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 트레킹 중독자가 된 사연

바릴로체, 아르헨티나

by JUDE

바릴로체가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얘기했던가? 상관없다. 어차피 앞으로 살아가는 내내 계속해서 말하게 될 테니까. 다만 바릴로체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몇 가지 팁이 필요하다.


우선, 가능한 높은 곳에 있는 숙소를 잡아야 한다. 외국 치고는 드물게, 산 등선을 따라 집이 지어진 바릴로체는 오르막이 제법 가파르다. 한국처럼 인구가 붐비는 곳이 아니니, 언덕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는 버스 따위는 당연히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릴로체에서는 가능한 높은 곳을 선점해야 한다. 그곳에서 내려다보는 호수의 풍경이야 말로, 영혼을 적시는 수프 한잔이다.


그리고 최대한 오래, 계획 없이 머물러야 한다. 그래야 이 도시가 품은 매력을, 마치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선물 보따리를 푸는 느낌으로 바라볼 수 있다. 환율 계산을 잘 못해서, 달러가 많이 남은 친구가 있으면 금상첨화.(아르헨티나는 자국민의 달러 소유가 법으로 금지되어 있다. 때문에 길거리 환전소에서 US 달러로 아르헨티나 페소를 사면, 은행 공시 환율의 수 배에 달하는 페소를 받을 수 있다.)



바릴로체에서 눈을 뜬 아침에 제일 먼저 마을 외곽에 있는 버스 터미널로 갔다. 그리곤 미리 끊었던 버스표를 2일이나 연기했다. 무려 표값의 30%나 되는 수수료를 내야 했지만, 준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야. 내가 낼게. 바꿔 바꿔. 이 형이 좀 많이 부자야 "


대체 환전을 얼마를 했길래 싶었지만, 부자와 여행을 하는 경험은 그리 나쁘지 않다. 이제 할 일은 다시 마을로 가는 버스를 탄 뒤, 한층 더 여유롭게 빈둥거리는 일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건 버스가 출발한 지 20분 정도 지났을 때였다. 오른쪽 어깨를 따라 계속 펼쳐지던 호수가, 어느 순간 모습을 감추었다. 어느새 도로는 비포장 길로 바뀌어 열린 창문으로 흙먼지가 가득 들어왔다.



멀리 떨어져 앉아있던 우리는 서로 얼굴을 한번 마주치긴 했지만, 달리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이런 것도 돈이 충분한 자의 여유인가?


한참 동안 황무지를 달리던 버스는, 녹음이 눈부신 어느 산 아래에 멈춰 섰다. 정류장에 Mountain Cathedral이라고 쓰여있다. 꼭대기에 살짝 내려앉은 눈을 보니, 시즌이 되면 스키장으로 사용되는 리조트였나 보다. 혹시나 하고 케이블카 매표소로 가보니, 시즌 종료로 모든 리조트 시설이 문을 닫았다. 과연, 이 정도 아름다운 곳이면 관광객이 있을 만도 한데, 버스에서 내린 사람은 물론, 광장에서 움직이는 것이라곤 우리 둘 뿐이었다.


뜻밖의 여정이었지만, 당장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어차피 버스도 1시간 간격이다. 우리는 혹시나 땀이라도 날까, 최대한 천천히, 녹색이 보이는 곳은 모조리 더듬으며 천천히 어슬렁거렸다.



돌이켜보면 시즌 아웃이라고 적힌 간판을 봤을 때, 그 자리를 벗어났어야 했다. 그랬다면 괜스레 텅 빈 리조트를 어슬렁 거리다 '프레이 산장까지 1700미터, 4시간’이라고 쓰인 멋진 나무 간판을 보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 간판 앞에 세워진, 배낭을 메고 이제 막 발걸음을 뗄 준비를 하는 여행자의 동상에서, 기념사진을 찍지 말았어야 했다.


세상에는 미스터리한 일이 많지만, 우리가 그 산에 오른 것도 그중 하나임에 틀림없다. 분명히 그 동상 앞에서 사진만 찍을 생각이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 길을 걷고 있었다.(한참이 지난 뒤, 우리는 그 날 누가 산을 오르자고 했는지를 두고 치열하게 다퉜는데, 분명한 것은 카메라에 앞장서서 걷기 시작하는 준의 뒷모습이 찍혀있었다.)


눈으로 금방이라도 뛰어오를 수 있을 것 같은 그 산의 풍경이, 아름다울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름 아닌 바릴로체니까. 아마도 우리는 홀린 것이다. 중독이라는 표현이 정확한지도 모르겠다. 입으로는 싫다고 하면서도, 몸은 벌써 저만치 움직였다.


