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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Oct 22. 2023

글을 어디에 공개해야 하나요?

이유미 작가의 <일기를 에세이로 바꾸는 법>에서는 혼자만 보는 일기도 글쓰기의 밑거름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 일기가 '글쓰기의 시조새'라는 거지요. 실제로 저도 첫 책을 낼 때 남몰래 꾸준히 쓴 일기에서 많은 글감을 얻었어요. 보통 출간을 꿈꾸는 작가들이 처음 착수하는 작업이 자료조사인데, 저의 일기는 '나'란 사람에 대한 방대한 자료가 되어 준 거지요.


일기는 공개하지 않는 걸 전제하잖아요. 지면에 대고 굳이 나를 꾸미거나 포장할 필요가 없지요. 한 사람의 마음속 깊은 솔직한 목소리가 적나라하게 담기기 때문에 일기는 쓰는 입장에선 크게 애쓰지 않았는데 독자에게 각별한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다만 혼자만 본다는 생각에 앞뒤 설명 없이 감정을 마구 쏟아내기만 하는 일기는 일시적으로 해방감은 주지만 정제된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고 인과관계를 따지면서 자신을 성찰하는 역할까지 하기 힘든 면도 있어요.


본격적으로 글을 쓰고 싶다면, 일기에 머물지 말고 반드시 누군가에게 글을 공개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글쓰기 수강생에게 이런 말씀을 드리면 어디에 공개해야 하는지 묻는 분들이 계세요. 그리고 세트처럼 같이 따라오는 질문은 독자는 누구로 설정하느냐입니다.


저는 온라인 카페부터 시작했었어요. 그때는 거창한 목표를 갖고 글을 쓰기 시작했던 건 아닌데요, 일상적이고 가벼운 수다도 좋지만 기왕이면 활자화되는데 온라인 카페에도 좀 더 공들인 글이 등장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시작했던 일입니다. 원고료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온라인 카페에서 내게 무슨 보상을 해주는 것도 아닌데 한번 쓸 때마다 꽤나 공을 들였어요.


제가 읽은 책 소개를 종종 썼는데 "00님의 책 리뷰가 너무 재미있다"는 응원을 받다 보니 더욱 정성스럽게 쓰느라 한번 봤던 책을 다시 들춰서 몇 번이나 확인해야 했어요. 그 덕분에 한 권을 읽더라도 더 완벽하게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지요. 또 책을 읽으며 떠오른 일상의 단상도 쓰고, 좀 더 편안한 분위기의 온라인 카페라면 친구에게도 선뜻 터놓지 못하는 내밀한 이야기도 썼습니다. 친구에게 전화해서 말하면 일상의 푸념으로 휘발될 이야깃거리도, 기승전결을 갖춘 글로 쓰면 그 자체로 짤막한 에세이가 되었어요. 그렇게 글을 쓰다 보니 나중에는 종일 댓글 알람이 울릴 정도로, 카페 회원들의 반응이 뜨거웠어요.


빙 이미지 크리에에터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특별한 목적의식을 갖고 쓴 것도 아니고, 글쓰기를 공개할 플랫폼이나 매체를 신중하게 고른 것도 아니며, '엄마'라는 공통점 외에는 딱히 묶일 게 없는 불특정 다수의 회원들을 대상으로 썼을 뿐인데 제가 읽어도 제법 재미있으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괜찮은 글이 나오더군요. 혼자 일기로 쓸 때보다 좀 더 정갈하게 쓰도록 노력하다 보니 나중에는 크게 애쓰지 않아도 그 정도 톤의 글이 자연스럽게 나왔어요.


요즘에는 포털 사이트의 온라인 카페 글도 구독을 할 수 있는데 글 한 편 올릴 때마다 적게는 몇 십 명, 많게는 몇 백 명씩 구독자가 느는 게 신기했어요. 무명의 필객이었지만 오늘은 또 무슨 글을 써서 올릴까, 글 쓰는 매일 아침이 즐거웠어요.


아이패드로 그린 그림을 SNS에 꾸준히 올리는 유재순 작가님 이야기를 본 적이 있어요. 아흔 살 나이에 아이패드로 그림 그리는 게 생각보다 복잡하고 어려우셨다고 해요. 따로 미술을 배우셨던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아이패드를 독학으로 배워서 그림을 계속 올리신 거예요. '여유재순'이라고 된 작가님 인스타그램 계정에 들어갔더니 960여 작품이 올라와 있었습니다.


기초가 부족하다고 생각되어 그림 교실도 따로 다니실 정도로 열정적인 할머니시지만, 이 분의 철칙은 마음에 안 들어도 끝까지 완성하고, 못 그리면 못 그린 대로 그냥 공개하는 거였대요. 저는 이 작가님의 태도가 너무 좋더라고요.


초심자인데 너무 대단한 그림, 남들이 모두 우러러 보이는 걸작, 이런 거에 대한 부담을 느끼다가는 평생 그림 한 점 공개하기 어려우셨을 거예요. 욕심 없이 그리고, 그 나름대로 노력해서 완성했으면 거리낌 없이 공개하신 겁니다. 노년의 삶이 한없이 적적하고 외로웠던 할머니가 이제는 사는 게 재밌다고 인터뷰에서 말씀하시는 걸 보니, 저까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어디에 공개하고, 누구를 대상으로 쓸지, 그런 전략을 짜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요. 그러나 작법이론이나 원칙이 나를 너무 앞지르기 시작하면 그 거대함에 짓눌려 내 글이 오히려 안 나올 수도 있어요. <글 잘 쓰는 법, 그딴 건 없지만>을 쓴 다나카 히로노부 작가는 글을 쓰면서 '타깃을 상정'하라는 말의 어폐를 지적하며 글과 사격을 혼동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글은 과녁을 맞춘 결과물이 아니라 그냥 나란 사람을 풀어내는 과정입니다. 어디에 공개할지, 누구를 대상으로 쓸지, 그 고민보다 먼저 할 것은 편안하게 나를 써내는 감각을 회복하는 게 아닐까요. 누구 눈치도 안 보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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