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 아타카마 사막의 비극 前

아타카마, 칠레

by JUDE

요일마다 다른 콘셉트의 파티가 지겨워지는 걸 보니 산티아고를 떠날 때가 되었나 싶었다. 어제는 '장진영'도 떠났다. 북쪽으로 이동하는 사람들의 목적지는 대부분 같다. 지구에서 가장 오래되었다고 전해지는 아타카마 사막(Atacama). 다시 혹독한 자연의 품에 내팽개쳐질 차례가 온 것이다.


버스는 우리를 기다렸다는 듯이 타자마자 터미널을 빠져나갔고, 익숙한 것을 떠나는 안타까움도 잠시 새로운 것을 본다는 두근거림이 머릿속을 채웠다. 다시 안데스산맥을 따라 1,600km를 달리는 동안 정확히 24시간이 흘렀다. “야. 24시간 금방 가는데?” 따위의 소리를 늘어놓으며 머리 위 선반에서 작은 배낭을 꺼내는 순간, 이상하게 가방이 가볍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극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뭐, 노트북이 없다고?”


준이 버스에서 내려 담배를 꺼내 물면서 말했다. 산티아고를 떠나기 직전에 숙소 로비에서 카메라의 사진을 노트북으로 옮기는 작업을 했다. 사진이 복사되는 동안 직원에게 노트북을 잠시 맡기고 지하 창고에 배낭을 가지러 갔다. 다시 배낭을 메고 올라와서는 노트북의 존재를 잊은 채 24시간을 가는 버스를 탄 거다. 기억을 더듬을 것도 없는 매우 간단하고 명료한, 그리고 최악의 실수다.


"하... 토니..."


핑계거리라도 필요했기에 토니의 이름을 뱉었다. 이런 멍청한 일이 그냥 일어나지는 않는다. 사건을 되짚어 보자. 비극의 시작은 배낭을 가지러 창고에 내려가는 순간부터다. 아니, 우리가 토니를 만났을 때부터였는지 모른다.


토니. 영어로 'TONY'라고 쓰고 30대 후반의 미국인이다. 산티아고의 첫날밤에 숙소에서 만났고, 나와 같은 침대 2층을 썼다. 테라피스트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엔 그냥 히피 같았다. 산티아고에는 9년 전에 사귀었던 여자를 만나러 왔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부에노스 아이레스에 5년 전 여자 친구를 만나러 간다. 여행의 마지막은 리우에서 지난 새해를 함께 보냈던 여자를 만난다고 했다.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여자 친구가 그 여자 친구를 말하는 거야?"

“응. 만나면 사랑을 나누고, 떠나면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관계.”

“그것참 신기한 관계군 그래. 한국에선, 아니 아시아에선 상상도 안 되는걸. 대체 무슨 수로 그 많은 여자 친구들을 만든 거야?”

“언어를 서로 가르치는 거지. 나는 영어를 가르치고 스페인어를 배우는 거야.”


한 마디로 토니는 말로 하는 대화를 몸의 대화로 바꿀 수 있는 능력자였다. 덕분에 3개 국어를 구사했고, 기본적으로 유쾌하고 좋은 녀석이다. 문제는 말이 너무 많다. 산티아고의 아침은 마치 깨어나길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걸어오는 토니와 눈을 마주치면서 시작되었다. 그렇게 한 번 입을 열면 2층 침대에서 나를 내려다보는 어정쩡한 자세가 아파오거나, 심한 목감기라도 걸리기 전에는 멈추지 않았다.


지하창고에서 배낭을 메고 다시 계단을 올라오는 길에 토니와 맞닥뜨렸다. 녀석이 내 배낭을 들어주었고 그때부터 긴 작별 인사가 시작되었다. 토니의 뇌는 누군가를 기억할 때 최대 몇 분까지 이야기를 들어주는 지를 저장하는 것 같았다. 아마 내 이름은 '최대 30분. 둘이 같이 있으면 한 시간' 라고 저장되어 있을 거다. 작별인사가 20분이 넘게 이어졌고, 그 사이 노트북은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버스를 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부랴부랴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는 버스가 시동을 걸고 후진을 하려는 찰나였으니까.


전자제품을 챙기는 건 내 임무다. 그리고 여행의 모든 기록이 담긴 노트북은 우리의 보물 1호다.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잔뜩 들어있다. 이대로 24시간을 되돌아가야 하나? 왕복 48시간을? 아니 일단 확인부터 해봐야 하는데 전화를 어디서 어떻게 걸지? 이럴 때는 대체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일단 숙소를 찾자. 거기 인터넷이 되기를 비는 수밖에 없을 거 같은데. 혹시 진영이 만나면 땡큐고.”


그 와중에 굳이 먼저 떠난 '장진영'이 묵는 숙소를 찾기로 했다(진영이가 로밍된 핸드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 다른 뜻은 없었다.) 사방에 흙먼지가 날리던 아타카마는 40도를 훌쩍 넘는 더운 날씨였지만, 더위를 느낄 새도 없었다.



모래 먼지가 풀풀 날리는 골목길을 헤매는 내내 불안했다. 진영이는 아직 그곳에 머물고 있을지. 이 모래먼지에 다 쓰러져가는 마을 어딘가 ATM은 있을지. 산티아고의 숙소에 노트북이 보관되어 있기는 한 지. 손바닥만 한 마을에서 주소 한 줄에 의지해 길을 찾는 데에만 한 시간이 꼬박 걸렸다. 찾아간 숙소는 여행자들이 몰려있는 골목에서 한참 벗어난 곳이었는데, 대체 누가 이런 데까지 올까 싶은 그곳에서 거짓말처럼 '장진영'을 다시 만났다.