이렇게 따뜻하고 맑은 날에, 대자연의 품에 안기는 일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지 않고서는 계획도 없이, 왕복 8시간이 걸리는 트레킹을 하는 멍청한 짓은 저지를 수 없지 않겠는가. 그것도 다시는 트레킹을 하지 말자고 다짐한 다음 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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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한 지 반시 간도 되지 않아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입고 있던 옷은 죄다 벗어 허리춤에 묶었다. 빠르게 세시간여를 걷자, 어느새 지면이 하얀색으로 바뀌어있었다. 정상에는 눈 덮인 얼음이 반쯤 녹아, 눈도 뜨기 힘든 호수가 있었고, 추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 간판에 적혀 있던 소문의 프레이 산장(Refugio Frey)은, 시즌이 끝난 뒤라 사람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오를 때에도, 하산하는 몇 명 외에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산장의 문을 열자 딸랑이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좋아서 몇 번이나 문을 드나들다 산에서 10년은 산 것 같은 직원의 눈총을 받았지만, 산장은 아담하고 아늑했다.


마지막 버스 시간을 잊고 있던 우리는, 산장에서 30분을 보내고 거의 뛰다시피 산을 내려왔다.(8시간 거리를 5시간 만에 주파했다.) 무릎은 덜덜 덜덜, 발목에서는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온몸은 땀범벅이 되었고, 숨을 쉴 때마다 머리가 울려서, 목소리가 목구멍에서 더 이상 올라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준이 죽은 사람처럼 버스정류장 기둥에 기대에 쓰러져 있었다. 그렇게 우리의 마지막 트레킹이 끝난 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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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르르 또르르.

처마를 타고 흐르는 빗물 소리를 음악 삼아 몸을 일으켰다. 새벽에 잠시 내린 비가 멎었다. 창 밖에는 눈부신 호수를 배경으로, 푸른 햇살이 풍성히 쏟아지고 있었다. 호숫가에 출항을 준비하는 배가 보였고, 겹쳐진 산맥에는 군데군데 만년설이 얼룩졌다.


공기는 따스하고 친절했으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빵 냄새가 났다. 준에게는, 내일까지 다 써야 할 돈이 아직 500페소나 남았다. 다리는 쓰리듯 아팠지만 우리는 오늘, 렌터카를 몰고 남미의 모든 신혼부부들이 꿈꾼다는 바릴로체의 호반길을 달릴 것이다. 저녁으로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피자를 먹을 계획이었다. 여행을 하면서 이토록 완벽한 아침은 처음이었다. 이게 다 지금 식탁에 앉아,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준 덕분이다.


그런 녀석의 눈동자가 묘하게 불안해 보이는 것은 내 눈이 흐린 까닭이다. 녀석의 입이 자꾸만 뭔가를 중얼거린다고 느끼는 것은 내 귀가 어두운 까닭이다. 내가 계란을 굽고, 커피를 테이블 위에 내려다 놓았을 때, 갈 곳 잃은 녀석의 눈동자가 마침내 내 눈과 마주쳤다.


“빨리 얘기해라. 지금 얘기하면 안 때릴게”


거의 100% 농담으로 던진 말인데, 녀석의 입에서 청천벽력과도 같은 대답이 나왔다.


“계산이 안 맞아. 돈이 모자라”

“뭐라고? 얼마 남았는데?”


녀석이 말없이 직접 계산한 장부를 보여 줬고,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250페소.


하마터면 내 앞에 놓인 뜨거운 커피를, 녀석의 얼굴에 퍼부을 뻔했다. 널브러져 있는 녀석의 배낭 옆에, 앞으로도 절대 걸치지 않을 티셔츠와, 온갖 쓸데없는 기념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께 산 초콜릿은 몇 번을 녹았다가 다시 굳어져, 누군가 싸놓은 똥같이 변했다. 며칠 째 면도도 하지 않은 채, 시커멓게 그을린 녀석의 얼굴이 진짜 거지 같다. 아니 이 자식은 심각한 멍청이다.


250 페소면 우리 돈 5만 원가량인데, 렌터카는 어림도 없다. 당장 내일까지 식비로만 쓰더라도 빠듯하다. 그렇다고 저 아름다운 호수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총 25km에 달하는 호반을 일주하려면, 자전거라도 빌려야 했다.



물론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여행자에게 특히 그렇다. 자전거 대여료는 하루에 120페소였다. 두 대를 빌리고 나면, 겨우 5천 원 정도의 돈이 남는다. 이제 오전 11신데 점심은? 저녁은? 내일 떠나는 버스를 타기까지, 네 끼를 굶어야 한다.


갑자기 공황상태가 되어 호흡이 가빠졌다. 어제 이 멍청이가, 멍청한 미소를 지으며 비싼 초콜릿을 사 대면서, 가게 주인과 사진을 찍을 때 알아봤어야 했다. 렌터카도 자전거도 실패다. 남은 것은 두 다리뿐. 그렇다고 25km를 걸을 수도 없다.


