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 소년의 꿈

페트라, 요르단

by JUDE

그날도 딱히 별다를 것 없는 하루였다. 듀공을 보러 먼바다까지 나갔던 다이버들이 며칠 만에 돌아와, 그 사진을 보느라 빌라의 아침이 조금 더 시끌벅적했을 뿐이었다. 사건은 한 통의 이메일로 시작되었다.


-오빠. 큰일 났어 ㅠㅠㅠ 이거 빨리 읽어! -


다급해 보이는 제목이긴 했지만 막상 열어보니 전혀 뜻밖의 내용이었다. 구구절절 길게 적혀있던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부재중인 서울의 전셋집에 웬 남자가 찾아와 며칠 내로 방을 빼라고 했다는 것. 이유를 물어보자 건물이 통째로 팔렸고, 새 건물주가 기존 세입자들의 전세계약을 법적 검토해 본 결과 전부 효력 없음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전 주인과 작성했던 전세 계약서는 무효이니 소송을 걸던지 알아서 하고, 일단 불법 점거 중인 방은 빼라'는 말이었다. 신탁 공매, 민형사 소송, 임대차 지위확인 같은, 뉴스에서만 보던 단어들이 화면을 가득 메웠다. 반쯤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면서도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건물에 사는 사람이 몇 명인데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사기를 당한단 말인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화를 걸자 그녀는 울음부터 터트렸다.


“오빠... 엉엉. 오빠 집 어떡해... 흐엉엉”


그녀가 울먹이면서 메일로 보냈던 내용을 반복해서 말했다. 건물이 통째로 팔렸고, 전세계약은 법정 효력이 없으므로 강제 퇴거 절차가 진행 중이란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되레 화를 냈다. 내 책상 속의 부동산 계약서를 꺼내 보라고 얘기했더니 이미 그녀는 물론, 그녀의 아버지까지 나서 변호사를 알아보는 중이었다. 확실한 것은 세입자들이 소송을 걸지 않으면 당장 방을 빼야한다는 사실이었다. 단 한 푼의 전세 보증금 상환도 없이.


보증금 얘기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한 번쯤 위기를 겪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런 식일 줄은 몰랐다. 솔직히 말하면 정신이 아득해지는 가운데도 여행을 중단하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런던 올림픽에서 주저앉아 울던 펜싱선수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기회를 포기하고 이대로 돌아가면,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삼일 뒤면 준이 카이로에 도착한다. 입사 동기이자 절친인 준은, 내가 세계일주를 가겠다고 말했을 때부터 함께하고 싶어 했다. 결국 같이 출발하지는 못했지만 뒤늦게 퇴사한 녀석과 카이로에서 합류하기로 한 날이 삼일 뒤다. 녀석에게도 전화를 걸었다. 이미 그녀에게서 사건을 전해 들은 모양이었다.


"심각하냐?"

"어. 심각해. 너 지금 여행 생각할 때가 아니야. 우리 사촌 형이 변호사라 물어봤는 데 힘든 상황이래. 왜 집주인 말고 회사라 계약했냐?"

"너는 예정대로 카이로에 도착하고?"

"나야 예정대로지. 너랑 카이로에서 바통 터치하게 생겼다"


할 수 없이 급하게 한국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 비행기를 타기까지 5일, 그래도 준의 얼굴은 보고 가야겠다 싶었다. 수진쌤에게 갑작스러운 인사를 하고 곧장 카이로로 향했다. 꿈인가 싶었지만, 그녀는 몇 시간 단위로 메일로 상황을 알려왔다. 준을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두 남자의 청춘 로드무비가 허무하게 막을 내릴 위기다.


카이로에 도착하긴 했지만, 카이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기에는 정말 최악의 도시다. 매연, 모래바람, 40도가 넘는 더위, 차와 사람이 뒤얽혀 엉망이 된 도로의 소음. 그대로 가만 있다가는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았고, 준이 오기까지 아직 삼일이 남았다. 방은 잡아두고 필요한 짐만 챙겨 버스터미널로 향했다. 목적지는 이웃 나라 요르단의 페트라다.


원래는 준과 합류한 뒤에 가기로 한 곳이다. 카이로에서 합류한 뒤, 요르단과 시리아를 거쳐 터키에 입성하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내전으로 여행금지국이 돼버린 시리아 때문에 어차피 불가능한 계획이다. 결국 가기도 애매하고 안 가기도 애매한 페트라를 이렇게라도 보게 되었으니, 묘한 인연이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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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르단 와디무사(Wadimusa)에 도착하는 데에 꼬박 하루가 걸렸다. 버스에서 보트로, 다시 승합차로 총 14시간을 이동하는 데만 썼다. 거의 탈진에 가까운 상태였는데도 잠은 오지 않았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한국의 사정, 이대로 여행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사람들의 비웃음 같은 것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침내 인디아나 존스가 최후의 성전을 치르던 그 장소에 코앞까지 와 있다는 사실도 전혀 실감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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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새벽부터 유적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국경만 바뀌었을 뿐, 가는 길은 이집트인지 요르단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그저 황량했다. 페트라는 피라미드와 더불어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이며,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곳’ 같은 순위에는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이다. 트랜스포머의 무대가 되기도 했지만, 내가 페트라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영화 인디아노 존스 - 최후의 성전 때문이었다.