“세상에! 진짜 왔구나!”


1도 기대하지 않았던 눈치였지만, 천성은 어쩔 수 없는지 여전히 활짝 웃는 표정이었다. 준은 그녀와 기념 촬영을 하고서야 사정을 설명했다. 안그래도 커다란 눈동자가 1.5배는 더 커져 무서울 지경이다. 그녀는 기꺼이 전화기를 빌려주었다. 잠깐. 근데 전화번호를 알려면 인터넷이 돼야하잖아? 멍청이와 같이 다니다보니 같이 멍청이가 된건지, 그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천만 다행히도 다 쓰러져가는 집 한편에 1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컴퓨터라고 불러도 되는지 의심스러운 기계가 한 대 보였다(앞뒤가 그렇게 두툼한 모니터를 본 게 얼마만인지). 구글에 접속하는 데에만 몇 분은 걸리는 컴퓨터였다.


겨우 전화를 걸어 노트북의 무사함은 확인했다. 그러나 택배로 보내줄 수 있겠냐는 부탁은 1초 만에 거절당했다. 하긴 기껏해야 아르바이트생 일 텐데 뭐하러 그런 수고를 하겠는가. 애초에 이 사막에 우체국이 있는 지도 의문이다. 진영이는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칼라마(Calama)로 간다며 작별인사를 했다. 남은 우리는 어떻게든 고물 PC와 시름 하며 24시간을 되돌아 갈 방법을 생각해야 했다.


우선 미션을 수행하는 건 혼자서도 충분하다는 데 동의했다. 비용도 절반으로 줄어든다. 인간적으로 버스에서 48시간을 혼자 견디는 건 무리니 비행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다행히도 진영이가 간다던 칼라마에 공항이 있었다.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는 스카이라인 항공사. 이틀 후 산티아고로 가는 편도 비행기가 고작 17,000페소다(4만 원가량). 당일 곧바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무려 네 배의 가격이었지만, 돈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칼라마가 뭐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오지까지 당일 왕복하는 항공편이 있다는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여기 오는 사람들이 죄다 산티아고에 뭔가를 두고 오기라도 하는 걸까.


제일 중요한 문제가 남았다. 과연 누가 갈 것인가. 공평하게 사다리를 탔다. 운명의 주사위는, 당연하다는 듯이 나를 가리켰다. 당장 내일 버스를 타고 한 시간 거리인 칼라마로 가야 한다. 도착하자마자 공항으로 가 산티아고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 한다. 산티아고에서 노트북을 되찾은 뒤에는 다시 공항으로 가서 올때의 일정을 거꾸로 반복하면 된다. 다시 이 사막으로 오는 건 사흘 후가 될 것이다.


세상이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머리속이 복잡한 그때 갑자기 고물 PC의 화면이 꺼졌다. 사막의 전기는 제한적이다. 해가 진 밤하늘에 수천 개의 별들이 가시거리에 들어왔지만, 항공권 결제를 못해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일부러 방의 전등 스위치를 켠 채 잠이 들었다. 전기는 정확히 아침 7시에 다시 들어왔지만, 결국 항공권을 사는 데는 실패했다. 당일 출발하는 표는 카드결제가 되지 않는단다. 이제 꼼짝없이 48시간 버스를 타야 한다(다음 비행기는 일주일 뒤였다). 더 참지 못하고 바깥으로 뛰쳐나가 육두문자를 쏟아냈다. 다른 방법이 없는지 마을을 뒤졌지만, 아타카마는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것들만 최소한으로 갖춰진 곳이었다. 공항도, 우체국도, 은행도, 인터넷 카페도 없었다.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휘청거렸다. 침대에 쓰러지듯 벌러덩 누웠다. '이대로 못 일어났으면'하는 생각이 들던 그 때, 준이 방문을 열고 말했다.


"야. 됐어. 안 가도 돼. 토니가 보내 준단다."


녀석이 태연하게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 갑자기 눈물이 날 거 같았다. 지저분한 입에서 뿜어져 나온 연기가 방안을 멤돌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내가 마을을 뒤지는 사이 준이 페이스북으로 토니에게 연락을 한 거다.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택배로 보내주겠다고 했단다. 마침내 우체국에 물건을 맡겼다는 메일을 받은 순간 만세를 불렀다. 그날이 내가 페이스북을 처음 시작한 날이다(토니는 나의 페이스북 친구 1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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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도착까지는 앞으로 5일. 좀 더 나은 숙소(저녁에 전기가 나가지 않는)로 옮긴 뒤, 택배비를 제외하고 남은 칠레 돈을 날짜에 맞춰 철저하게 분리했다. 우체국은 칼라마에 있으니 왕복 버스비도 남겨두어야 한다. 5일 치의 물을 사 오는 길에 마을의 유일한(아마도) 펍에 들러 맥주와 바싹 익혀진 치킨 한 마리를 해치웠다. 내일은 아타카마 사막을 탐험하기에 가장 좋다는 '달의 계곡'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우리는 일주일을 사막에 갇혀 지낸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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