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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수 Feb 20. 2024

'허드렛일'이란 말에 상처받은 너에게

휴학하고 다양한 경험을 실컷 하겠다던 아이. 청소년 상담을 오랫동안 했던 지인 이야기로는, 요즘은 대학교 2, 3학년까지 후기 청소년기로 보기도 한대요. 요즘 애들은 중고생 시절을 학교 안에 갇혀 쳇바퀴 같은 생활만 해서 나이는 덜컥 성인이 되었어도, 사회 경험도, 인간관계 경험도 과거에 비해 더 협소하고 평면적이라고 합니다. 그 때문에 대학생이 된 이후, 뒤늦게 사춘기가 오고 질풍노도의 시기도 오는 경우가 많다 합니다.


그래서 대학생이 된 아이의 여러 시도를 되도록 응원해 왔습니다. 휴학도 말리지 않았고,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도 면접 보고 힘들게 들어간 만큼, 즐겁게 잘 다니라고 격려해 줬고요. 문제는 몇 달 후에 이 아르바이트가 끝난 다음, 아이가 또 다른 체험으로 지목한 아르바이트였어요. 게스트하우스 스태프로 들어가서 일해보겠다는 거예요.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인 저는, 아직은 어려 보이는 애가 집 밖에서 지내며 일을 한다는 게 내키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엄마가 차려주는 밥 먹으면서 다녀도 일하기 힘든데, 낯선 일터의 숙식 제공이 그렇게 좋기는 어렵다고 생각했거든요. 더구나 말이 좋아 '스태프'지, 종일 게스트하우스를 닦고 치우고 정리해야 하니 일의 강도도 너무 세 보였고요.

제가 탐탁지 않아 하자, 아이가 요즘 대학생들이 많이 하는 아르바이트고 자기에겐 특별한 경험이 될 거라고 했어요. '특별한 경험'이란 단어에 무슨 버튼이 눌린 걸까요? 저도 모르게 실언을 하고 말았습니다.


"특별한 경험? 글쎄? 그래봤자 객실 청소하고, 치우고, 쓰레기 버리고, 사실 허드렛일 아니니? 그게 앞으로 네가 생각하는 진로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대답 없이 가만히 있던 아이가 말했어요.


"엄마, 나 지금 그 말에 좀 상처받았어. 그리고 엄마한테 실망한 거 같아. 엄마 직업에 귀천이 있는 사람이었어? 엄마가 늘 몸 쓰는 일도 똑같이 소중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일이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 말은 흠.... 그런 식이면 내가 지금 하는 아르바이트도 허드렛일이야. 뭔가... 엄마가 내 일도 사실 하찮게 여겼던 건가 싶어서 마음이 좀 그러네."


아차 싶었지만 이미 말이 나간 뒤였어요. 급하게 주워 담으려 했지만 말할수록 더 엉켰어요.


"아니, 내 말은 네가 지금 하는 일을 무시하는 건 아니고, 청소하고 그런 일을 무시하는 것도 아니야. 엄마도 예전에 학원강사 할 때 수업만 한 줄 알아? 교실 청소도 내가 했어. 아, 말하면 뭐 해, 학교 선생님도 마찬가지지. 중학교 기간제 교사할 때도, 애들이 대걸레를 제대로 못 빨아서 내가 고무장갑 끼고 팍팍 빤 적도 있어. 내가 그런 일 안 했던 사람은 아니야, 나도 많이 했어."


아이는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걸었어요. 변명을 할수록 이상해지는 것 같아 할 수 없이 조용히 걸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어요. 나는 모순에 가득 찬 사람인 건가? 말로는 몸 쓰는 일도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하는 일이라면서 내 아이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 건가? 그러면 존중하지 않는 사람하고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마음이 복잡해졌어요.


빙 이미지 크리에이터로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하지만 휴일에 놀러 갔던 리조트에서 메이드 몇 분이 휴게실 내 의자도 없어서 땅바닥에 앉아 쉬고 있던 모습이나, 대학교 때 식당에서 홀 서비스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불쾌하게 추근대던 남자 손님, 신문에 가끔 나오는 숙박장소에서 난동 피우는 진상 투숙객 등, 안 좋은 잔영이 뒤엉켜 떠오르면서 말리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색한 분위기로 집에 와서 서로 말없이 시간을 보냈어요. 밤에 자려는데 아이한테 "나 상처받고 좀 실망스러운 마음도 있는데, 부모 입장에서는 걱정이 되어 그럴 수는 있다고 생각해."라고 카톡이 왔어요. 저도 긴 답장을 보냈습니다.


"그래, 엄마가 생각이 짧았어.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 꼭 무시하고 그런 마음보다는 걱정이 되어서 그랬나 봐. 아무튼 부모란 사람들은, 자식이 몸도 마음도 편하길 원하게 되거든. 그게 항상 바람직하거나 옳다는 건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좀 그렇게 돼. 변명 같겠지만.


또 내 경험으론, 뭔가 고되고 어려운 일을 할 때는 그걸 견디는 이유가 있어야 더 잘 버틸 수 있더라고. 예를 들어 스티븐킹이 무명작가 시절, 세탁실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식탁보에서 구더기가 나와서 손에 기어오르는 걸 참고 세탁했다고 해. 그에겐 따로 작가란 꿈이 있으니 그 시간을 버틴 거지.

나도 사실 학원강사하면서 모멸감 느끼는 순간도 많았어. 청소는 차라리 나았지. 전단지를 직접 돌려야 할 때도 있었어. 까마득하게 어린 학생들이 됐다며 무시하듯이 손을 저으며 지나가면 마음이 참 힘들었어. 하지만 이렇게 수업 경력을 쌓고 배워간다는 일념으로 버텼어. 그런 생각이면 모멸감에 마음이 다치거나 주저앉지 않아. 너에게도 그렇게 버티는 '이유'가 있길 바라는 거야."


그러자 조금 뜸을 들인 다음 아이에게 답장이 왔어요.


"엄마, 나는 그냥 그 시간이 이유야. 게스트하우스에서 일한다면 그곳의 환경과 그곳의 사람들을 매우 좋아하게 될 거야. 나는 그게 이유야."


자식 겉 낳지, 속을 낳지 않는다는 옛말이 떠올랐어요. 아이는 나와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너무 투명하고 깨끗한 거울이라 아이 앞에서 나를 비추면 이지러지기도 하네요. 부모란 그저 아이 옆에 든든한 어른이 되어 주는 걸로 충분하다고, 함부로 아이 인생을 내 것으로 가져와 살지 말자고 매 순간 다짐하는데도 참 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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