그 시절 꼬마 사내아이가 그렇듯 칼싸움에 빠져 지내던 나는, 인디아나 존스를 처음 보자마자 빠져들었다. 그곳이 실존하는 장소이며, 나중에 크면 갈 수 있냐는 물음에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나무로 된 마루에서 방방 뛰었던 기억이 아직 남아있다. 그 시절, 고고학자가 되겠다며 세계문화 전집을 사달라고 조르다 등짝을 얻어맞은 소년이 나 하나는 아니었을 것이다. 내 경우에는 실제로 책을 샀다. 전집을 다 읽은 것은 물론이고, 그 후로도 한동안 전설이나 괴담 같은 책에 빠져 지냈다. 그 호기심이 피라미드에 이어 페트라까지 닿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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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에서 내릴 때만 해도 내 발걸음은 비틀거렸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피곤해서인지, 두려움 때문인지 혹은 기대 때문인지 혼란스러웠다. 미간의 주름이 좀처럼 펴지질 않는다. 소년의 오랜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한참을 걸어 존스 박사가 말을 타고 천천히 지나던 협곡에 발을 디디는 순간, 소년의 꿈이 새벽안개처럼 서서히 피어나는 듯했다. 마침내 좁은 협곡의 끝에, 쏟아지는 햇살 사이로 페트라의 모습이 슬쩍 보였다. '딴다단따~ 딴다다~' 하는 주제가가 머릿속에서 저절로 재생되었다.



하마터면 주저앉을 뻔했다. 어두운 협곡을 나오자마자 쏟아진 햇살 탓이기도 했고, 간밤의 피로가 덜 풀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페트라의 실체는 너무나 거대하고 웅장했다. 고개를 최대한 꺾어 들고 아래 위로 훑고 나니 온 몸에 전율이 흐른다. '이것이 페트라구나'라는 것 외에는 다른 어떤 생각도 나지 않는다.


사막의 바람이 불어오자 마침내 소년의 꿈이 기지개를 켜고 깨어났고, 내 입에서는 신음 같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눈부신 태양 때문에 황금빛으로 보이던 페트라가 서서히 붉은빛으로 바뀌자 그 아름다움이 극에 달했다. 수 천년 동안 불어온 바람이 쓰다듬었을 적갈색의 바위는 따스했다. 그 온기를 느끼면서 천천히 벽을 따라 걸었다.


신전 안은 아무것도 없이 그저 텅 비었다. 영화에서 유령이 된 십자군 기사가 성배를 지키고 있던 장소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지만, 신전의 이름인 알 카즈나(Al Khazna)가 보물창고라는 뜻인 것을 알고 나면, 존스 박사의 이야기가 영화가 아닐 수도 있다는 믿음이 생긴다. 무리 지어 움직이는 여행자들의 어깨너머로 들려온 설명에 따르면 원래는 나바티안 왕의 무덤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벽 여기저기 가득한 총알 자국으로 보아 도굴꾼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그 어디에도 성배가 숨어있는 비밀의 문은 없었다. 알 카즈나의 보물은 사실 알 카즈나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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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길은 자연스레 이어져 한때 중동과 아프리카를 잇던 사라진 대도시의 모습을 천천히 눈 안에 새긴다. 무덤, 극장, 목욕탕 등, 완벽한 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던 페트라는 106년, 로마에 의해 멸망했다. 이후 대지진으로 인해 도시 전체가 흙에 묻혀 역사에서 모습을 감춘다.


나는 스스로 존스 박사가 되어, 눈 앞에 나타난 전설 속 도시 구석구석을 뒤지고 다녔다. 새벽에 냉동실에서 꺼내 온 1리터의 물은 어느새 절반이 사라졌지만 이번 만큼은 사막의 열기도 나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마침내 세상의 끝이라는 글을 따라 정상으로 가는 계단에 올랐다. 정상에 있는 신전을 지나, 기암절벽 끝에 세상의 끝이 펼쳐져 있었다.



누렇고 붉은빛을 띤 언덕의 한쪽 끝은 하나 같이 날 선 절벽으로 끝났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모래와 돌뿐인 그 풍경을 두고 누군가 세상의 끝이라는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그러나 등짝을 얻어맞으며 세계문화 전집을 손에 넣었던 소년에게는 약속의 땅이다. 절벽에 걸터앉아 바람에 실려 온 모래 냄새를 맡고 있으니, 흠뻑 젖은 옷이 차갑게 몸에 달라붙으며 이것이 실제임을 새삼 일깨웠다.


기절이라고 불러도 좋을 그 날 밤, 나는 절벽 아래에서 커다란 카우보이모자를 쓰고 말에 오른 소년의 꿈을 꿨다. 그리고 이틀 뒤, 푸른색의 블랙홀로 떠나는 버스에 준을 태워 보내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어린 소년의 꿈은 이루어졌지만, 어른이 된 소년의 꿈은 바람 앞의 등불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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