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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Aug 28. 2023

학군지 이사가 고민이세요?


오늘 부쩍 선선해졌습니다. 중학생 아이. 자유로운 지방 신도시에서 마음껏 뛰어놀다가 사정이 있어 서울의 학군지로 이사 온 지도 그럭저럭 1년이 다 되어갑니다.

선행도 뭣도 없이 학군지로 이사 가는 게 맞는지 고민을 많이 했어요. 처음에 아이가 원해서 대치동 학원순례도 했었는데 대놓고 비웃는 학원장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선행 안 한 아이는 처음이라고요.


하지만 아이가 너무 당당하게 학원장한테 여기 애들은 주로 무슨 공부하냐, 어디까지 하냐, 문제집은 뭐 푸냐, 꼬치꼬치 물어서 처음에는 무시하던 원장님들이 '애가 참 당당하다. 상담하면서 이렇게 엄마는 가만있고 애가 적극적인 건 못 본 것 같다. 처음에는 고전할지 모르지만 뭘 해도 잘할 것 같다'며 덕담을 건네주기도 했습니다. 립써비스였을지언정 엄마 입장에서는 감사했어요. 너무 대놓고 무시하는 분위기에 약간 주눅 들 뻔했었거든요.


예상대로 영어, 수학에서 고전했어요. 영어는 학원도 다 끊고 자기가 약한 부분은 자기가 잘 안다며 집중공략해서 난도가 예전 학교보다 몇 배는 어려워진 시험을 예전 학교에서 받는 성적대로 회복하는 데 성공했어요. 처음에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점수에 충격도 받았지만 결국 혼자서 20점 넘게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날 아이가 학교에서 돌아와 거의 울먹이며 너무 기쁘다고 말하는데 제가 다 뭉클했어요.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게 느껴져서요.


그럼에도 예전 학교에서 받는 성적만큼 모든 과목을 회복한 건 아니라서 여전히 어려움도 있어요. 아이가 바뀐 시험 난도와 문제 푸는 속도에 적응하려고 본인이 현 학교 기출문제 몇 년치를 가져가서 학교에서 같은 조건으로 수없이 풀어본 게 일단 효과는 있었다네요. 어떻게든 길을 찾겠지 싶어서 지켜보는 중입니다.


애매한 중학교 중학년으로서, 학군지 이사를 왔으니 주변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많이들 궁금해했어요. 또 학군지 이사를 가야 하는지, 혹은 가도 되는지 물어보시기도 하고요. 이런저런 대답을 해주다 보니 몇 가지가 추려졌어요. 일단 학군지 이사는 아이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은 아니잖아요. 그러니 부모님이 어떤 성향이냐가 상당히 중요하다고 보는데, 저는 부모님이 아래와 같은 성향이라면 애를 위해서나, 가정을 위해서나 그냥 안 오는 게 맞다고 봅니다.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이니 취할 건 취하고, 버릴 건 버리시길요.


'영끌'해서 무리하게 오는 것? 신중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온라인 카페에서 본 글인데요, '영끌해서 기껏 학군지 왔더니 애가 공부 열심히 안 하고 낮잠만 잔다. 애가 미워 죽겠다'고 어떤 학부모님이 푸념하셨어요. 애가 기껏해야 초등 고학년이던데, 낮잠 자면서 영문도 모를 미움을 받고 있는 아이가 좀 안쓰러웠습니다. 초등 고학년이라고 해봐야 너무 어립니다.

