지피는 추억 한장일 거예요.


부모가 아이를 키우는 건, 그 아이가 해줄 '보상' 때문이라고 말한 학생들에게 이야기해줬어요.


"선생님은 아이들을 키우는 매 순간이 다 소중했어요.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기쁨과 슬픔, 고달픔, 고민, 환희, 애처로움, 부끄러움, 좌절, 설렘,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게 없었어요. 물론 때로는 '엄마'란 명찰 반납하고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순간이 소중했고, 그 덕분에 내가 어른으로 거듭났다고 생각해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미 모든 보상을 받았다고 생각해요. 여러분의 부모님도 아마 선생님과 같은 마음일 거예요. 설혹 충분히 표현은 못 하시더라도.“


자식은 부모 인생의 성적표도 아니고, 부모가 노후에 받을 보상도 아닙니다. 때론 기쁘고 벅찬, 때론 씁쓸하고 고달픈, 그러나 돌아보면 결국 내 인생의 매 순간을 추억으로 채워주는 고마운 존재라고,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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