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은수 Oct 22. 2023

자아노출은 어디까지 해야 하나요?

제가 사이버대학에서 심리학을 배웠었는데요, 그때 자아노출이란 개념을 알게 되었어요. 인간관계를 맺을 때 우리는 자신을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가 고민하게 됩니다.


학문적인 개념과는 좀 다르지만, 글쓰기에서도 이를 고려하게 되는 순간이 옵니다. 특히 나의 일상에서 글감을 가져오는 생활 에세이의 경우 이 문제를 더 자주 떠올릴 수밖에 없어요. 아무래도 나를 둘러싼 여러가지가 드러나게 되는데 독자에게 어디까지 보일 것인지 판단이 필요할 때가 있어요. 실제로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나를 어디까지 드러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저는 첫 책을 낼 때 큰아이 이야기가 많이 들어갔었는데요, 아이가 나오는 부분은 사전에 다 보여줬어요. 쓰다 보니 아이와 내가 힘든 터널을 지나온 이야기도 자연스레 나왔는데, 제가 보기에는 아이와 저의 성장기라서 별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아이가 눈물을 글썽이며 자기의 이런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는 게 싫다고 했습니다. 출판사에 초고가 넘어간 상태였지만 다시 조율해서 그 부분은 삭제했어요. 제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아이한테 상처를 주면서까지 책을 내겠나 싶은 마음이었거든요.


그 이외에도 주변인 신상이 너무 구체적으로 드러날 위험이 있는 부분은 삭제하거나 수정했습니다. 나도 나지만 주변인들의 사례가 의도치 않게 적나라하게 나올 필요는 없으니까요. 물론 에세이 아니라 소설조차 작가들이 누군가의 사연에서 영감을 얻어 쓰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특정인의 사연을 모티브로 삼은 것이 명백한 작품도 있어요.


우리가 각자의 무인도에서 사는 게 아닌 이상 이런 일이 어느 정도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불필요하게 타인의 신상을 드러내지는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 이슈가 다뤄질 때 공인이 드러나는 것과 달리, 평범한 사람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건 신중해야 하겠지요.


가족과 주변인 문제도 주의해야 하지만 “나는 어디까지 드러낼 것인가”가 가장 고민스러운 부분입니다. 솔직한 글이 독자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건 너무 잘 알지만 어디까지 솔직할 것인가는 결국 내가 정해야 하거든요. 우리가 타인을 사귈 때 '자아노출'하는 정도는 상대와 만나는 시기가 얼마나 오래 되었느냐, 얼마나 믿을 수 있는 사람이냐, 나랑 마음이 얼마나 통하냐 등에 따라 결정되지만 독자는 불특정 다수잖아요. 전적으로 내가 정할 수밖에요.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나의 허물을 너무 꽁꽁 감추면 에세이가 아니라 정보 전달 글처럼 무미건조해서 에세이를 찾는 독자의 기대에 어긋납니다. 그렇다고 일기 쓰는 것처럼 앞뒤 재지 않고 내 감정을 쏟아내듯이 쓰면 자칫 감정이 너무 앞서는 글이 되어 오히려 독자를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지나친 자기 비하도 마찬가지고요. 그런 글이 활자화되어 출간이라도 되면 나중에 바로 잡고 싶어도 되돌릴 수가 없지요.


저는 이럴 때 <박완서의 말>이란 책에 나온 작가님의 말씀을 생각해요.


"저는 원래 뭔가 쓰고 싶은 열정과 힘이 솟아올라야만 작품을 쓰게 되는데, 그 쓰고  싶은 열정과 힘을 솟아오르게 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에요.

이를테면 사회적으로 부당한 여건이나 운명의 장난 같은 것에 의해서 참 억울하고 서러운 일이 생겼을 경우 그것을 증거하고 싶다는 마음이 속에서 끓어오르게 되고, 그와 같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때 글을 쓰게 됩니다."


자아노출을 어디까지 할 건지, 독자에게 나를 어디까지 보여줄 건지, 물건을 사면서 상인과 흥정하듯이 따지고만 있다가는 아무 글도 쓰지 못할 거예요. 글을 다 쓰고 나서 다시 한번 점검하는 과정은 필요하겠지만 글을 쓰기 전부터 '여기까지만 써야지'라는 마음을 먹으면 나조차도 설득하지 못하는 글이 되어 버릴 가능성이 높아요.


박완서 작가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뭔가 증거하고 싶다는 마음이 차오를 대로 차올라, 나를 밀고 올라와야 글이 써지는 거잖아요. 그렇다면 그 순간은 계산하기보다는 일단 써야 한다고 봅니다. 그러고 보면 '자아노출을 어디까지 할 것인가'란 질문 대신 '자아노출을 따지는 건 언제 할 것인가, 혹은 '자아노출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어디까지'에는 정답이 없고 각자의 선택이 남는 거겠지만, '언제'나 '어떻게'란 의문사에는 비교적 모범답안이 있다고 생각해요. 두 가지 모두 일단 글을 다 쓴 다음으로 미루기를 권합니다.


<소설가의 귓속말>에서 이승우 작가님이 검열관이 나의 내부에는 있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마음속 검열관이 할 일은 '어디까지' 적당히 나를 드러내고 감출지를 정하는 건 아닐 거예요. 독자에게 더 근사한 나로 보이도록 포장하라는 뜻도 아닐 거예요.


솔직하고 거짓없되, 타인에게 상처 입히는 부분은 없는지, 나를 속이지는 않았는지 되짚어 보는 게 중요해요. 글 쓰는 방식도 독자에게 적합한지 살펴보고요. 자아노출을 결정하는 것도 내부의 검열관일텐데, 그 검열의 목적은 단순히 나를 얼만큼 감출지 결정하는 데 있다기보다 내 글이 얼마나 치열한가를 돌아보는 데 있을 것입니다.

이전 03화 글을 어디에 공개해야 하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