반드시 특목고 보내겠다, 의대 보내겠다, 이런 생각이라면 마음이 급해지는 것도 알겠는데요, 중요한 건 우리는 '의대에 갈 정도의 좋은 교육 환경을 내 자식에게 제공해 주겠다'는 결심은 할 수 있어도 '내 아이를 의대에 보내겠다'는 결심을 할 수는 없어요. 내 인생이 아니잖아요. 후자의 결심을 하는 순간, 자식하고 사춘기 내내 심하게 갈등하고 성인이 된 다음, 자식이 부모 척지고 살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그러니 자식한테도 내가 해줄 수 있는 만큼 해주고, 내 나름대로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했는데도 애가 공부 안 하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공부 안 하든, 못 하든, 내 자식이잖아요. 가만 보면 본말이 전도되는 경우가 많아요. 무엇을 위해 애 공부를 시키는 건지 점차 잊어버리는 부모님을 종종 봅니다. 애가 공부를 못하면 자존감이라도 살아 있어야 다른 일을 하죠. 공부 못한다고 기를 팍팍 죽여서, 그나마 아이에게 있는 다른 종류의 재능도 발휘할 수 없게, 애를 완전히 꺾어놓고 나중에 성인 된 다음에 애가 방황하고 힘들어하면 또 한탄합니다. 자식 키워봐야 소용없다고. 법륜스님이 말한 어리석은 부모의 전형이랄까요. 저도 그런 실수를 종종 범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과오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부모가 할 수 있는 만큼 지원해야 합니다. 너무 '영끌'해서 무리하게 오지 않기를 권합니다. 저는 비장하게 '영끌해서 학군지 왔으니 어떻게든 내 자식 좋은 대학 보내리라'라는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자식 교육만큼은 너무 비장한 게 득이 아니라 독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기 때문에 가정이 처한 상황을 잘 따져보시기 바랍니다.

혹시 학군지에서 적응하기 힘들면 다시 돌아가도 된다고,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이사 올 수 있게, 퇴로를 너무 막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다시 돌아가는 게 패배하는 것도 아니고요. 아이한테도 그 부분을 충분히 설명해 줘서 아이가 오히려 편안한 마음으로 이것저것 시도하며 적응 중인 것 같아요.



성적에 너무 목숨 거는 부모님? 더 힘드실 수 있어요.


건너서 아는 분이 저보다 몇 년 전에 이곳에 와서 지냈는데, 원래도 아이 성적에 모든 에너지를 쏟는 분이었는데 더 심해지셨더군요. '기승전 성적'밖에 생각을 안 하는데 문제는 균형감을 상실했달까, 얘기하다 보면 뭔가 잘못된 정보를 맹신하면서 주변에 포진한 사교육 업체 말에 너무 휘둘리고 계셨어요.


아이는 인풋 대비 아웃풋이 나오는 무슨 기계가 아니잖아요. 아이를 키우는 건 처음부터 끝까지 부모가 자기 불안을 다스리는 과정인 것 같아요. 불안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하죠. 그런데 아이가 받는 평가에 일희일비하고 불안해서 안달복달하는 부모라면, 이렇게 평가와 줄 세우기와 거기에 관한 이야기가 뒤덮는 학군지에서 아이를 키우다가는 바짝바짝 말라갈 거예요.


부모의 불안은 그대로 아이에게 전염되고, 부모가 아이를 믿지 못하면 아이는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이 되기가 쉬워요. 요즘 같은 핵가족 시대에는 부모의 영향력이 엄청 커요. 아이에게 부모는 우주예요. 우주가 나를 한심하게 보면, 그냥 난 한심한 사람인 거예요. 아이의 우주 노릇하기가 부담스럽다고요? 네, 저도 우주 같은 거 하기 싫은데요,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어쩌겠습니까. 괜히 부모가 아니고, 괜히 어른이 아니잖아요. 동요하는 제 자신을 억누르고 아이를 믿어주며 지켜봐 주는 것. 그 정도는 힘들어도 해야죠.


지금 당장 아이의 장점은 하나도 안 떠오르고 단점만 열거하게 된다? 진심으로 말리고 싶어요.