입으로 온갖 욕을 내뱉으며, 언덕 위 전망대를 오르기로 했다. 혹시 호수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과감하게 호반 일주를 포기할 생각이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다는 것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문제는 그 보다 먼저 전망대에 오르는 것을 포기해야 할 지경이었다. 겨우 600미터 높이의 낮은 동산이었는데, 간밤의 피로 때문인지 손으로 당겨야만 무릎이 움직였다. 겨우 정상에 올라 뒤를 돌아보자, 한참 밑에서 네발로 기어 오는 준이 보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발로 차 밀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팔수만 있다면, 어디 소시지 공장 같은 곳에 녀석을 팔아버리고 멋진 오픈카에 올라 달리고 싶었다.


“그런데 미스터 쥬드. 이 거지 같이 생긴 놈은 어디다 써야 하죠?”

“걱정 마세요. 질기고 맛없는 소고기만 먹여줘도,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할 겁니다. 산수도 못하는 멍청이니, 일당 따위는 대충 아무렇게나 줘도, 좋다고 다 써버릴 놈이죠. 하하하하”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은, 내 눈과 귀를 멀게 했다. 크고 작은 호수를 감싼 산 봉우리와 반도는 한 폭의 그림이었다. 멀리 보이는 설산은 하늘과 호수를 구분하라고, 누군가 만든 것 같은 완벽한 입체감을 선사했다. 이런 풍경을 돈이 없어서 포기하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정말이지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은 죄다 아르헨티나에 있다.


다시 자전거 대여점으로 갔다. 비장의 무기인 신용카드가 거절당하자, 가장 상냥해 보이는 여직원을 붙잡고 늘어졌다. 자전가 대여료를 20페소(약 4천 원)만 깎아주면, 우리는 숙소까지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난 뒤에도 빵 한 조각을 먹을 수 있노라 사정했다. 그러나 웃을 때는 천사나 다름없던 그녀는 오로지 '노'라고만 말했다. 준이 얼마나 멍청한 짓을 했는지 설명하자, 이번에는 '아임쏘리'가 되돌아왔다.


결국 또 트레킹이 시작됐다. 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휙 하고 지나가면서 우리를 돌아보곤 했고, 그때마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행인 것은, 바릴로체는 이름 없는 외딴길조차 너무나 아름다웠다. 나는 준의 뒤통수를 노려보며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도, 파라마운트의 로고가 떠오르는 설산을 향해 셔터를 누르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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띄엄띄엄 모습을 드러내는 호숫가에는, 비키니의 여인들이 일광욕에 한창이었다. 건너편에는 으리으리한 별장이 호수를 따라 띄엄띄엄 지어져 있었는데, 눈에 보이는 것은 죄다 가지고 싶은 풍경이었다. 호수에도 에메랄드 그라데이션이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그 날 처음 알았다.


그런 풍경들을 지나쳐 말 그대로 하염없이 걸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호수를 보겠다는 불굴의 의지가 다리를 움직였다. 두 시간을 걸은 뒤에야 오르막이 시작되었다. 채 몇 분 지나지 않아, 내가 세상에서 본 것 중에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머리에 하얀 모자를 쓴 산맥을 배경으로, 여기저기 구멍 난 것처럼 펼쳐진 호수들은 평화로움 그 자체다. 세상의 모든 파란색을 모아놓은 것만 같은 그 오묘한 파란 빛깔은, 천국에 한 발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줬다. 춥지도 덥지도 않아, 원하는 만큼 이곳에 머물 수 있다는 점이 제일 행복했다.


입가에는 미소가 흘렀고, 증오나 원망 같은, 속세의 감정은 한순간에 사라졌다. 세상의 모든 달콤한 말 들이 입가에 맴돌았다. 당장이라도 전화를 걸어 그녀에서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어디선가 출발한 보트가 호수 위에 긴 꼬리를 그리자, 퍼즐 조각처럼 움직여 그녀의 얼굴이 피어올랐다. 옆에 있는 못생긴 멍청이에게라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다음 버스는 몇 시간 뒤에나 올 거야”

“괜찮아요. 우리 목적은 돌아가는 게 아니라, 여기 앉아서 이 풍경을 보는 거니까. 고마워요.”

"그거 좋지. 즐기라고"


지나가던 노인이 던진 한 마디에도 하마터면 사랑한다고 대답할 뻔했다.



돌아오는 길, 하늘 가득 흩날리던 정체모를 하얀 물체는 내 눈에만 보이던 신기루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떠나야만 하는 여행자를 위로하는 바릴로체의 선물이었을까. 우리는 이제 세상에 둘도 없이 아름다운 곳 이별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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