<본질육아>를 쓴 지나영 교수님이 어릴 때부터 엄청난 ADHD라서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하시죠. 존스 홉킨스 의대 교수가 된 지금까지도 실수하는 일이 많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런 단점이 있을지언정 자신의 강점으로 상쇄하면서 여러 성취를 이루셨어요. 만약 자기 부모가 자신의 ADHD에만 집중해서, 약점만 강조해서 자신을 키웠다면 결코 지금과 같은 모습은 되기 어려웠을 거라고 하세요.


아이들은 부모가 지적하는 약점을 곧 '자신'이라 여겨요. 약점을 '자신의 일부'라고 인식하기가 안 그래도 어려운데, 부모가 지속적으로 그것만 말하면 그냥 자기는 곧 약점 자체인, 못난 인간이 되는 겁니다. 어른도 마찬가지지요. 누군가가 지속적으로 자신을 비난하고 모자란 사람 취급할 때 힘이 나던가요? 회사 상사가 너 같이 무능한 인간은 처음 봤다고 막말을 하면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의지가 불끈 샘솟던가요? 웬만큼 내면이 단단한 사람도 속수무책으로 찌그러지기가 쉽습니다.


하물며 아이 입장에서 우주와 같은 부모가 계속 자기가 부족한 존재라고 하는데 그 아이가 뭔가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고, 학습동기라는 게 생기기는 어려울 거예요. 자기가 괜찮은 사람 같아야 다음 스텝을 밟을 용기가 생길 텐데 부모가 앞장서서 용기를 꺾어버리면 아이는 뭔가 해내기 어려운 존재가 됩니다.


내가 아이의 약점에만 너무 집중하는 부모라면(일단 부모님부터 자신을 못 믿는 유형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계속해서 아이의 약점이 새롭게 드러날 학군지에 굳이 안 오는 게 낫다고 봅니다. 저희 아이도 전에 학교에서 전학 간다고 하니 모든 선생님들이 '너 없으면 누구 보고 수업하냐'라고 할 정도로 완전 학교의 대표 모범생이었고, 뭐든 잘하는 애였어요.


하지만 여기 오니 못하는 것도 있다는 게 드러났지만, 저는 아이한테 여기 애들은 그저 어릴 때 일찍 시작했을 뿐이고, 너처럼 혼자 좌충우돌하면서 길을 찾는 게 시간은 걸리고, 당장은 뒤지는 것 같아도 그게 너의 큰 잠재력인 거고, 무슨 대학을 가느냐와 별개로 네 인생을 이끌어주는 동력이 될 거라고 말해줬어요. 낙담하는 아이를 위로해 주려는 의도도 있었지만 제 진심이었습니다. 저는 여기 와서 아이를 향한 주변의 평가가 일시적으로 달라졌어도 원래 아이가 갖고 있는 강점을 계속해서 지지해 줬어요. 설혹 성적이 안 좋거나 생각만큼 이름 있는 대학에 못 가더라도 진심으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할 마음이 단단히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괜히 와서 애 기죽이고 부모 자식 간에 서로 마음만 다칠 것 같습니다. 믿어준 덕분인지 아이의 현재 적응 스코어는 대략 괜찮습니다. 자신감도 회복했고 친구들과 관계도 좋고 대체적으로 순항 중이지만 어떻게 변할지는 모르죠. 다만 난관을 넘어본 경험을 쌓았으니 다음 시련이 와도 또 이겨낼 거라고 믿어 봅니다.


생각보다 글이 길어졌네요. 저는 사교육 정보로 무장한 '돼지엄마'도 아니고 어쩌다 보니 학군지라고 불리는 곳에 아이와 들어와서 이제 겨우 1년 남짓 지낸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이런 글을 쓴다는 게 혹여 주제 넘게 보이지는 않을까, 살짝 걱정도 됩니다.

하지만 제 자신이 학군지에서 자라기도 했고 아이들 키우는 데 고민이 많았던 만큼, 저같이 평범한 부모들이 할 수 있는 '학군지 고민'에 관한 현실조언을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 몇 자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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